산해기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1) 아으, 누가 이 공주를 구해낼 것이냐

2) 아으, 누가 저 독룡을 퇴치할 것이냐

3) 아으, 누가 저 독룡을 퇴치하여 공주를 구할 것이냐


주의! - 책 뒤에 붙어 있는 차창룡 시인의 글을 보건대, 아으 공주-독룡 시리즈에 대한 아래의 이해가 오독이었던 모양이다. (꼽아서 말하자면, 난쟁이 꼽추에 대한 이해가 그런 것 같다.)  조금 더 생각해 본 다음에, 아래 내용을 수정하든 날려버리든 해야겠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보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싶으면, 돌팔매질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손(客, 手)들은 어디에 계실지. 어디에나 계실지.


- '물질주의'가 권세를 획득한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인다. 작가 특유의 신화적 상상력도 동화라는 틀에 맞춰 재밌게 발휘되고 있다. 낯선 용어의 등장에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다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 한 판'이 벌어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이미지들이 살고 있는 이미지네이션. 시인과 현자가 흠모해 마지않는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가 눈을 뜨면 이미지네이션엔 해가 떴고 그녀가 잠이 들면 그곳엔 휴식이 찾아왔다. 그녀의 몸과 말과 마음이 곧 이미지네이션으로 현현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 숨겨져 있던 독룡의 알에서 물질주의가 깨어나면서부터 이미지네이션의 평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독룡이 공주를 납치해 (신부를 삼으려고 했으나 공주가 완강히 거절하자) 높은 탑에 가둬 버리고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하나의 종교가 되어, 그것도 기존 종교가 따라갈 수도 없는 철저한 종교가 되어, 열렬한 숭배를 받고 예배를 받아 챙겼다.

제파계(신들의 세상)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물질)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그것의 운명에 쫓아 살 수밖에 없었다. 당면한 상황(예배를 빼앗겨 굶주리게 된 상황) 앞에서 (하나의 세계를 따로 창조해 내지 않고) 전전긍긍한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었다. 주(主)와 문(文), 무(武)가 논의하는 자리에 운명의 베틀을 짜는 따님(地님, 月님, 땋는 님)이 불려 나온다. 그녀는 물질주의 독룡은 체와 용 사이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까닭(그릇으로서의 '체'가 쓰임으로서의 '용'으로 변질)에 '태어난 것은 죽게 되어 있다'는 자연계의 운명을 입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녀는 이어서 물질주의의 독룡이 자기 자식에게 살해당할 '라이오스의 운명'을 갖고 있으며, 그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얼음성에 갇힌 공주를 어미 삼아 자식을 태어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물질주의 독룡을 만나러 몸을 입고 가는 것에 대한 허락을 구한다.


따님은 '난쟁이 곱추 광대'가 되어 기름지고 권태에 찌든 독룡을 즐겁게 해주면서 그의 신뢰를 얻게 된다. (난쟁이 곱추 광대가 '육체/물질'로 대변되는 '거대한 왕/검센 종자'의 머리꼭대기에서 노는 장면은 작가의 초기 단편-숙주-을 읽은 사람들에게 반가운 장면일지 모른다.) 독룡은 '난쟁이 곱추 광대 따님'의 현란한 언사에 꿰여(서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독룡 자신도 죽고 싶음의 욕망을 갖고 있다. 그는 거기에도 꿰여) 점차 자신의 종말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에서 독룡의 종말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그가 공주에게 다가가는 것에서 이야기가 끝이나고 있다. 작가는 '독룡의 결말이 궁금함? 그럼 세상 어찌 돌아가는 지 함 둘러 보삼.' 하고 눙을 치며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크게는 뛰어난 비유와 작게는 (마치 눈 앞에서 한 판의 소리 장이 벌어진 듯 펼쳐지는) 재미 있는 말 주고-받기 탓에 쭈욱 읽어 내려오기는 했지만 '엉?' 하고 멍해져서 '무슨 말이지?' 싶은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물질주의 독룡과 공주의 결합,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나는 자식이 펼치는 운명이 현대 물질주의 문명이 (은유를 벗고 나서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시사점을 던지고 있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말을 감히 해도 된다면, 작가는 '칠조어론'에서 정점에 이른 후, 그 다음 작품에서부터는, '하산하기'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칠조어론 마지막권까지는 이를 악물고 치열하게 올랐다면 이제는 뒷짐 좀 지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여유롭게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런 '추측과 억측'을 하게 되는 것은, 여전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표현이 훨씬 '삶의 껍데기', '우리 삶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작가는 칠조어론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 여러 인터뷰에서 이삭줍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이 일종의 주석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 작품들을 보면 칠조어론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일 때가 있는 것 같다.) 독자로서는 커다란 이득이 아닐 수 없다. 훨씬 읽기에 편안하고 그러면서도 퍽 친절한 풀이를 작가 자신이 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1


+ 십여 년 전 이 작품을 읽었을 때에는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어렵게만 느껴져서 절절맸는데. 지금 읽어보니 그게 억울할 만큼 재미도 있고 의미도 풍부하다. 어쩌면 작가는 (익숙해지는 것이 힘들 뿐)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못 알아먹을 소리'만 하고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물론 '추측과 억측'이다.


4) 음담패설이라면 몰라도에서는, 지하계(파탈라, 사람의 잠재의식)에 적籍을 두고 있는 웅공자熊公子가, '위쪽 세상'이 그리워서, '쭐끔(!)' 솟아오른 뒤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에 앞서, 저승 내려갔던 시지푸스가, 꾀를 내기로, 하데스의 허락을 받아 다시 땅 위로 오르게 됐다는 이야기가 돼 있다. 시지푸스는, 그래, 저승길에 한 번 올랐다 왔던 까닭으로, 얼굴이 달라져, 하데스가 달아난 그를 다시 잡아내지 못하게 됐다는 얘기가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웅공자도, 윗세상 쭐끔 맛보기로, 결코, 전과 같을 수가 없게 됐을 것. 서두에 달려 있는 주석을 커닝cunning하건데, 이 이야기는, 웅공자의, 그림자 벗기 얘기다, 수피獸皮 벗기 얘기다. (라고, 함부로 얘기하다가 '혼나지 않을까?')


5) 세 바드도에 처한 세 유형의 몸의 시작은 말씀 바르도이다. 그곳에서는 신에게 부재하는 귀로부터 하여, 신에게는 육신이 없어, 신은 육성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데, 그 육성으로 말하고 싶음이, 구상의 우주로, 드러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육성으로 드러내고 싶은 그 욕망이 바로 성욕과 살욕으로 돼 있다. 신의 동물적인 욕망, 신의 창조력.) 다음이 몸 바르도이고, 그곳에서는 악테옹 콤플렉스가 말해진다. 악테옹 콤플렉스란, (바르도에서) 업의 바람에 불려, 쫓기기이다. 사냥 당하는 자가 되어 자기 자신(은 사냥꾼+사냥개)에게 사냥 당하기. 여기에 쫓겨, 유정은, 아무 '자궁'이라도, 그것이 '자궁'이어서 바람으로부터 숨을 수만 있다면, 숨기를 바라, 뛰어드는 것일 것, 고로 환생이다. 마음 바르도에서는 육신이라는 집의 현주소(는 죽음)와 그것의 구성 요소(는 사고팔난 등)를 읊고 난 뒤, 그곳을 지키는 것이 '욕망이라는 익명을 가진 입이 붉은 시꺼먼 개'라고 밝히고 있다. 

바르도가 과도기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상상해 보기로는, 말씀 바르도는, 말 되어지지 않은 것의 (말로써) 드러내고 싶음을, 몸 바르도는, 벗겨진 것의 (두려움에 쫓겨) 입고 싶음을 그 현주소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마음 바르도는, 필멸할 몸과 사고四苦에 시달리는 집에 깃든 입이 붉은 시꺼먼 개로 드러나 있는데, 이 무명의 상태를, 현주소로 하고 있는 듯도 싶다. 이것도 물론 '추측과 억측'이다.


6) 산해기의 첫 발은 짜라투스트라의 하산으로 시작한다. -(모든 왕자들의) 모험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노인네가, 제법 의미심장한 말로, 종장終章을 예고하고 있는 듯.


그가 (늙은이를 제외하고) 처음 만난 것은 공룡이다. 공룡은 고고학적인 존재(그러니까 남성적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것들)이면서, 하나의 의지(官)을 가진 에켄드리야(민중, 대중, 군중)이기도 하다.2 전자는 '죽었다'고 선언되고, 후자는 '태어났다'고 선언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용은 숭배될 것이 아니라 퇴치돼얄 것'이라면서, 그것의 퇴치길에 오르는데,


세 갈래진 길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하나는 중도中道로, 그가 걸어온 길과 같은 방향으로 뻗은 길이며, 다른 하나는 '죽고 싶은 자'가 가는 길, 또 다른 하나는 '젊어지고 싶은 자'가 가는 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죽고 싶지 않으므로, 또 젊어지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가던 길을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는, (아마도 젊어지고 싶은 자가 가는 길이라는 곳을 향해) 길을 올랐다. 그 길에서 그는 제당에 가 닿았는데, 제당에는 흰 암캐의 상반신에 날개 없는 학녀의 하반신을 해 갖고 있는 계집(세이레네스)이, 무녀로, 제사 자체로, 춤을 추며, '거북이 대가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왕왕 개(뱀)와 새는 그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뉘어져 인간을 나타내거니와 땅에 붙은 것과 땅에서 떨어지고 싶어 하는 이질적인 성질을 드러낸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계집이 지닌 부정적인 국면이 드러난다. 판켄드리야라면 새의 상반신과 무거운 개의 하반신을 갖춰 찢고 있을 테지만, 이 계집은 반대로 개의 상반신에 날개도 없어 아무짝에 쓸모 없는 새의 하반신을 갖추고 있다. 땅에 붙은 존재이다. 그래서 그것은 수컷들을 희생양으로 요구한다. 불알을 까먹는다.

- 여기에서 짜라투스트라는, 희생되는 수컷에 대해, 그 이름을 오이디푸스라고 이르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바뀌던 그 과도기에 처했던 자식들의 비극의 한 전형"이라고 말해 놓는 것을 보면, 이 오이디푸스는, 고고학적 존재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듯? 앞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남성우월주의를 숭배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것은 고고학적, 이라고 이름 붙여질 만 하고, 여기에서는, 흔들리는 남성우월주의에 당해 겪게 되는 비극으로 해서, 오이디푸스가, 다시 불려나오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 그리고 어쨌거나(?) 이 부정적인 제사의 이름은 흥행이라고 한다. 이것은 '집단적 무아의 강'이라고 이를 만한 것으로, (에켄드리야가 스스로 분만해 낸, 그 자신의 딸) 드빈드리야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젊어지기는커녕 더 늙어진 채로, 돌아나오다, 덜컥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길 위에서 길을 잃었다. 그가 왔던 방향으로 놓여 있다던 그 길, 중도는, 치우친 적이 없었던 자가 걸었던 길이었고, 회춘의 고장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그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이정표에는 '죽고 싶음' 밖에 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 회춘의 길은 색色을 대변하고 있고 (그래서 그곳에서는 윤회가 계속되고 있다), 죽고 싶음의 길은 공空을 대변하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그것 사이에 놓여진 중도를 걷다가, 덜컥, 회춘의 길로 들어서, 그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는데. 그래서 그는 그렇게 중도3를 잃으며, 정도正道라는 새 길을 찾았다고 이른다. 그가 찾은 정도란,

색계에 진육 입어 태임받은 유정들의 '공득'에는 '중도'가 아니라 '정도'가 있는 것이며, 그런 과정이, '육도' '삼세'라는, 현상계로 현현해 있는 것이라는, 그 법을 설하려 하는 바이다. '육도'란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인간도, 아수라도, 제파도'로써, 우주의 횡대를 이루며, '삼세'란, '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 마음의 우주'로써, 종축을 이루는, 그것을 가리키는데, 나 짜라투스트라의 믿음에는, 저 '육도' 중 아래쪽 '삼(악)도'는 '몸의 우주'의 영지며, (몸이 지옥이며, 아귀도며, 축생도 자체가 아니더냐?) 그 위쪽의 삼도는 '말씀의 우주'의 영역일 것이라고 하고 있다. (말씀의 성육신이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물론 ,먼저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지만, 아수라와 신들은, 언어와 꼭 같이, 그 형태는 보이지 않음에도, 언어가 갖는, 초력성을 모두 갖고 있음도,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저것이 통틀어 '색계'인데, '마음의 우주'는, 그 저쪽(피안)에 있다고 일러지는 이상, 그쪽에는 건너 뛰어보지 않고서는, 어떻게도 말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유정은 그러니까 '에켄드리야'로부터 '드빈드리야' → '트린드리야' → '카투린드리야' → 판켄드리야→라는 순서로, 진화의 정도를 밟는데, 그 진화가, 횡/종으로 충실히 이뤄질 때만, '공계'를 성취할 역동적 날개를 돋아내는 것 (161~162)

이라고 한다. 몸의 우주에 속한 것에게는 몸만큼 실다운 것이 없으며, 마음의 우주에 속한 것에겐느 공만큼 실다운 것이 없다고 하니, 어느 우주 한 군데에서든, 실답지 않은 것이, 발들일 틈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정도의 일갈일 것이다.


그는 '죽고 싶음'의 길로, 들어섰다. (고 하면서, 이승에 놓인 길치고, 이 길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말도 덧붙여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욥 또래의 영감을 만난다. 그는 말세를 기다리던 선지자였다고 했다. 하지만 말세는 오지 않았고, 왔던 사람들마저 가고는 다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짜라투스트라에게 이 영감은 '세상을 부정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그 부정성 속에서 자기들의 발목만을 쏙 잡아빼려는, 다른 유정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겨자씨만큼도 없어, 독사와 전갈과 황충과 같은 자'라고 보여진다. 그러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자기에게 보이는 재림이란, 거짓 선지자가 말하는 말세적인 재림이 아니라, "고전적 복음의 재정리, 재해석"4이라고 이른다.


다음 짜라투스트라가 만난 것은 에켄드리야의 새끼, 뚤파이다. 뚤파는 대중이라는 집단이 꾸어내는 한 꿈으로, 그 얼굴을 괄호로 하고 있다.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그것은 집단의 욕망이라는 소명으로부터 허구로서 태어난다. 네피림이라는 거인들. - 이것들은 어쩌면 소설법에서 이른 '신전적新典的'인 것들과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영상매체들에서 태어나는 것들?- 그리고 나서 그가 또 만난 것은 에켄드리야의 새끼, 좀비이다. 좀비와 뚤파는 모두 '머리가 없는 것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뚤파가 허구에 봉사하는 것이라면 좀비는 몸에 봉사하는 것이다. : 집단적인 허구에의 열광과 집단적인 스포츠에의 열광, 뚤파와 좀비? 


그러고도 만나진 것은 백설공주이다. 인구 감소가 바라지는 시기에는 일부다처보다도 일처다부가 바랄 만하고, 그것의 동화적 제휴가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라며, 그 동화에 숨겨진 신화적인 의미를 풀어헤쳐 보인다. 여전히 시선은 집단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중이다. 집단의 몸불리기가 걱정된다는 것.


그렇게 짜라투스트라의 여정은 끝이 난다. 바다로 더 가 볼 일 없이, 산 동네만 떠돌기로, 그는 바다 동네 탐험도 끝을 낸 것이다. 탐험의 끝에서 '신은 죽었다'는 풍문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진다.


: 4월에 읽었던 것을, 4월에 조금 끼적거렸다가, '음담패설' 이후로, 6월에서나 다시 끼적거려둔다. 6월에 끼적거린 끼적거림은 그리고 '읽은 후'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대강의 기억과, 대강의 발췌독을 통해 이뤄진 것이므로, '읽는 도중'에 당해 끼적거려둔 것보다, 훨씬 더 신뢰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 끼적거림 앞부붙에 붙여 둔 '주의'는 '주의'가 많이 필요하다.



  1.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뭣도 몰라, 이런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나는 이 말에 책임질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이 말을 되물릴 수도 없고 있다. [본문으로]
  2. 주석(136)에서, 분명, 짜라투스트라가 두 종류의 공룡을 보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하니, 에켄드리야를 제외한 하나가, 무엇인지, 어떻게든 궁리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해서, 아무렇게나인 듯, 대답을 적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답은 반응이라고 해야 할 것이지 정답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본문으로]
  3. 중도란, 색과 공 사이에 놓여 있는 난제에 대한, 한 대답이었다고 한다. 일단 난제란, 색계가 어떤 목적으로 일어났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고 하고,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곤란하게 주어져 있던 것이 1) 색계가 일어난 목적을 묻자니 색계에 실다움을 부여하게 되고, 2)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공계에 실다움을 부여하자 색계가 (무화無化하기로) 색계 아닌 것이 되며, 3) 그래서 색계가 실다운 것이 아니라고 해버리자, 덩달아 공계도 실다운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더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시선의 전환이 중도인데, 중도는 "깨닫지 못했으면 색과 공이라는 두 진리의 동등함을 인정하되, 양립할 수 없는 두 다른 끝을 접붙이려거나, 병합하려는 노력을, 하려 하지도 말고, 하지 않으려고도 말며, 대신 그 가운데 길을 취하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이 부분은 체 게 융의 생각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이 보인다. 재림=재해석이라는 부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고전적 복음이 '이후의 우주'에 합당하도록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점이 그러하다는 것. 융은 그것이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바래 버리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여기에다가 융을 갖다 붙이고 있는 것. 그런데, 이렇게 말하다, 혼 나지 않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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