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하면 유관순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권비영저자는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씨가 쓴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라는 책에서 생소한 이름 하란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조선의 독립운동가 하란사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하란사라는 이름은 처음 접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어떤 일들을 했는지 궁금하다.
하란사는 1872년 평양의 전주 김씨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1893년 아버지의 사업을 위해서 나이도 많고 사별한 전가처 낳은 자녀가 4명이나 있는 인천항 감리서 고위관리 하상기와 결혼을 했다. 하상기는 어린 하란사를 위해서 해줄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뒷바리지했다. 여성들도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남편 덕분에 이화학당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었다. 선교사가 낸시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한문으로 바꿔서 란사로 하고,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때문에 김씨 성을 버리고 남편의 하씨 성을 따르며 하란사가 된다. 하란사는 불우한 처지의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고 열심히 공부했다. 일본 유학 1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에 있는 감리교 계통의 웨슬리언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나라 최초로 미국 문학사 학위를 받은 여성이다. 귀국 후 영어 학교 교사가 되어 목표로 했던 불우한 환경에서 허덕이는 기혼 여성들을 위해서 헌신했다. 나라의 장래와 여성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대한독립을 위한 자금을 모으며, 나라를 위한 일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만난 의친왕과 그 일을 함께 한다. 하란사는 그를 애정하는 마음이 컸지만 그림자 역할을 자처하며 묵묵히 그와 함께 동역한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참석을 위해 베이징으로 향하게 된다. 하란사와 의친왕은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만주 안동역에 도착했으나 의친왕은 일경에게 잡혀 국내로 송환되었다. 함께 동행한 하란사, 병수, 이보게는 어떻게 되었을까? 책에서 의친왕을 대신해 하란사와 동행한 이보게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어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