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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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사이 

제4의 늙은 아해(이야기)는, '이제 고만 좀 들어갔으면' 싶은 늙은네가, 들어가면 나와지고, 나오면 들어가지는, 뫼비우스 띄 끊기를 도모해,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야기 끝에 붙여 놓은 작가의 '*'이 퍽 핵심적으로 보이는데도, 그 핵심과, 이야기를 이어놓지 못하는 짧은 '이해'가 안타까울 뿐이다. 제5의 늙은 아해(이야기)는 방 안에서 방위를 잃게 된 늙은네가 맞이하게 된 방위 잃은 죽음(세모꼴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사각과 삼각, 정사각과 직사각에 대한, 실로 아름다운 사유에 감탄이 나왔다. 제6의 늙은 아해(이야기)는 칠조어론에서 살짝 언급했던 '갈마 분열'론(은 생물학의 세포분열에 착안한, 갈마-업業-의 분열에 관한 가설)에 대한 자세한 주석이다. (티벳 사자의 서를 읽으며 떠올렸던 의문 하나가 여기에서 매듭을 풀었다.) 갈마론, 윤회와 환생론이 답변하지 못하고 있는 인구 증가에 대한, 작가의 가설적인 답변인 셈이다. 제7의 늙은 아해(이야기)는, '오호 통재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무신론자들이 세운 나름의 무신론적 유토피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무신론적 세계관에 대한 풍자/비판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은데. '오호 통재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다만 여기에서, 잘못 된 눈 하나(는 물론 이걸 쓰고 있는 독자 하나)는, 칠조어론 1권에서 보았던 '따님'네 돌아가는 사정에 대한 이해(랍시고 하고 있는 오해)를 조금 얻게 되었다고만 덧붙여둔다. '오호 통재라',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도 모르겠다,지만, 처음에는 '구원'처럼 보이던 것이, 어떻게해서 '왼마을을 잡아먹는 무엇'이 되는가를, 여기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추측과 억측)


혼방된 상상력의 한 형태

1. 동화(童話)에서 신화(神話)를, vice versa - 문드룸과 붉은 새 이야기를 시작으로, 문드룸 왕자가 비화현에서 화현의 세계로, 화현의 세계에서 다시 몸의 세계로, 말씀의 세계로, 마음의 세계로 치러내는 변신을 통해서, 세상의 '화리(化理)'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화에서 시작된 표절, 변용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도 있다. 표면에서는 동화다운 맛이 나면서도, 일단 입안에 들어가면, 삼세(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 마음의 우주)에 관한 맛, 다시 말해 신화적인 맛이 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쓸데 없는 재간)

2. 풍문(風聞)에서 현실(現實)을, vice versa - 아도니스 제의는 봄의 제전, 그러니까 거듭 태어나기(환생)로서, 몸의 우주를 나타낸다. 아도니스의 사당에서 곡비가 일러준 말, ("그러나 모든 향초들이 그이를 맞으려 꽃등을 밝혀 기다리면, 그이가 태양의 모습을 꾸며, 흰 양을 타고 오실 걸요.")을 통해, 당나귀에 올라 타고 온/오는 말씀의 우주를 드러내 보인다. 말씀의 우주가 개벽한 곳은 골고다 언덕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속이다. 자기 부정이다. 대속의 소리가 멈춘 곳에서 사람들은 환생을 거듭한다. : 몸의 우주로부터 말씀의 우주, 그리고 다시 우리 현실이 놓여 있는 곳(은 결국 세 개의 우주가 겹쳐져 있는 곳, 마음의 우주로의 길은, 거기 어디 있다는데도, 여기에서는 드러나 보이지가 않는다, 내게는 안타깝게도, 마음의 우주가 풍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곳)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3. 상(相)에서 성(性)을, vice versa - 송장의 자궁과 그 속에 임신되어 있던(혹은 태임 받았던) 여아(혹은 남아)와 그를 돌보기로 한 연화존자(혹은 암호랑이)의 (변용된 몇 개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자의 돌(혼) 구워내기 이야기가 한 마당 벌어진다. 비교적 짧지만 비교적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여서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相4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바로 앞에서 얘기됐던 "옴 바즈라파니 훙! 안쪽으로 터뜨려내려 핀 이 꽃을, 일시에 뒤집기로 한다면, 다시 말하면, 즉슨 밖이 되게 한다면, 옴 마니팟메 훙(연 속에 담긴 보석)의 형상을 취할 것은 자명하다."에 대한 주석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구렁이와 양파를 통해 옴 바즈라파니 훙!과 옴 마니팟메 훙!을 형상화 하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 이 챕터에서 나는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간결하게 이해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성 속의 여성, 여성 속의 남성, 많은 얘기는 그저 번잡할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4. 우화(寓話)에서 천기(天機)를, vice versa - 이솝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이렇다."제우스의 명을 받들어, 프로메테우스가 사람과 짐승을 지었더니, 제우스가 본즉, 사람보다 짐승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지라, 다시 명하여 이 짐승 중의 많은 것을 사람으로 바꾸라고 했겠다. 좇아 프로메테우스가 그렇게 하였더니, 전에 짐승이었던 것들은, 비록 형체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짐승의 마음을 갖고 있는 바였댔다." 이 이야기는 짐승 같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는 사람에 대한 것이며, 이야기 속에는 금수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의 짐승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짐승스러운 사람(vice versa)은 지구 위에 창궐해 어머니 가이아를 죽이고 있다. 히기누스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이렇다. 우수의 여신 쿠라가 흙을 빚었는데 어쩌다보니 어여쁜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보고 감탄하며 이것에 정(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지나던 (오지랖쟁이) 쥬피터가 그 말을 듣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어준다. 얼씨구 그래놓고 봤더니, 더 아름다웠더라는 것. 쿠라와 쥬피터 사이에, 빚어 생령된 것을 두고, 소유권 분쟁이 일었다. 거기에 참여한 것이 있었으니, 흙의 여신 텔루스. 그녀 역시 그가 흙으로 빚어졌음을 들어, 소유권을 주장했다. 지나던 사투르누스(시간)이, 솔로몬이 되어 판결하기를, '이것이 죽으면 쥬피터는 정을 취하고, 텔루스는 흙을 취하라고,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쿠라가 소유하라고 했다. 이어지는 후덕한 장자의 이야기에서, 장자는 지나는 라마의 조언에 따라, 해탈하기 위해 출가 입산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해탈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십여 년 후 다시 그 라마가 지나기에, 사정을 고했더니, 자기가 잘못 알려주었고 딱히 해줄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장자는 다시 자기의 굴로 들어가 연좌를 꾸몄고, 성불이나 해탈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렇게 성불과 해탈을 성취한다. : 이솝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짐승다움이, 히기누스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작가는 그 기반을 우수에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담겨 있는 것이 보인다. 장자의 이야기에서는, '오호 통재라', 무슨 말씀이신지 잘도 모르겠다.


영합(迎合)이냐, 순제(殉祭)냐는 바다에 사는 독룡에게 공주를 바쳐야 하는 바닷가 어느 동네의 사정을 전하며 시작된다. 그런데 그 독룡이라는 놈의 반은 보드라운 털을 갖고 있어 정온 동물스럽고, 나머지 반은 금강석도 깰 만큼 단단한 비늘로 되어 냉혹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한다. 어떤 공주는 독룡이 펼쳐 보이는 보드라운 편에 안기어 한 해를 짝꿍(영합)으로 지내다 시녀가 되어버리고, 다른 어떤 공주는 혐오감을 드러내 냉혹한 비늘에 여지 없이 희생(순제)당하고 만다 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작가는 얼굴을 바꾸어, 이와 같은 사정이, 우리 소설에게도 일어나 있다고 말한다. 왕자가 오기 전까지는 저러한 공주들이 무수히 바쳐져야 할 터인데, 오늘의 공주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작가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순제(殉祭)냐, 순난(殉難)이냐는 앞선 이야기에서 결말을 바꿔낸 이야기이다. 영합-순제가 소설 밖의 이야기였다면, 순제-순난은 소설 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왕자이면서 독룡인 창조력-파괴력의 '쏘고듦'에 당면한 공주가, 가져야 하는 어떤 태도(?)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왕자는 왔다, 그런데 왕자는 독룡이기도 하다, 순백의 존재인 공주는, 그 자신을 (여성에서 어미로서) 완성시키기 위해서, 저 왕자이기도 하고 독룡이기도 한 것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이겠냐마는) 하나의 아들을 낳아야 했던 것이다. 공주는 회임했고, 독룡은 힘을 잃었다. 공주는 어지자지를 나았고, 이제 사람들은 독룡의 뼈를 모아다, 생식과 번식을 빈다. : 어지자지나 생식, 번식(은 '일남이녀'이다. 한 자궁에 두 수컷, 그것이 바로) 인구 포화에 대한 진단이고, 처방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소설가의 소설이라는, 이 이야기는, 시대에 대한 진단이고, 시대에 대한 처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소설가의 소설일 듯?


- 다음에 다시 읽거들랑, 이것보다는 조금 더 잘, 읽어내고, 더 잘, 풀어낼 수 있기를.

- 시간의 Acteaon 복합증에 쫓겨, 지금 다시 읽을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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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 개정판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아니엘리 야훼 엮음, 이부영 옮김 / 집문당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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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여전히 훌륭합니다.


융이라는 사람에게서 분석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고 그래서 분석 심리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좋은 힌트를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두고 두고 음미하기에 좋은 내용들이 정말 많아요.



다만 책의 만듦새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실망스러운 점이 있었어요.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실망스러울 만한 구석이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일단 이 책은 구판에서 한자로 되어 있던 단어들을 한글로 옮겨 적었을 뿐, 새로 번역한 것은 아닙니다. 그랬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요. 문제는 구판에서는 없던 오자와 탈자들이 꽤 빈번하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굉장히 다급하게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무성의한 오자와 탈자를 없앨 만큼의 여유도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덧붙여서 새로 만드는 김에 구판에서 보였던 실수 같은 것들도 좀 잡고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요. 융의 저서 제목이 나올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째서 이런 것 하나 통일시킬 수가 없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저는 번역자를 매우 좋아하고 또 신뢰하기 때문에 잠깐 동안 융이 자기가 썼던 책의 제목을 바꿔가면서 자서전에서 썼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씁쓸한 기분으로 그렇지는 않을 거 같다고 고쳐 생각하기는 했어요.


번역자가 구판을 꽤 공들여 번역했다는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책이 이렇게 나온 걸 알면, 좀 속상할 것 같습니다. 네, 물론, 구판이 있는데도 새로 사서 본 독자 역시도, 마찬가지로 퍽 많이 실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표지 디자인이... 좀 안습입니다. 더 말하고 싶지만 여기까지.


+ 그런데도 저는 이 번역으로 읽는 게 좋아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것도 읽어봤지만 저에게는 이 번역이 훨씬 더 좋게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더더더 속상합니다. 이게 대체 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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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조어론 4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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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칠조어론 1권을 읽으며 꺼내 놓았던 말을 주워볼까 합니다. 그 때 그걸 읽고 나서 문학은 인간이 구원을 성취해 가는 그 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고 했었는데요. 마지막 권을 덮으면서는, 그것을 말머리 삼아, 그 말에 대한 의견을 마무리 지어보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박상륭 선생이 말하는 구원은 위로부터 은혜롭게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인간 스스로가 성취해 가는 어떤 것이라고는 이미 말해 놓았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한 문장이 박상륭 선생이 칠조어론을 통해 했던 모든 말들을 꿰고 드는 (똥꼬를 찔러 정수리로 꿰어져 나오는) 한 문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 근거로는 칠조인 촛불중이 죽어 가는 그 장에서 꺼내 들었던 그 도면을 들어 보려고 해요.

 

   도면의 가장 아래에는 비척(屄蜴)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몸의 우주와 말씀의 우주와 마음의 우주가 두 개의 양극을 갖는 타원형이 겹쳐 있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죠. (, , 움 비슷한 한 단어의 말소리를 흑, , 적에 겹쳐 넣었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봐요.) 다시 말해 이 그림은 양극을 갖는 두 개의 겹쳐진 타원형이 똥꼬에 비척을 꽂은 채로 우뚝 서 있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그림을 해석하는 두 개의 팁은 첨언된 문장 하나와 비척을 삼은 엄지손가락이 촛불중의 입에 꽂혀 들어간다는 다른 하나일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첨언은 아마도 이랬을 겁니다. 비척을 선목(禪木)의 뿌리로 삼아 흑으로부터 적으로 꿰뚫어 오르는 우주적 말씀이요. 덧붙여지는 괄호 안 문장에서는 이것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이 어쩌면 인간 재림에 대한 힌트가 아닐까 하고 잠깐 상상해 보기도 했어요. : 이 내용과 그 비척이 촛불중의 입(은 목 언저리이고, 목은 인간의 꿈과 말이 쏟겨 나오는 곳이니까, 거기)에 꽂혀 들어간다는 내용을 조합해 보면, 대충 이런 한 문장을 빚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을 뿌리(도구) 삼아 삼세(몸과 말과 마음의 우주)를 꿰뚫어 오르기

 

   이것이 바로 아까 위에서 말했던 아래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성취해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말씀은 선, 자아, 사유 등 다양한 얼굴을 갖습니다. 선은 니르바나로 솟구치기 위한 그 방편으로 언어를 사용합니다. (좋은 도구이지만 말의 유사구덩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요.) 자아는 사유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인간이 몸의 우주로부터 벗어나 불순한 존재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이것은 문화, 언어, 예술, 이런 것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도구이지만, 그것이 너무 좋아서 인간이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과 극복하기 어려운 이원론을 뿌리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면서 인간을 보다 높은 무엇으로 끌어가려는 것들을 아우르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 그러자니 결론은 인간으로서 주어진 삶, 인간으로서 열심히, 열심히 살 것이라고 밖에 더 말할 게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뒤져보니, 다른 데에서 쓰려고 그려놓았던, 양극을 갖는 두 개의 타원형이 겹쳐져 있는 이미지를 찾았습니다.





   추신1>


   부록 삼아 도형에 대한 이야기를 거칠게 풀어 놓습니다. 여기 그려 놓은 것은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칠조가 죽으며 그려 놓았던 것과 다르지만 그 내용은 다르지 않다고 봐서 데려 오는 데에 별 부담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 밑에 비척을 꽂아 넣었습니다. (귀찮아 대충 그린 탓에 양극을 갖지 않은 타원형입니다만, 마음을 넓게 열어, 양극을 갖는다고 보아주시길.)


 

   상사라는 몸의 우주, 흑의 국면입니다. 애밴 여자는 일단 말씀의 우주이고 흑과 적에 걸쳐 있으면서 백을 담당하는 국면입니다. 니르바나는 마음의 우주, 적의 국면입니다. 이게 대체 뭔가 싶지만 이것은 선목, 즉 요가나무라고 불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입니다.


   (동시에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유리장에서 최초로 이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도마뱀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도마뱀은 역()이고, 역은 시간이지요. 시간에 대한 탐구로부터 이 그림이 비롯되었습니다. 시간은 그런데 인간의 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요. 인간은 극소의 시간과 극대의 시간이 교접하는 바로 그 시중時中에 존재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저 그림으로 돌아가면 인간은 상사라, 즉 몸의 우주이면서, 쉼 없이 갈아드는 공간, 프라브리티에 뿌리를 두고서 니르바나로 솟아오르고 있는 존재입니다. 상사라와 니르바나 사이에 끼어 있는 애 밴 여자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긴 말을 줄이기 위해 세 가지 국면의 여러 이름을 좀 몰아보아야겠어요.

 

   니르바나 = 어린 양이 붉은 용에 대해 거두는 승리.

   애 밴 여자 = 진흙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모양.

   상사라 = 붉은 용, 옛 뱀, 자연, 하향적.

 

   인간이 상사라와 니르바나에 끼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애 밴 여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출산을 하는 즉시 그 여자가 낳는 어린 양을 잡아먹기 위해 붉은 용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인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붉은 용은, 상사라 국면으로서, 인간을 몸의 우주로 끌어 내리기 위해 벼르고 있는 존재입니다. 여자는 뱃속에 어린 양을 품고 있는데 이 어린 양은 인간을 상향적으로 이끌어주지다. 자연에 반하는 문화라고도 할 수 있고,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고,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 대치 상태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 그러니까 어린 양으로 솟구칠 수도 있고 붉은 용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이 위기 속에, 인간 존재가 놓여 있는 것이지요

 

   어린 양은 그런데 아비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어느 샌가 태어나 저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합니다. 읽다 보면 아주 환장할 노릇이에요. 고민고민하다 얻게 된 마음 편한 결론은, 이 어린 양을 논리나 논리적 난점을 단숨에 뛰어 넘어 버리는 역동적인 무엇이라고 이해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애밴 여자와 붉은 용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코끼리는 코끼리고, 사자는 사자인, 그런 상황이라면, 어린 양은 코끼리 몸뚱이에 사자 대가리를 한, 그런 괴물 같은 무엇, 그런 역동성, 같은 게 아닐까요.


   추신2> 


   지금까지 촛불중이 중이었다면 4권에서는 요가에 도통한 요기로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명상으로 몸을 벗어나 주유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죠. 그게 좀 허황되게 보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게 요가에 대한 사유의 연장선으로 보여서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유롭고 재미 있었습니다. 바르도가 무엇인지 (안과 밖이 뒤집혀 기호가 의미가 되고 의미가 기호가 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걸) 알아, 그곳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한 염태念態를 보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추신3>


   지금껏 칠조어론을 대하며 '언젠가는 한자를 한글로 바꿔 괄호 속에 한자를 넣어준 칠조어론이 나올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제는 그런 생각을 깨끗하게 접었습니다. 읽기에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그 한자와 온갖 조어들은 언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시도한 실험이고 모험이라는 것을 알게 돼서 그렇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깟 한자 적응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나, 기꺼이 그 모험에 동참하겠다, 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포털 사전이 많이 발전해서 마우스로 빼뚤삐뚤 그려 넣으면 그게 무슨 자인지 다 알려주는 세상 아닙니까.


   칠조어론 참 읽기 편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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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조어론 3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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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단으로 주어진 것을 목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수단이 목적이 되어 목적은 그동안 끝없이 유예된다고 합니다. 박상륭 선생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의 육신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니르바나로까지 진화를 성취해 내기 위해 주어진 것인데, 인간이, 마음이야말로 실다운 것이네 아니네, 육신이야말로 실다운 것이네 아니네, 삶이야말로, 죽음이야말로, 하는 시답잖은 말로, 수단을 목적으로 삼아, 집착하고 있으면, 그 원래의 목적은,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기까지 유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빌어먹을 윤회를 멈추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뭣이라는 걸까요.

   세 번째 책의 소제목(진화론)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줍니다. '진화'해야 한다는 거지요. 어디까지? 차안에서 피안까지. 피안까지 가서도 더 멀리.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라? 이번에도 답변은 시원시원하게 돌아옵니다.


   것. 것? 것!


   저 세 가지의 '것'은 산은 산, 물은 물의 세 가지 버전입니다. 주절주절 타이핑하기도 귀찮으니 대강 정리하면,


   몸의 우주 = 축생도 = 짐승스러움 = 인간이 육신에 푹 잠가져 있음 = 자아가 깨지 않아 삶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있음 = 산은 산, 물은 물.


   말씀의 우주 = 인세 = 문화적 = 인간이 그 머리를 쳐들기 시작함 = 자아가 눈을 떠 세상이 이원론적으로 또렷해짐 = (주체와 객체의 분리로 인해) 산이 산이 아님, 물이 물이 아님.


   마음의 우주 = ??? = ??? = 자기부정, 아집 여의기(란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의미가 입은, 몸을 비롯한 외부, 즉 무의식 깨우기)로 인해 이원론이 설 곳이 없어짐 = (그 자신의 무의식이던 객체를 깨워낸 주체는 곧 그 자신이 객체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어) 산은 산, 물은 물.


   다시 말해, 1) 아무 의문이 일지 못하던 마침표에 2) 자아라는 '원초적 질료'를 깨워내 물음표를 일군 다음, 3) 원초적 질료인 자아의 죽음을 통해 느낌표에 다다르기(는 깨닫기), 라는 겁니다.


   어깨가 절로 으쓱 으쓱.

   즐거워서 그런 것인지,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굽쇼? 싶어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당최 모르겠어서, 으쓱, 으쓱, 또 으쓱?





   세 번째 책을 읽어내기는 두 번째 책 읽어내기보다 조금 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어요.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을 잘못 읽어도 크게 잘못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니 두 다리(라고 하면 두 눈동자와 두 손 정도 안 될까요마는 어쨌거나 얘기로 돌아가면 두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밖에 달리 더 나아갈 수가 없었던 거지요.


   한참 같은 장소에서 맴돌 듯 나자빠져 있다가는 '뭐 첫 걸음에 나동그라질 수도 있지, 제까짓 게 뭐나 된다고, 한 번 디뎌본 적 없는 다리로, 일곱 걸음을 척척 걸어낼 줄 알았음?' 싶어, 까짓 것,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책으로 가기에는 걸어온 길이 길기도 기니 (이번 읽기는 망했음!) 가던 대로 내딛어 가보자고 했어요.


   바르도에 처한 염태는 한 번 깨닫기로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이 매순간 순간순간 주어진다고 하는데 (바르도와 역바르도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니 거기에서 되어가는 대로 여기에서도 되어간다고 치면) 실컷 디뎌 놓은 이번 책 읽기 어디에도 제대로 이해하기라는 '숨겨진 돌'이 있으리라고 크게 착각해 보렵니다.


   훕합!



뭣 좀 뒤틀린 심사가 있어서 그런가 툴툴거리는 투로 적어 놓았는데 말이죠. 사실로 말해 이야기는 점점 더 재미있어 집니다. 


1권이 끝나면서는 그저 촛불중이라는 육신이 이물스러워졌고 2권이 끝나면서는 그 이물스러운 육신을 벗기가 겁이 날만큼 막막하게 느껴졌었는데 3권이 끝나면서는 속박감이 좀 덜어지면서 그 몸(이라 하면 촛불중이면서 동시에 촛불중이라는 이야기 속에 떨궈놓은 독자의 눈)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바르도에 처한 한 염태를 니르바나로 인도하기 위한 책이지만 결국 그가 깨닫지 못하게 되면 좋은 자궁(이란 다른 것도 말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인도하며 끝이 나고 있어서, 쭈루룩 따라 읽으면서 한 죽음(바르도)을 겪는 것처럼 여겨보게 만듭니다. 저한테는 칠조어론도 슬슬 그런 느낌이 들고 있어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육도의 문 닫기 순서에 의한 색깔로서 책의 소제목들을 정해놓았으니만큼 이 책은 아주 친절하게 풀어진 티벳 사자의 서라고 생각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네, 근래에 이르러서는, 파드마삼바바라는 '기호(체)'를 만난 한 '의미(밀의, 용)'가 바르도 퇴돌(티벳 사자의 서)로 화현된 것처럼, 박상륭이라는 '기호'를 만난 '(별로 다르잖은 그) 의미'가 칠조어론(을 비롯한 선생의 잡설)로 화현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두 책은 한 언어의 서로 다른 방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럽니다. - 이런 비슷한 까닭으로 암만 많은 조사들이 나서 들고 떠뜰어싸도 한 마디 말도 더 보태지지 않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한 세상 저물도록 떠들어대고도 한 마디 말도 안 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여기가 바고, 실껏 떠들고 지친 시치미들이 몸을 누이는 곳이 아닌가, 하고, 상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  읽어 놓은 게 티벳 사자의 서 뿐이라 그것만 알아듣는다는 게 함정!! 쿠힛쿠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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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잡설 - 박상륭 꼼꼼히 읽기
채기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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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몇 가지 개념들을, 박상륭 저작을 기반으로 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저자의 해석이라든지 해설이 들어가 있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연구자의 입김도 없이, 박상륭의 저작만으로 용어를 풀이해 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책은 박상륭의 어휘들에 대한 (첨삭 없는) 풀이와 그 풀이가 기반하고 있는 저작들의 발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에이, 뭐야. 결국 발췌록이잖아, 싶을지 몰라도 (일단 발췌록은 아니거니와), 생각보다 매우 재미있고 또 유용합니다. 박상륭의 저작을 읽다가 보면 다소 애매하게 이해되거나 두루뭉술 이해하고 넘어가게 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 책은 아예 작정을 하고서, 그런 것들을 한 자리에 몰아 이해시키려고 들어서 그렇습니다. 상당히 친절하고 상냥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입문서라기보다도 오히려 박상륭의 저작들을 조금 읽은 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나다라 같이 떼고 들어가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가나다라를 떼고 나서 필요할 때 집어서 보는 사전(어휘집) 같다는 말입니다.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아도 좋고 이해되는 부분은 과연 그러한가 살피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박상륭 세계에 발목을 빠뜨려 쩔쩔매는 독자들에게 (몇 안 되는 박상륭 관련 저작 중 가장)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 같습니다.



+ 덧붙이자면 - 우주론과 상징은 재미있었지만 문체로 가면서 (저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한편) 조금 오글오글거리기도 해요. 문제의 특성을 이야기하다보면 아무래도 찬사가 툭툭 터져나와서 그랬겠지요. 상징에서 신발 부분은 조금 아쉬웠고, 아무래도 친절해지자니 그렇게 되겠지만, 같은 말의 반복이 좀 많이 보이기도 해요.


그러거나 말거나 유용해서 가끔씩 들춰보면 재밌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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