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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영국인, 베델 ㅣ 다문화 인물시리즈 9
한유섭 지음, 허새롬 그림 / 작가와비평 / 2020년 8월
평점 :
배설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은 양기탁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을사늑약(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등 항일 활동을 벌인 영국인으로 알려져있다. 사후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영국인으로서 일본에서 무역 회사를 하던 분이 우리 나라에서 신문사를 운영했을까? 영국의 언론사인 <데일리 크로니클>은 러일 전쟁후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할 특별 통신원을 찾고 있었고, 일본어에 능통하고 사업과 함께 글 쓰는 재능을 가지고 있던 베델 선생이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한국으로 파견시켰다.
베델 선생은 양기탁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서 일본의 한국 침략전쟁과 이에 맞선 한국인의 저항을 전 세계에 알려서 일본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 국제여론을 불리하게 만들고, 일본의 침략정책을 국내의 백성들에게 알려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항일 민족운동이 크게 일어나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 당시는 경제와 군사력이 강한 서양의 국가들이 아시아와 아프라카의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던 시대였고, 경제와 과학이 앞섰던 일본이 우리 나라를 통제하려 했던 시기였다. 언론이나 신문사에 일본의 감시와 통제가 심했지만 영일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베델 선생은 영국인이라는 신분을 앞세워 용기있게 그 일들을 해냈다.
일본은 끊임없이 베델선생을 공격하려 했는데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게 된 원인이 <대한매일신보>의 선동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재판에 세웠다. 재판 결과 3주일간의 금고형과 6개월간 근신을 판결받았다. 당시 한국에는 영국인을 수용할 감옥이 없어 중국의 상하이까지 가서 그곳의 형무소에서 3주 동안 형을 치렀다.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사망하기까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이렇게 경제 대국이 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각오한 희생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자신의 나라가 아님에도 정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베델 선생을 이제서야 알게 되어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든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는 시간이 오면 아이와 함께 감사와 죄송한 마음을 가득담아 서울신문사와 양화진에 다녀와야겠다. 그분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을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를 사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다음 세대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모습의 나라를 물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