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함께한 선교사, 언더우드 다문화 인물시리즈 8
길진봉 지음 / 작가와비평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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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님'은 개신교인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왔을 이름이다. 청년 시절에 같은 교회를 다녔던 동생은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책을 읽고 어려서부터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하고 준비해서 중국에서 오랜 시간 선교를 했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1859년 7월에 영국 런던에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 '존 언더우드'와 따뜻하고 자애로운 심성의 소유자인 어머니 '앨리자베스 그랜트 마리'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언더우드 6살 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사업이 사기를 당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언더우드 선교사의 나이 13살 때 아버지는 새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고 미국의 뉴더럼으로 떠난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모르는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대학, 신학교, 의학공부의 과정을 거치며 착실하게 선교사로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오신 선교사님의 설교를 듣고 꿈을 키웠던터라 인도로 가기로 원했다. 1883년 어느 날 다른 목사님으로부터 동방의 작은 나라인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인도로 향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 땅에도 복음이 흘러가릴 원했던 선교사님은 그 땅에도 선교사가 가기를 기도했다. 기도중에 '왜 너 자신이 조선에 가려고 하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에서 조선으로 선교지를 변경하게 된다. 그 먼 거리를 일본을 통해 1885년 4월, 조선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감격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 때 함께 동행했던 분이 바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목사님이다. 조선 땅에 왔을 당시에는 개신교가 금지되어 있었던 상황이라 먼저 조선 땅에 와서 활동하던 미국인 의사 '호러스 알렌'박사의 도움으로 '광혜원(지금의 세르란스 병원)'에서 수학과 화확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년만에 한국어 대화가 가능해신 선교사님은 한영사전 편찬에도 도전했다. 그뿐 아니라 안타까운 조선의 고아들을 위해서 1886년경에는 고아원까지 만들었다. 1886년 7월경에는 호러스 알렌박사의 통역자로 일했던 노춘경이라는 한 남자에게 세례를 주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1887년경에는 목사님이 지내시던 집 안에 딸려 있던 사랑방이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작은 교회가 되었는데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였다. 1889년에 릴리어스 호튼 선교사님과 결혼해서 동반자로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와도 가깝게 지내시며 통여과 주치의를 맡기도 하셨다. 1897년에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했으며, 1903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YMCA가 창단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본관이 언더우드관이다. 신학뿐 아니라 많은 학문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발전하길 원했던 그 마음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16년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시면서 이 땅에서의 소명을 다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단순하게 종교만 알리려고 했다면 이렇게 많은 변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밑바탕에 언더우드 목사님의 따뜻한 마음과 더불어 조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한 사람의 헌신된 순종이 예수님을 몰랐던 척박한 땅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졌고, 밤이 되면 십자가 불빛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그 분의 열매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재확산의 뉴스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대할때면 마음이 무너진다. 천국에서 이 땅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과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 하실까? 지금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일은 예수님의 사랑이 헛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선하게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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