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가게 1~3권 세트 - 전3권 강풀 미스터리 심리썰렁물 5
강풀 지음 / 재미주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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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되고 있을 때에도, 혼자 앉아 보다가 숨이 막혀 결국 못 봤었는데, 얼마 전 결제해서 보다가 또,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 강풀의 장르가 무엇인지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 무서워서 숨 넘어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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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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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단편은, <나는 여기가 좋다>, <밤눈>, <올 라인 네코>, <바람이 전하는 말>, <가장 가벼운 생>, <섬에서 자전거 타기>, <삼도노인회 제주 여행기>, <아버지와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수년 전에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것을 읽어본 적이 있고, 그 까닭으로 이 작품집을 집어 들게 됐다. '바다의 작가'라고 익히 알고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찰진 이야기꾼인가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별 주저 없이, (왜 진작 안 읽었을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집어 들었다.

<나는 여기가 좋다>는 바다에 머물고 싶은 남편과 뭍에 뿌리내리고 싶은 아내의 사연을 들려준다. 어린 선장으로부터 해서 늙도록이나 선장으로 살아온 남편이 배를 팔게 되면서, 바다 사내를 남편으로 둔 아내의 고통스러운 삶이 자꾸만 쉬어져 나오는 한숨처럼 불거진다. <밤눈>에서는 끝은 났지만 성공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술집 여인의, 밤눈에도 얽히고 사랑에도 얽힌 사연이, 밤눈 내리는 소리처럼 조용하게 들려온다. 간간이 화자가 마시는 술잔에, 독자가 취하는 기분이 든다. <올 라인 네코>는 퍽 귀여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썩 구미에 당기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쩝쩝. (쓴 입맛 다시는 소리) <바람이 전하는 말>로부터는 이 작품집에 빨려 들기 시작했는데, 죄책감과 서운함이 만수산 드렁칡 같은 두 노인네가 앉아, 눈물 쏟아질 법한 얘기들을, 세월에 풍화된 탓에, 너무도 담담하게 나누는 풍경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바다와 육지에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간극을 흐르고 있는 진한 세월. 짧은 작품인데도, 그 안에 담겨 있는 늙은네들의 한 평생이, 짧지 않게 읽혔다. <가장 가벼운 생>은 그 탄력으로 인해 퍽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화자에게 어렵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아버지들 혹은 아들들에 관한 것이었다. 잠깐 만나 지냈던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기에 땅에 뿌리내리고 살면서부터 돈 들어오는 대로 부쳐주었더니 장성한 아들이 그를 찾아와 어색하게 '고마웠다, 그렇지만 이제 돈은 그만 보내라, 그 말 하려고 왔다'고 전하고 간다. 그가 가고 나서부터 노인은 병 아닌 병이 났는데, 그 병 끝에 들려준 이야기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였다. 아들로서의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은 죽음이었고, 아마 자기도 무언가 -딱 한 번 만났을 때의 그 모습으로- 아들에게 유산을 남겼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섬에서 자전거 타기>는 아내도 떠나고 배도 잃은 노인네가 섬에 죽으러 온 여인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노인네의 설정은, <나는 여기가 좋다>의, 그 노인네와 퍽 흡사해, 한 노인네라고 생각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고도 이 노인네는, 이 작품집 속에서 한 번 더, 얼굴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1- 노인네는 반갑고 여인네는 좀 거석거석거렸는데, 마무리도 역시 그러했다.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는 패스.

이 작품집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에 실려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다. 이 소설 때문에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됐고, 이미 전에도 여러 번 읽었더랬는데, 이번에도 역시, 여러 번이나, 배꼽을 잡고 읽었다. 찰지기가 이렇게 찰질 수가 없고 귀엽기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어디 가서 어른 대접 받는 아들과 처음부터 늙은 것은 아니었던 아비 사이에 벌어지는 기싸움과 더불어 그들 사이에 흐르는 짜안한 애정은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무척 재밌게 읽었으면서도 무언가 좀 아쉬운데, 뭐가 아쉬운지 잘 모르겠다.
후첨된 평론가의 글을 읽어보니, 그 역시도 어떤 종류의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기는 한 모양인데, 그가 제시하는 방향에는 별로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내게 이 작가의 이 소설집은, 무언가 아쉬운데, 뭐가 아쉬운지 아직 모르겠는, 그렇지만 재밌기는 오지게도 찰지게 재밌는, 그런 이상스러운 책으로 남을 것 같다. 소설집 전에 나왔거나 나중에 나왔던 다른 작품을 읽어볼 때까지는.




소심하게 이렇게 말해두었지만, 뒤에 첨부된 평론가의 글을 읽어보니, 평론가는 아예 이들이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들어가고 있다. (나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발자크를 떠올리게 되기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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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기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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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으, 누가 이 공주를 구해낼 것이냐

2) 아으, 누가 저 독룡을 퇴치할 것이냐

3) 아으, 누가 저 독룡을 퇴치하여 공주를 구할 것이냐


주의! - 책 뒤에 붙어 있는 차창룡 시인의 글을 보건대, 아으 공주-독룡 시리즈에 대한 아래의 이해가 오독이었던 모양이다. (꼽아서 말하자면, 난쟁이 꼽추에 대한 이해가 그런 것 같다.)  조금 더 생각해 본 다음에, 아래 내용을 수정하든 날려버리든 해야겠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보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싶으면, 돌팔매질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손(客, 手)들은 어디에 계실지. 어디에나 계실지.


- '물질주의'가 권세를 획득한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인다. 작가 특유의 신화적 상상력도 동화라는 틀에 맞춰 재밌게 발휘되고 있다. 낯선 용어의 등장에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다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 한 판'이 벌어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이미지들이 살고 있는 이미지네이션. 시인과 현자가 흠모해 마지않는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가 눈을 뜨면 이미지네이션엔 해가 떴고 그녀가 잠이 들면 그곳엔 휴식이 찾아왔다. 그녀의 몸과 말과 마음이 곧 이미지네이션으로 현현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 숨겨져 있던 독룡의 알에서 물질주의가 깨어나면서부터 이미지네이션의 평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독룡이 공주를 납치해 (신부를 삼으려고 했으나 공주가 완강히 거절하자) 높은 탑에 가둬 버리고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하나의 종교가 되어, 그것도 기존 종교가 따라갈 수도 없는 철저한 종교가 되어, 열렬한 숭배를 받고 예배를 받아 챙겼다.

제파계(신들의 세상)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물질)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그것의 운명에 쫓아 살 수밖에 없었다. 당면한 상황(예배를 빼앗겨 굶주리게 된 상황) 앞에서 (하나의 세계를 따로 창조해 내지 않고) 전전긍긍한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었다. 주(主)와 문(文), 무(武)가 논의하는 자리에 운명의 베틀을 짜는 따님(地님, 月님, 땋는 님)이 불려 나온다. 그녀는 물질주의 독룡은 체와 용 사이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까닭(그릇으로서의 '체'가 쓰임으로서의 '용'으로 변질)에 '태어난 것은 죽게 되어 있다'는 자연계의 운명을 입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녀는 이어서 물질주의의 독룡이 자기 자식에게 살해당할 '라이오스의 운명'을 갖고 있으며, 그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얼음성에 갇힌 공주를 어미 삼아 자식을 태어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물질주의 독룡을 만나러 몸을 입고 가는 것에 대한 허락을 구한다.


따님은 '난쟁이 곱추 광대'가 되어 기름지고 권태에 찌든 독룡을 즐겁게 해주면서 그의 신뢰를 얻게 된다. (난쟁이 곱추 광대가 '육체/물질'로 대변되는 '거대한 왕/검센 종자'의 머리꼭대기에서 노는 장면은 작가의 초기 단편-숙주-을 읽은 사람들에게 반가운 장면일지 모른다.) 독룡은 '난쟁이 곱추 광대 따님'의 현란한 언사에 꿰여(서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독룡 자신도 죽고 싶음의 욕망을 갖고 있다. 그는 거기에도 꿰여) 점차 자신의 종말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에서 독룡의 종말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그가 공주에게 다가가는 것에서 이야기가 끝이나고 있다. 작가는 '독룡의 결말이 궁금함? 그럼 세상 어찌 돌아가는 지 함 둘러 보삼.' 하고 눙을 치며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크게는 뛰어난 비유와 작게는 (마치 눈 앞에서 한 판의 소리 장이 벌어진 듯 펼쳐지는) 재미 있는 말 주고-받기 탓에 쭈욱 읽어 내려오기는 했지만 '엉?' 하고 멍해져서 '무슨 말이지?' 싶은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물질주의 독룡과 공주의 결합,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나는 자식이 펼치는 운명이 현대 물질주의 문명이 (은유를 벗고 나서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시사점을 던지고 있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말을 감히 해도 된다면, 작가는 '칠조어론'에서 정점에 이른 후, 그 다음 작품에서부터는, '하산하기'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칠조어론 마지막권까지는 이를 악물고 치열하게 올랐다면 이제는 뒷짐 좀 지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여유롭게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런 '추측과 억측'을 하게 되는 것은, 여전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표현이 훨씬 '삶의 껍데기', '우리 삶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작가는 칠조어론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 여러 인터뷰에서 이삭줍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이 일종의 주석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 작품들을 보면 칠조어론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일 때가 있는 것 같다.) 독자로서는 커다란 이득이 아닐 수 없다. 훨씬 읽기에 편안하고 그러면서도 퍽 친절한 풀이를 작가 자신이 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1


+ 십여 년 전 이 작품을 읽었을 때에는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어렵게만 느껴져서 절절맸는데. 지금 읽어보니 그게 억울할 만큼 재미도 있고 의미도 풍부하다. 어쩌면 작가는 (익숙해지는 것이 힘들 뿐)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못 알아먹을 소리'만 하고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물론 '추측과 억측'이다.


4) 음담패설이라면 몰라도에서는, 지하계(파탈라, 사람의 잠재의식)에 적籍을 두고 있는 웅공자熊公子가, '위쪽 세상'이 그리워서, '쭐끔(!)' 솟아오른 뒤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에 앞서, 저승 내려갔던 시지푸스가, 꾀를 내기로, 하데스의 허락을 받아 다시 땅 위로 오르게 됐다는 이야기가 돼 있다. 시지푸스는, 그래, 저승길에 한 번 올랐다 왔던 까닭으로, 얼굴이 달라져, 하데스가 달아난 그를 다시 잡아내지 못하게 됐다는 얘기가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웅공자도, 윗세상 쭐끔 맛보기로, 결코, 전과 같을 수가 없게 됐을 것. 서두에 달려 있는 주석을 커닝cunning하건데, 이 이야기는, 웅공자의, 그림자 벗기 얘기다, 수피獸皮 벗기 얘기다. (라고, 함부로 얘기하다가 '혼나지 않을까?')


5) 세 바드도에 처한 세 유형의 몸의 시작은 말씀 바르도이다. 그곳에서는 신에게 부재하는 귀로부터 하여, 신에게는 육신이 없어, 신은 육성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데, 그 육성으로 말하고 싶음이, 구상의 우주로, 드러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육성으로 드러내고 싶은 그 욕망이 바로 성욕과 살욕으로 돼 있다. 신의 동물적인 욕망, 신의 창조력.) 다음이 몸 바르도이고, 그곳에서는 악테옹 콤플렉스가 말해진다. 악테옹 콤플렉스란, (바르도에서) 업의 바람에 불려, 쫓기기이다. 사냥 당하는 자가 되어 자기 자신(은 사냥꾼+사냥개)에게 사냥 당하기. 여기에 쫓겨, 유정은, 아무 '자궁'이라도, 그것이 '자궁'이어서 바람으로부터 숨을 수만 있다면, 숨기를 바라, 뛰어드는 것일 것, 고로 환생이다. 마음 바르도에서는 육신이라는 집의 현주소(는 죽음)와 그것의 구성 요소(는 사고팔난 등)를 읊고 난 뒤, 그곳을 지키는 것이 '욕망이라는 익명을 가진 입이 붉은 시꺼먼 개'라고 밝히고 있다. 

바르도가 과도기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상상해 보기로는, 말씀 바르도는, 말 되어지지 않은 것의 (말로써) 드러내고 싶음을, 몸 바르도는, 벗겨진 것의 (두려움에 쫓겨) 입고 싶음을 그 현주소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마음 바르도는, 필멸할 몸과 사고四苦에 시달리는 집에 깃든 입이 붉은 시꺼먼 개로 드러나 있는데, 이 무명의 상태를, 현주소로 하고 있는 듯도 싶다. 이것도 물론 '추측과 억측'이다.


6) 산해기의 첫 발은 짜라투스트라의 하산으로 시작한다. -(모든 왕자들의) 모험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노인네가, 제법 의미심장한 말로, 종장終章을 예고하고 있는 듯.


그가 (늙은이를 제외하고) 처음 만난 것은 공룡이다. 공룡은 고고학적인 존재(그러니까 남성적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것들)이면서, 하나의 의지(官)을 가진 에켄드리야(민중, 대중, 군중)이기도 하다.2 전자는 '죽었다'고 선언되고, 후자는 '태어났다'고 선언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용은 숭배될 것이 아니라 퇴치돼얄 것'이라면서, 그것의 퇴치길에 오르는데,


세 갈래진 길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하나는 중도中道로, 그가 걸어온 길과 같은 방향으로 뻗은 길이며, 다른 하나는 '죽고 싶은 자'가 가는 길, 또 다른 하나는 '젊어지고 싶은 자'가 가는 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죽고 싶지 않으므로, 또 젊어지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가던 길을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는, (아마도 젊어지고 싶은 자가 가는 길이라는 곳을 향해) 길을 올랐다. 그 길에서 그는 제당에 가 닿았는데, 제당에는 흰 암캐의 상반신에 날개 없는 학녀의 하반신을 해 갖고 있는 계집(세이레네스)이, 무녀로, 제사 자체로, 춤을 추며, '거북이 대가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왕왕 개(뱀)와 새는 그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뉘어져 인간을 나타내거니와 땅에 붙은 것과 땅에서 떨어지고 싶어 하는 이질적인 성질을 드러낸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계집이 지닌 부정적인 국면이 드러난다. 판켄드리야라면 새의 상반신과 무거운 개의 하반신을 갖춰 찢고 있을 테지만, 이 계집은 반대로 개의 상반신에 날개도 없어 아무짝에 쓸모 없는 새의 하반신을 갖추고 있다. 땅에 붙은 존재이다. 그래서 그것은 수컷들을 희생양으로 요구한다. 불알을 까먹는다.

- 여기에서 짜라투스트라는, 희생되는 수컷에 대해, 그 이름을 오이디푸스라고 이르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바뀌던 그 과도기에 처했던 자식들의 비극의 한 전형"이라고 말해 놓는 것을 보면, 이 오이디푸스는, 고고학적 존재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듯? 앞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남성우월주의를 숭배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것은 고고학적, 이라고 이름 붙여질 만 하고, 여기에서는, 흔들리는 남성우월주의에 당해 겪게 되는 비극으로 해서, 오이디푸스가, 다시 불려나오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 그리고 어쨌거나(?) 이 부정적인 제사의 이름은 흥행이라고 한다. 이것은 '집단적 무아의 강'이라고 이를 만한 것으로, (에켄드리야가 스스로 분만해 낸, 그 자신의 딸) 드빈드리야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젊어지기는커녕 더 늙어진 채로, 돌아나오다, 덜컥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길 위에서 길을 잃었다. 그가 왔던 방향으로 놓여 있다던 그 길, 중도는, 치우친 적이 없었던 자가 걸었던 길이었고, 회춘의 고장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그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이정표에는 '죽고 싶음' 밖에 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 회춘의 길은 색色을 대변하고 있고 (그래서 그곳에서는 윤회가 계속되고 있다), 죽고 싶음의 길은 공空을 대변하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그것 사이에 놓여진 중도를 걷다가, 덜컥, 회춘의 길로 들어서, 그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는데. 그래서 그는 그렇게 중도3를 잃으며, 정도正道라는 새 길을 찾았다고 이른다. 그가 찾은 정도란,

색계에 진육 입어 태임받은 유정들의 '공득'에는 '중도'가 아니라 '정도'가 있는 것이며, 그런 과정이, '육도' '삼세'라는, 현상계로 현현해 있는 것이라는, 그 법을 설하려 하는 바이다. '육도'란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인간도, 아수라도, 제파도'로써, 우주의 횡대를 이루며, '삼세'란, '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 마음의 우주'로써, 종축을 이루는, 그것을 가리키는데, 나 짜라투스트라의 믿음에는, 저 '육도' 중 아래쪽 '삼(악)도'는 '몸의 우주'의 영지며, (몸이 지옥이며, 아귀도며, 축생도 자체가 아니더냐?) 그 위쪽의 삼도는 '말씀의 우주'의 영역일 것이라고 하고 있다. (말씀의 성육신이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물론 ,먼저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지만, 아수라와 신들은, 언어와 꼭 같이, 그 형태는 보이지 않음에도, 언어가 갖는, 초력성을 모두 갖고 있음도,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저것이 통틀어 '색계'인데, '마음의 우주'는, 그 저쪽(피안)에 있다고 일러지는 이상, 그쪽에는 건너 뛰어보지 않고서는, 어떻게도 말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유정은 그러니까 '에켄드리야'로부터 '드빈드리야' → '트린드리야' → '카투린드리야' → 판켄드리야→라는 순서로, 진화의 정도를 밟는데, 그 진화가, 횡/종으로 충실히 이뤄질 때만, '공계'를 성취할 역동적 날개를 돋아내는 것 (161~162)

이라고 한다. 몸의 우주에 속한 것에게는 몸만큼 실다운 것이 없으며, 마음의 우주에 속한 것에겐느 공만큼 실다운 것이 없다고 하니, 어느 우주 한 군데에서든, 실답지 않은 것이, 발들일 틈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정도의 일갈일 것이다.


그는 '죽고 싶음'의 길로, 들어섰다. (고 하면서, 이승에 놓인 길치고, 이 길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말도 덧붙여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욥 또래의 영감을 만난다. 그는 말세를 기다리던 선지자였다고 했다. 하지만 말세는 오지 않았고, 왔던 사람들마저 가고는 다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짜라투스트라에게 이 영감은 '세상을 부정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그 부정성 속에서 자기들의 발목만을 쏙 잡아빼려는, 다른 유정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겨자씨만큼도 없어, 독사와 전갈과 황충과 같은 자'라고 보여진다. 그러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자기에게 보이는 재림이란, 거짓 선지자가 말하는 말세적인 재림이 아니라, "고전적 복음의 재정리, 재해석"4이라고 이른다.


다음 짜라투스트라가 만난 것은 에켄드리야의 새끼, 뚤파이다. 뚤파는 대중이라는 집단이 꾸어내는 한 꿈으로, 그 얼굴을 괄호로 하고 있다.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그것은 집단의 욕망이라는 소명으로부터 허구로서 태어난다. 네피림이라는 거인들. - 이것들은 어쩌면 소설법에서 이른 '신전적新典的'인 것들과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영상매체들에서 태어나는 것들?- 그리고 나서 그가 또 만난 것은 에켄드리야의 새끼, 좀비이다. 좀비와 뚤파는 모두 '머리가 없는 것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뚤파가 허구에 봉사하는 것이라면 좀비는 몸에 봉사하는 것이다. : 집단적인 허구에의 열광과 집단적인 스포츠에의 열광, 뚤파와 좀비? 


그러고도 만나진 것은 백설공주이다. 인구 감소가 바라지는 시기에는 일부다처보다도 일처다부가 바랄 만하고, 그것의 동화적 제휴가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라며, 그 동화에 숨겨진 신화적인 의미를 풀어헤쳐 보인다. 여전히 시선은 집단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중이다. 집단의 몸불리기가 걱정된다는 것.


그렇게 짜라투스트라의 여정은 끝이 난다. 바다로 더 가 볼 일 없이, 산 동네만 떠돌기로, 그는 바다 동네 탐험도 끝을 낸 것이다. 탐험의 끝에서 '신은 죽었다'는 풍문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진다.


: 4월에 읽었던 것을, 4월에 조금 끼적거렸다가, '음담패설' 이후로, 6월에서나 다시 끼적거려둔다. 6월에 끼적거린 끼적거림은 그리고 '읽은 후'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대강의 기억과, 대강의 발췌독을 통해 이뤄진 것이므로, '읽는 도중'에 당해 끼적거려둔 것보다, 훨씬 더 신뢰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 끼적거림 앞부붙에 붙여 둔 '주의'는 '주의'가 많이 필요하다.



  1.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뭣도 몰라, 이런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나는 이 말에 책임질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이 말을 되물릴 수도 없고 있다. [본문으로]
  2. 주석(136)에서, 분명, 짜라투스트라가 두 종류의 공룡을 보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하니, 에켄드리야를 제외한 하나가, 무엇인지, 어떻게든 궁리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해서, 아무렇게나인 듯, 대답을 적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답은 반응이라고 해야 할 것이지 정답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본문으로]
  3. 중도란, 색과 공 사이에 놓여 있는 난제에 대한, 한 대답이었다고 한다. 일단 난제란, 색계가 어떤 목적으로 일어났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고 하고,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곤란하게 주어져 있던 것이 1) 색계가 일어난 목적을 묻자니 색계에 실다움을 부여하게 되고, 2)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공계에 실다움을 부여하자 색계가 (무화無化하기로) 색계 아닌 것이 되며, 3) 그래서 색계가 실다운 것이 아니라고 해버리자, 덩달아 공계도 실다운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더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시선의 전환이 중도인데, 중도는 "깨닫지 못했으면 색과 공이라는 두 진리의 동등함을 인정하되, 양립할 수 없는 두 다른 끝을 접붙이려거나, 병합하려는 노력을, 하려 하지도 말고, 하지 않으려고도 말며, 대신 그 가운데 길을 취하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이 부분은 체 게 융의 생각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이 보인다. 재림=재해석이라는 부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고전적 복음이 '이후의 우주'에 합당하도록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점이 그러하다는 것. 융은 그것이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바래 버리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여기에다가 융을 갖다 붙이고 있는 것. 그런데, 이렇게 말하다, 혼 나지 않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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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법
박상륭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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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내편'과 '외편', '잡편'으로 되어 있는 구성에 대해 의문을 느꼈었는데, (특히 그것이 장자와 마찬가지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니 더욱더 그랬었다), 작품 말미에 달려 있는 김윤식 교수의 해설에서, 그것이 해소됐다. 내편에서는 자신의 핵심적인 사상을 전하고, 외편은 그것에 대한 주석이며, 잡편은 다시 거기에 대한 더 친절한 주석이라고. 개인적으로 내편의 세 편 중에서, 가장 살 떨리게 읽었던 것이, 역증가, 그러니까 아담과 카인의 대화였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말씀의 우주가 개벽했다'는 문장을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역증가逆增加에서였다.

객관적으로야 그것이 박상륭의 진화론이 (아직 잡설품을 보지 않았으니, 이런 말은 참아두어야겠지만, 적어도 잡설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여정에서 말해두자면) 찍은 어떤 정점으로까지 보이기 때문이고, 주관적으로야 카인과 아벨에 대한 주제(특히 창세기 3장)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전자야 더 말할 것이 없고, 후자로 인해 연정을 토해 놓자면 (이건 어쩌면 실로 구역질 날 만한 것인지도 모르니까) 내가 지금껏 만난 카인 중, 단연, 비교 불가능하도록, 스스로를 구원해놓고 있는, 카인이었다는 점이다. (카인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작가의 족보가 어딘가에 있기는 있다. 그것들 찾아보기도 한 재미는 한 재미일 듯. 그러나 아담 앞에 와 앉은 이 놈 카인 때문에, 그 재미가 다 증발해버렸다면, 이건 연정 고백의 연장선일까, 연정 고백의 뒷담화일까?)


내편內篇

무소유無所有는, 뒤에 달린 주석에도 나와 있듯이, '소유한 것이 없다'의 의미가 아니라, (not being born is said to mean not having any abode) '존재하지 않는다 not exiting'의 의미라고 한다. 하여 훌쩍 뛰어넘어 떠들어본다면, 무소의 무소는 (역시 뒤에 달린 주석에도 나와 있듯이) 시간에 있어 시중(時中, 자정, 미래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다시 과거가 되며 과거가 다시 -모래시계적 상상력에 의해- 미래로 변모하는, 그래서 미래도, 현재도, 과거도 아닌, 시간이 아닌 시간, 그 일점)에 해당할, 공간에 대한 명칭(所中)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시중이 시간의 태胎인 것처럼, 무소도 공간의 태이다. not being born is said to mean not having any 'abode'에 있어, abode에 해당할 것이, 그래서, 공간의 태, 무소일 것도 같다.

어부왕(은 현재 시중에 들어 있다고, 주석에 일러 두었음을 들어, 그)를 위해, 불사조를 찾으러 떠났던 시동이, 처한 곳이, 바로 그 무소이고, 그가 그 무소에서, 연금해 낸 것이 바로, 현자의 돌에 비견될, 뼈로 만들어진 만다라, 그것일 것도 같다. 그렇거나 어쨌거나, 어부왕을 위해 떠났던 시동이는, 실로 떠났었는지 어쨌었는지 모르겠지만, 돌아오지는 못하고, 하나의 이정표 (모든길은그러나시작에물려있음을, 걸음을 멈추면, 길은 생겨나지 않는다)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지. 시동은 시동으로서 좋은 돌을 하나 연금해 낸 것 같은데도, 어쩐지 그것을 따라가는 (이) 눈은, 거기까지 다다르지를 못한다.

(주석에 따라) 파르치발이 몸의 우주(카투린드리야)에서 시작해 말씀의 우주(판켄드리야)의 조금 더 된 곳까지 나아간 인물이라고 상정할 때, 그러면 우리의 시동이는, 말씀의 우주에서 시작해 마음의 우주로 나아가는, 그래서 파르치발과 비슷하되 비슷하지만은 않은, 그런 인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도달하는 어떤 이정표도 마음의 우주스러운 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소설법小說法

기起 운명의 기호 1, 잠자는 공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공주의 원형이 되는 얘기다. 패관이 그 얘기를 데리고 온 것은, 그녜가 자면서 낳았다는, 그 자식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인 듯도 싶은데, 공주의 잠이, 말의 바르도와 같이 보여서인 것도 같으다. 말의 바르도에서 태어난 자식은, 그 이름이 판타지라고 이른다. 판타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고전적古典的인 판타지(로서, 사람의 마음의 풍경을 그리고 있거나, 자연에 모태를 두고 일어난 신들이나 요정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전적新典的인 판타지(는 인공적인 것으로, 지옥적인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일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그런 것)이다. 패관은 후자에 대해서 매우 염려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판켄드리야가 그 자신의 우주(란 말씀의 우주)를 개벽하고 그 개발의 끝에서 쥐게 된 것이 사고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최선의 결과물은 사고의 결과,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패관이 말하고 있는 상상력은 미적인 감각으로서 판켄드리야의 전단계인 카투린드리야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미적 감각의 발달된 결과물로서의) 예술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사고력은 인간을 (고통스러울지언정)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발달을 바랄 만한 것이되,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패관에게는 (철학보다도) 한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 여기, 신전적 판타지라고, 해서, 문제를 삼고 있는 상상력은, 말의 바르도에 내려, 말을 어거해(조작화해) 내는 사고력(은 능동태)과 달리, 바르도 풍경에 어거되어 좀비(는 수동태)로서 기능하고 있는, 그런 것을 이르고 있는 듯하다.

신전적 판타지에 기반한 신인류를, 패관은 '네모사피엔스(Neo+Homo+Sapiens,Nemo Sapiens)'라고 이르고 있는데, 자아라는 고통스러운 씨앗으로 위쪽으로 오르려는 호모 사피엔스와 달리, 그것들은, TV를 비롯한 화려하고도 기백 넘치는 신전적 판타지 (영상)에 홀려, 카투린드리야에서 판켄드리야로 어기차게 올라오며 개척해 냈던, 자아 인식이라는, 유익한 수단을, 잊고, 지워버린다. 패관이 염려스러워하는 지점이, 아마도 이 지점인 듯 싶다. (패관이 고수해 온 진화론에 따르면) 커다란 위기가 닥친 것이다. 위로, 위로 향하던 그 (진화의) 방향이, 신전적 판타지로 인해, 아래로, 휘딱, 휘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만약 네모사피엔스가, 눈앞에 보이는 환영을 바탕으로, 이 세상이 그것과도 같이 알맹이 없는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호모사피엔스보다, 보다 진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승承 운명의 기호 2, 개구리 왕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개구리에 대한 얘기다. 공주와 뽀뽀해서, 인간이 됐다는, 그 개구리. 구렁이 왕자 얘기와도 같은 맥락의 얘기인데, 공주라는, 여성성에 의해, 수피獸皮를 벗기운, 얘기이기도 하다. 패관은 이런 류의 얘기를 맷돌 음사라고 이르고 있는데, 여성 상위의 얘기라는 뜻이다. 여성이 발휘하는 수용성으로 인해(어머니다움) 남성인 개구리가 짐승의 탈을 벗기움당하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르고 있는 듯하다.

전轉 운명의 기호 3, 금당나귀는, 루시우스라는 놈이, 팜필레라는 마녀가 연고를 발라 주문 외운 뒤 부엉이로 둔갑하는 것을 보고, 저도 (독수라기 되고 싶었던 까닭에) 몸에 연고를 발라 (주문은 모르니까) 몸을 비틀어대던 후에, 당나귀로 전신轉身했는데, 어이쿠야, 이놈 하초가, (루시우스일 때의 자기와 달리) 무척이나 실해, 그중 위로를 삼았다는 얘기다. 그냥 읽어도 인간인 것이 짐승으로 전락한 (그래서 불거진 생식력에 뿌듯했을) 것에 대한 얘기라는 것은 알겠다. 패관은 루시우스가 선남자들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비상에 대한 꿈을 꾸면서도, 왕성한 생식력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패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여기에 드러나진, 당나귀라는 기호(루타)와 인간이라는 기의(아르타), 그러니까 루타와 아르타의 어긋남이다. 바르드에서 업력에 쫓겨(악테온) 눈에 보이는 '불 밝힌 혈'(은 암수 흘레붙기, 몸 가져 태어나기)에 뛰어들기(는, 그러니까 윤회)가 패관의 눈에는, 루타와 아르타의 어긋남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結 운명의 기호 4아킬레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아킬레스에 대한 얘기다. 뒤꿈치가 약점인 그 아킬레스. 앞서 패관은 여러 번, 인간의 수피가 뒤꿈치에 있다고 말해왔다. 그래서 이 지점에 이르러 읽게 되는 아킬레스에 대한 얘기는, 앞으로 하게 될 이야기를, 눈앞에 훤히 그려보여준다. 수피 벗기, 뒤꿈치 파내기, 스스로 고자되기. 이제 판켄드리야는 쉐쉬빈드리야(육관 유정)가 되기 위해서, 무거운 뒤꿈치를 벗어버리고, 날개를 돋와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야 은혜롭지만. 이제 갓 사고력에 눈뜨고 있는 것 같은 자에게, (마음의 우주를 개벽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그) 추상적 사고는, 여전히, 초식 동물 앞에 차려진, 육미肉味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小說法을 통해서, 추상적 사고력이라는, 마음의 우주라는, 그것의 이물스러움이 조금은 옅어졌다는 점에서, 말씀이, 은혜로웠다고, 말해 놓을 수는 있다. 


역증가逆增加에서 보이는 것은 창세기(와 욥기)이다. 창조된 에덴에 우뚝 선 생명 나무를 놓고 뱀이 그 혀를 날름거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욥기가 껴드는 자리는 여기이다. 욥을 두고, 여호와가 사탄이 벌이는 한 판의 노름) 우주적인 유혹이 시작되는 셈이다. 말씀되어진 대로 그들은 열매를 먹었고 지혜를 얻어, 그들 태어났던 에덴이, 가시덤불에 다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주적 비극이 시작되는 셈이다. 그러고도 그 비극은 끝이 아니다. 최초의 살해가 시작된다. (창세기 3장) 카인이 아벨을 쳐 죽이고, (카인은 저주를 받아 떠돈 후) 아홉 세기가 훌쩍 지나, 부자父子는 상봉한다. (어미는 바리데기가 되어 피살레물, 기살레꽃 구하려, 에덴으로 가, 이 자리는 부재중.) 울며 정을 나눈 후, 그들은 한 법석法席을 펴고 앉는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제기될 의문을 아담이 하고 있고, 열세를 하고 온 것으로 설정돼 있는 카인이, 거기에서 답변되지 못할, 이야기를 꺼내든다. (이 이야기는 그리고 작가가 써내려가는 한 벌의 창세기-는 세상을 열어젖히기이기도 하고, 인간을 열어젖히기이기도 하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진화론이 상세하고도 친절하게 여기 펴늘어져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 두통을 일으킨 '사람의 영상(은 신)'과 '짐승의 형상(은 사탄)'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카인이, 예수에 대한 유다의 역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유다가 말씀의 우주에 대한 문열이 노릇을 했다면, 카인은, 여기 이 자리에서, 마음의 우주의 문열이 노릇을 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신이 창조하지 않은 마음을, 다른 고장에서의 배움을 통해, 열어보이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외편外篇

잡상雜想 둘에는 목련과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차별하여) 유토피아에 대한 얘기만 조금 게워 놓자면, 유토피아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전쟁과 살상일 게다. 전쟁과 살상은 역易의 균형 잡기와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나쁜' 국면만을 갖는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주제 아래에서 왕왕 예로 들어지는 것이, 한 들판에 있는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에 관한 것인데, 초식 동물의 피흘림 없이는, 들판의 황폐화를 막을 수도 없고, 육식 동물의 굶주림도 면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것들의 피흘림은 그래서 들의 (잠깐 동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고통스러운 일이 되지 않으랴. 인세人世 역시 (몸을 지녔음으로 해서) 그와 같은 역의 자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멈출 수 있는, 역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으니, (말씀의 우주 얼마 정도까지에는 손길이 미친다는 얘기에 따라 함부로 추측하건데,) 말씀의 우주 위편 어디(는, 아마도 문화?)에서부터, 마음의 우주까지의 영역이다. 거기에 다다르는 사다리로서 제시되는 것은, 물론, 우주적 고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자기의 부정이다. 욕망으로부터의 해방. : 그러니 여기 어디에 지상적/일반적인 의미하고는 다른 (그래서 어쩌면 상태라고 일러야 할 것일지도 모르는), 또 다른 유토피아의 선언이 있는 것도 같다.

만상漫想 둘에서는 손과 갈매기/까마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자에 대한 호서식 지혜란 손=남근=눈=창조력=말씀이겠고, 호동식 지혜란 구지의 손가락 때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하여 공空이라고. 갈매기와 까마귀에 대해서 (마음대로) 훌쩍 뛰어넘어보자면, 그것들은 인지의 개발에 시차를 두고 있는 생물들로 보인다 한다. 갈매기는 홍합을 붙들고 반나절을 씨름해야 짭쪼롬한 맛을 본다면, 까마귀는 그것을 들고 아스팔트나 바위에 내던져 홀랑홀랑 (껍질) 벳겨 먹는다는 말씀. 이 인지의 개발차는, 패관으로 하여금, 몸의 우주에 속한 밭을 일구는 농부와 마음의 우주에 속한 밭을 일구는 농부 사이에 놓여 있는 개발차로, 쓸쓸하게 눈돌리게 한다.

위상爲想 둘에서는 '유위有爲/무위無爲'와 '수위受爲/수위授爲'가 논해지는데. 일단 '유위/무위'에서는 중원의 유위/무위에 대해 천축의 상스크리타/아상스크리타를 대비시켜, 것들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전자들이야 냅두고서라도, 후자들을 들여다보면, 무위와 아상스크리타는 비슷하면서도 사뭇 달라 대극적이지 않나 하고, (패관은) 말하고 있다. 아상스크리타가 고도의 문화화를 성취하고 있는 반면에 무위는 자연으로 퇴조전이를 치르고 있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하여 이어지는 것은, 어째 무위가 자연으로의 퇴조전이인가, 하는 점이겠다. (살짝 끼어든 것은, 무위를 날것으로, 아상스크리타를 익힌것으로 말하느라고 그랬을 테지만, 레비 스트로스의 '날것과 익힌것' 사이에, 패관은 반쯤 익은 것을 끼워 넣는다. 이 반쯤 익은 것이, (무위의) 도道와 (아상스크리타의) 불佛 사이에서 -달마를 통해 분만된- 선禪이라고 한단다.) 패관은 진화론자이고, 그 진화론은 몸-말씀-마음을 축으로 삼고 있다. 몸이 속한 곳이 자연이고, 축생도이며, 그곳은 인간이 자아라는 문화의 씨앗을 통해, 막 벗어난, 그곳이다. 하여 인간을 배부르고 등따숴 머릿속이 텅 빈 축생으로 돌려 놓기로, 그 치세의 도를 삼은 무위라는 것이, 패관께는, 퇴조전이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수위/수위'에는 유마힐과 그를 문병한 문수사리 사이에 주거니받거니 한 말의 타래가 담겨 있다. 패관의 세계관이 선문의 그것과 어느 정도 빗겨 있는가를 눈치껏 살펴볼 수 있다.

오상誤想 둘에서는 '꽃을 든 남자(를 웃지 않고 읽어낼 수 있는 심정이 얼마나 부러운지! 빌어먹을 '샴푸 브랜드' 때문에, 가섭이가 나올 때마다, 가섭이마냥 파안대소하게 된다, 젠장, 꽃을 꺾어버릴!)'와 '칼을 든 여자'의 얘기가 담겨 있다. 전자의 길고 긴 (선문) 미로를 확 밝혀주는 것은 패관이 마지막에 들어주는 고금소총판 '內病在吾내병재오'라는 얘기가 아닐까 한다, '홀연영오'. 그래서 이제는 가섭이가 나설 때마다, (빌어먹을 파안대소와 함께) 홀연영오하게 만들어준, '손바닥'이 떠오를 듯하다. 칼을 든 여자는 임제록에 담겨 있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등등 '죽이기' 시리즈에 대한 패관의 해석이다. 죽이기 시리즈에서 문제가 머리를 쳐드는 지점은 '주와 객'이다. 언제나 나가떨어지는 것은 객이라는 것. 여기에 대해 패관이 꺼내놓은 얘기가 며칠을 '꿍꿍 밭(心田)'에서 굴렀다. 배껴놓으면 이렇다.

'주객'에의 인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법행, 그러니까 어느 상태에 이르른 한 수도자가, 주객의 차이를 잃어, 자기를 죽인다고 내닫는 짓이, 결과적으론 객을 해치고 덤빈 것과 같은 그런 살생, -말하는 구도적 살인과, '주객'에의 강한 인식을 저변한 법행, 예를 들면 봉조살조 같은 것은, 절대로 같은 것들이 아니다. (p319)


잡편雜篇

깃털이 성긴 늙은 백조白鳥/깃털이 성긴 어린 백조白鳥는 경계를 넘어 글쓰기에 실렸던 것이고, A RETURN TO THE HUMANET은 원광대에서 열렸던 세미나에서 발표됐던 내용이다.



말미에 붙어 있는 김윤식 교수의 극도 재미 있었다. 역증가가 상영되는 극장 앞에서 흥분하고 앉았던 것은, 그렇게,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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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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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라투스트라의 두 번째 몰락은 그의 두 번째(이전에 했던 첫 번째 하산의 이야기가 <산해기>이고, 이 이야기는 그 훨씬 후에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감행하게 된 늙은) 하산을 일러 하는 말 같은데, 그리고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원전(이란 니체의 글?)을 두고서도 하는 말 같은데, 후자에 대해서 까막눈이라, 어떤 맥락의 몰락인지가 얼른 잡히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모종의 배신 같은 걸로도 보이는데, 차라투스트라가 젊어서 설파했던 초인적인 삶, 권력에의 의지로 영겁회귀하는 그 삶을 기반하고 있던 대지 쪽에서, 세월이라는 샛서방을 맞아, 그 얼굴을 달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차라투스트라는 늙은 것이다. 그를 먹여 살리던 도반(이라고 해야 수독수리와 암뱀)도 죽어버린 것이다.

패관이라고 해야 할 (얼굴 드러내지 않고 자꾸 개입해쌌는, 어떤 노인네의) 목소리는, 그가 신을 죽임으로 해서, 인간을 죽이게 됐다고, 인간인 것들을 축생에로까지 끄잡아 내렸다고 말하며, 신의 부음을 전하던 초인은, 그래서 이제 인간의 부음을 전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어쨌거나 차라투스트라는, 자기의 도반들을 불살라, 제단에 바친 뒤, 두 번째 몰락으로서의 하산을 감항핸다.


2. 차라투스트라에 답한다,는 그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말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하산하려는 길에, 자신이 숭배했던 그 빛나는 별(이란 태양으)로부터, (첫 번째 하산과 그 하산을 마치고 들어오던 두 번째 입산에서 만난 바 있었던 예의 그) 늙은네가, 그를 새빠지게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를 좀 만나고 가라고 일러주었기에, 그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하산과 두 번째 입산에서 고스랑거리던 그 늙은네는, 한쪽으로는 아랫녘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한쪽으로는 산정에 잠긴 차라투스트라에게도 눈을 두어, 둘 사이의 이야기를 버무려 놓은 채, 오랜 세월, 그를 기다려온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실로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그가 거기까지 이르도록 꾸려낸 사유의 정수이기도 하다. 이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작가의 이전 전작들을, 모두 압축하게나 되는 것이 아닌가, 모르기는 모르겠다. 그래서 그 일은 좀, 제법 덩치가 있는 일로도 보여, '시간의 악테온'에 쫓기는 자로서, 시도해 볼 일은, (지금은) 아닌 듯 하다.

하여, 염두에 뒀으면 했던 구절 두엇, 기약으로, 씨앗으로 남겨두고, 늙은네의 귀중한 대답은, 일단 넘어가련다.


마음의 우주의 '마음'이라는 마직보를, 몸이나 말씀의 우주에 덮어씌우려기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이외다. 몸이 법종法種인 것을! 그것이 싹틔워 꽃 피우면, 그것이 '말씀'인 것을! 그것이 '마음'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임을! 그리하여 마음은, 익은 민들레 대가리에서, 무장애의 바람에 불리어가는 것임을! 알맹이가 없는 것은 '마음'이기 때문인 것! 그러므로 그것은 구속되지 않으며, 장애에 부딪히지 않고, 그러므로 그것은 우주 자체일 수도, 그것까지도 벗어나버릴 수도 있는 것인 것을! 그것에 의해서만 유정은, 진화의 자리에 확고히 심겨드는 것을! 바로 이 '실다움'을 통해서만, 유정은 역설적이게도 알맹이 없는 '마음'에 닿는 것을! '몸'이야말로, 신들과 악마들이 맞서 싸우는 성스러운 전장戰場 쿠룩쉐트라 Kuruksetra, Skt인 것을! p132


한 인신은, 이 우주를 주관하는 대신이,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좋은 모태를 빌려, 자기를 가현케 한 이라면, 다른 인신은, 흔한 가시떨기나무와 같이, 비천한 모태에서 먼저 출산한 뒤, 다음 '집단적, 우주적 원망'이라는 모태에 들었다가, 재출산한 '사람의 자식'이라는 것이외다. 후자의 이 이중 출산은, 처음엔 하나의 개아로서 태어났다가, 두 번째 출산을 통해 그것을 잃고, 중아衆我, 또는 공면성共面性 내지는 대아성大我性을 획득했다고 여겨지는 것이외다. p158


3.초인의 죽음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젊은 날에 대한 회한과 늙은 성자가 뿌리고 간 말의 씨앗을 가지고 명상에 든다. 그는 그 가운데 자기를 향해 독두를 들고 오는 양두사의 영상을 본다. 이 때 패관이 등장, 붉은 물고기라고 하며 비슈누-멧돼지의 이야기와 검은 물고기라고 하며 곤과 붕의 이야기와 쾅!하며, 비슈누의 배꼽에서 피어오른 연이, 그 연잎을 벌릴 때의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면, 영겁회귀라고 하며 차라투스트라의 명상 속에서 떠오른, 한 몸뚱이에 검은 대가리와 흰 대가리를 단 뱀이, (차라투스트라의 편견에 따라, 흰 것을 삼킨 검은 것을) 밟아 죽임당하는 이야기(인즉, 실패한 연금술 이야기)와 권력에의 의지라고 하며, 다시 차라투스트라의 명상에 나타난, 한 몸뚱이에 두 대가리를 달고 있는 새가, (뱀과 마찬가지로, 불화하기로, 하나가 하나를 죽일 지경에 이르러, 차라투스트라의 뒤꿈치에) 장렬히 희생당하는 이야기(인즉, 마찬가지의 실패한 연금술 이야기)가 이어진다. 초인과 대지에 이르러서야 차라투스트라는,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르겠지만, 송장을 딛고 선 열여섯 살 처자의 상을 보게 된다. 출산, 혹은 몰락에 다다르면 무명씨로서의 한 촌로의 탄생 혹은 차라투스트라의 (스스로에 대한 배신으로 안한) 몰락의 소식이 전해진다. (이쯤되면 차라투스트라는 2장에서 나왔던 늙은 성인네 한 사미가 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4. 문요어 얘기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하산하기로 했던 차라투스트라의 원래 목적(?, 그런 게 있었다면?)을 기억해 내도 좋을 것 같다. 다시 맗 그는 마침내 사람들이 사는 인가로 내려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이미 한 이름을 잃었고, 특히 그 자신, 차라투스트라다움을 잃은 한 산로인데,) 그곳에서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의 정죄로서, 그러나 사실로는 마을에 가득 찬 음기에 대한 정화로서, 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그러나 아무것도 남김이 없는 죽음이다. 신에 대한 반역자로서, 그의 부음을 전하던 자는, 신과 인간이 반역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어느 정도, 인간 이상인 죽음(이란 어쩌면 신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신의 죽음은 아니지만, 한 개아로서의 죽음 이상인, 그런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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