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 자유론 / 통치론 동서문화사 월드북 42
토머스 모어.존 스튜어트 밀 지음, 김현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자유론 파트는 읽은지 제법 시간이 지났고,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 않아 로크의 통치론에 대한 리뷰만 남기게 되었다.

 

  로크의 통치론의 근간은 자연법이다. 자연법이란 자연상태에서 도출되는 법으로 사상가마다 자연상태 혹은 자연법을 조금씩 다르게 본다는 점을 유념하고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로크는 자연상태의 정의를 인간의 자기애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자기애를 갖고 생존하고자 하며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고자 한다. 이 자기애는 모두 동등하게 가지며 누군가 나의 소유물을 빼앗으려 하거나 나를 해하려 한다면 이는 내 생명이 위협을 받는 것이기에 나는 상대를 해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인간의 권리에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로크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보다 상위 존재에 의한 것이다(시대적 영향인지 책 곳곳에는 종교적 어감이 있는 서술이 보임). 그렇기에 인간의 생명권은 인간이 소유하지 않으며 자해할 권리도 없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없기에 이를 타인에게 넘길 수도 없으며 노예상태는 자연법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앞서 자연법을 설명하면서 인간은 자기애로 인해서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려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소유의 개념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의 신체에 대해 완전한 권리는 없지만 적어도 신체를 사용할 상당한 권리를 가진다. 자신의 신체로 노동을 할 경우 그 생산물들에 대해선 자신이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는게 로크의 견해다. 로크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만큼만 땅을 가진다면 분배로 인한 사회적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현대로 올수록 충분하지 못한 견해이다. 시대가 지날수록 노동은 복잡해졌기에 노동을 정의하고 범위를 규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또한 로크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혼자서 수많은 규모의 농지를 관리할 수 있는 현대에는 땅은 충분할 것이라는 로크의 견해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부권에 대해서는 로크는 부권은 군주의 권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인간이 자유인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이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이성은 자연법을 깨닫도록 하는데, 어린 아이의 경우는 이성의 미발달로 인해 자유를 누릴 수 없다(로크의 아동관과 교육관을 상기할 것). 그렇기에 부모는 자녀가 성숙할 때 까지 권리를 대신 행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는 기간 한정의 권한이다. 그리고 이 권력은 자연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녀의 보호자이기에 주어지는 권력이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 권리는 상실된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녀를 교육시켜서 이성을 갖추도록 할 책임을 갖는다.

 

 로크에 의하면 정치사회가 발전한 이유는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고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자연 상태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킬 권리를 갖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자신을 지키는 것을 호소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권리(자연적으로 부여받은 권리)를 위임하고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통치 제도의 운영은 구성원들의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며 자연권에 기초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입법권에도 제한이 붙는다. 첫째, 생명, 재산 등 개인에게 포기할 수 없는 권리는 정부에게도 양도할 수 없다. 둘째, 법에 기초하지 않은 즉흥적 명령은 불가능하다. 셋째, 동의 없이는 소유물을 빼앗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로크의 사회론은 철저한 법치 사회다. 그렇기에 입법권이 강한 권력을 갖는다. 대신 견제를 위해 행정권과 연합권을 분리하였다.

 

 정치제도와 관련하여 로크의 비판점 중 하나는 절대군주에 관한 것이다. 로크는 일관되게 자연법에 근거하여 내용을 서술해가는데, 자연 상태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호소할 곳이 없기에 사회를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로크에게 있어서 자연 상태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호소할 곳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런데 절대군주제 하에서는 모든 권한을 군주가 갖는다. 군주가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가지려 하면 개인은 그것을 보호하거나 보호를 호소할 곳이 없다. 그렇기에 절대군주제는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는 지금 시대에 있어선 크게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왕권신수설과 같은 방식으로 왕권을 옹호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당시로써는 매우 획기적이고 대담한 도전이었다고 생각된다.

 

 로크의 통치론의 논의는 모두 자연법과 자연권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토대가 공격받는 것 만으로도 로크의 사상은 무작정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법에 기초하여 사회가 유지되고, 법이 집행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로크의 견해는 자연법, 자연권 사상의 한계를 감안하고서라도 고려할 만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법에 관한 강조는 플라톤의 법률이래로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은 그만큼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기에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과 남성은 왜 서로 투쟁하는가 - 사랑, 성애, 모권사회를 중심으로
에리히 프롬 지음, 이은자 옮김 / 부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는 사랑에는 아버지적 사랑과 어머니적 사랑이 있다는 서술이 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의문이 생겼다. 과연 프롬의 젠더관은 어떠하였고, 어떤 의미로 이런 서술을 하였을까? 겉으로 드러난 텍스트만을 보고 프롬 역시 젠더에 관한 전통적인 틀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치부하고 넘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이런 의미일 거야라고 단정짓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책은 프롬의 제자인 라이너 풍크가 젠더에 관한 프롬의 논문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궁금했던 프롬의 젠더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어떤 이유로 사랑의 기술의 어머니적 사랑과 아버지적 사랑이 도출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롬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젠더에 관한 주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모권을 저술한 바흐오펜이다. 근대성은 다양한 주제들을 갖고 있지만, 그중 하나의 형태는 우월과 열등을 구분하는 양상을 들 수 있다. 이 관점을 통해 남성은 우월하며 여성은 열등하다는 인식이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는, 역사는 남성에 의해 주도되었기에 여성이 열등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1861년에 모권이 출간되었다. 모권은 인류 초기 원시사회는 부권제가 아닌 모권제 사회였다는 주장을 펼친 최초의 서적이다. 모권제 사회가 존재했다는 것은 부권제 위주의 당시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주장을 할 여지를 만들어주기에 의미가 있었다.

 

 정신분석적인 접근을 하였을 때, 여성의 출산 능력은 창조를 의미한다. 물론 남성이 기여하는 부분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았을 때는 남성은 창조능력이 없으며 이는 여성만의 특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남성은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자연적 창조능력을 시기하고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카렌 호나이가 주장한 자궁 선망과 유사한 부분이다. 호나이와 프롬의 교류를 생각하면 서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열등감에 대한 보상이 다른 능력을 키우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에 기반한 문명적 창조다. 바흐오펜의 주장은 부권제 사회와 모권제 사회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있으며, 우열을 나눌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프롬은 바흐오펜의 주장에 다소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이 결론을 받아들였고 나름의 방식대로(정신분석적 접근을 통해) 토대를 다지려 시도하였다.

 

 1943년 논문에서 프롬은 생물학적 요인에 의한 양성의 성격적 차이를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성적 관계에 대한 형태로 성격적 요인을 끌어내고자 시도하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서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프롬에 의하면 남성은 관계에 있어 겉으로 드러나는 요소가 크다. 제대로 발기를 하느냐 안하느냐가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다. 남성은 자신이 발기에 대한 스위치를 온-오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계에 있어 혹여 발기하지 않고 상대를 만족시킬 수 없을까 불안해한다. 그 불안에 대한 방어적 형태로 자신감을 보이기 위한 허영심, 능력 과시가 나타난다. 이 능력 과시는 때때로 여성을 힘으로 정복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에 여성은 발기에 대한 불안 따위는 없다. 하지만 상대인 남성의 성기가 남성 스스로 통제를 할 수 없기에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을 힘으로 제압하고 욕설을 퍼붓는다고 남성의 성기가 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여성은 신체적 매력을 과시하는 형태로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프롬은 성적인 차이로 인한 성격의 경향성은 결정적이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경향성은 양성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프롬은 성적인 차이는 개인간의 성격차이보다 미약하다고 하며, 성격에 더욱 더 결정적인 요인은 사회적 요인이라고 하였다. 결국 1943년의 논문에서 프롬의 결론은 성차로 인한 차이는 옳고 그름을 매길 수 없으며 사회구조적 맥락에 따라 좋게 여겨지기도, 나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회구조의 개선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재밌는 견해이긴 했지만 1951년의 논문에서 프롬은 생물학적 성차를 통한 성격분석을 포기하고 이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다만 프롬은 여성이 남성보다 자녀에 대한 애착을 더 많이 형성한다는 언급을 하였다. 이 부분이 1956사랑의 기술에 언급된 아버지적 사랑과 어머니적 사랑과 관련된 부분이다. 사실이 이 두 사랑을 구분하는 것은 프롬의 1934년 논문부터 등장한다.

 

 프롬에 따르면,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식을 양육함과 동시에 노후에 자신이 양육받을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투자란 자신의 재산을 줄 아들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동일시하게 되고 여러 기대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를 충족시킬 경우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 반면에 어머니의 사랑은 모든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자녀와 함께 있으며 애착을 형성하고 자녀의 행동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프롬은 이를 토대로 당시 사회에는 어머니적 사랑이 부족하며 그로 인해 병리현상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자세히 설명한 저서가 바로 사랑의 기술이다.

 

 프롬의 몇몇 서술에서 볼 수 있고, 사랑의 기술에서 아버지적, 어머니적 사랑을 언급할 때 프롬이 융의 원형적 의미라고 덧붙인 부분을 보면 프롬의 젠더관은 융과 유사한 부분도 많이 보인다. 융은 세상의 모든 것이 대극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젠더의 경우에는 남성 속에 있는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하며 여성 속에 있는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보았다. 그리고 대극적 요소를 통합할 때 생명의 에너지가 생기며 개인 내부의 모든 대극적 요소를 통합할 때 진정한 자기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 젠더에 대한 부분을 따로 뽑아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각의 내면에는 양성적 요소가 있으며 그 비중이 다를 뿐이다. 이들은 우월을 논할 수 없으며 각 요소를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바흐오펜이나 프롬이나 융이나 동일선상에 있다. 차이를 두자면 양성성을 도출하는 방법의 차이일 것이다. 프롬의 경우 한때는 양성성을 정의하려 시도하였지만, 이후에는 그건 알수 없다고 하고 사랑의 종류에만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대의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남성성, 여성성을 전제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관점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롬은 어떨까? 프롬은 사랑의 종류들을 말하고자 한 것이며 단지 그것에 잘못된 이름(남성적,여성적)을 붙였다는 점에서만 문제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기술의 그 구절만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적 사랑과 여성적 사랑을 도출해낸 과정이 다루어진 1934년의 논문을 고려할 때, 젠더에 관한 프롬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의 기본은 인간의 신체적 경험, 생활상의 경험이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1943년의 논문에서 성관계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경험과 심리를 분석한 것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934년의 논문에서 프롬은 당연하게도 남성은 재산을 갖고, 그걸 줄 아들을 선택하며, 여성은 자연스럽게 양육을 한다는 전제를 갖고 남성적 사랑과 여성적 사랑을 도출해낸다. 이러한 생활환경이 당연시되던 당시의 한계로부터 프롬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여성이 자녀에 대해 더 애착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사랑을 받는 것은 아동이 발달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합의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사랑을 주는 것은 일종의 의무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이 자연적 감정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든 아버지든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사랑의 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롬은 사랑의 감정이(특히 어머니에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아버지적 사랑과 어머니적 사랑을 도출하는 프롬의 관점은 오류가 있다.

 

 위에서는 사랑의 두 요소를 도출하는 프롬에 관점에 관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프롬의 관점 전체가 오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도출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 조건적 사랑과 무조건적 사랑이 병행되어야 함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또한 성차로 인한 성격적 차이는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격의 개인차보다 미미한 수준이며 사회적 조건이 성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프롬 견해의 가치는 한 부분의 오류로 가리워져서는 안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전한 사회 - 범우사상신서 33 범우사상신서 33
에리히 프롬 지음 / 범우사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후속편으로 전작에서 심리적 관점에서 자유의 개념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면, 이 저서에서는 구성원들을 심리적으로 건전하게 하는 사회의 요건에 대해 더 비중을 두고 논하였다.

 

 이 책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언급된 바 있는 대상관계적 관점을 인류에 적용한 인류의 개체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인류는 자연에 내사된 상태에서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자의식을 갖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연과 자신(인류)을 구별할 능력을 갖게 되었다.

 

 자연과 자신을 구별함에 따라 자연은 이용의 대상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이는 자연과이 애착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다만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애착은 종교적 가르침 혹은 중세의 장원에 대한 예속에서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있었기에 불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사회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권위는 해체되고 인간은 다양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기존 체제들과의 애착이 끊긴 것이다. 애착이 끊기면 다가오는 것은 죽음, 고독, 무의미 같은 실존적 조건에 대한 직면과 그로 인한 불안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우리에게 많은 불안을 주었다. 거대 국가, 거대 기업 등, 그리고 경제구조에서의 분화는 개인이 자신이 마주하는 것의 전체를 파악할 수 없도록 가렸다. 전체를 파악할 수 없고, 자신이 마주하는 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개인의 불안은 가중되었다. 인류는 겉으로 드러나는 자유는 쟁취하였으나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한 홀로서기를 할 준비는 되지 않았기에 불안에 직면하지 않고 불안을 회피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중심을 이루는 세 가지의 도피 기제다.

 

 프롬의 이론 중에서 하나의 핵심 개념은 바로 사회적 성격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리적 욕구다. 수면, 성욕, 식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본 욕구들을 충족하려는 구체적인 방식은 그 사회적 여건의 영향을 받는다. 가령 식욕을 채우기 위해선 음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음식을 구하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 그럼 자연히 돈을 버는 방법에 따라 개인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기본적 욕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작용하는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특정 시기, 특정 사회의 구성원들에게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성격이 형성된다. 프롬은 그 사회가 심리적으로 건전한지 건전하지 않은지를 판단하려면 이 사회적 성격을 분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앞서 언급한 도피 기제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그 사회가 조장하는 사회적 성격이 인간이 자신의 조건에 직면하고 홀로서기를 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프롬은 건전한 사회란 인간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 자본주의와 같이 인간이 수단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심이 중심에 있는 사회인 인본주의적 사회가 프롬의 지향점이다.

 

 인본주의적 사회를 위해 프롬은 경제, 정치, 문화적 측면에서 몇몇 제안점을 던진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사회주의적 형태를 지향해야 할 것을 제시한다. 하지만 여기서 의미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가 아니다. 프롬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의 토대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경제적 효율이든 보수 분배의 평등이든, 사회주의의 본질은 인간 존재를 고려한 사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경우 하부구조를 지나치게 강조했고, 하부구조의 개선을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구성원의 의식의 각성을 도외시하였다. 프롬은 이 점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며 경제적 효과는 부수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는 개인이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기존의 사회에서는 대표적 도피기제인 자동적 동조가 나타내는 것과 같이 개인의 의견은 없으며 모두는 자동인형과 같은 존재였다. 이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프롬의 진단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려면 선거권의 보장으론 충분하지 못하며 중앙집권보다 지방분권을 통해 각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저생계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교육, 예술, 종교 에 대한 제언을 하였다. 교육은 자신의 내면을 길러내는 성장관적인 교육관을 제시하였다. 이는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고 존재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예술은 집단 예술을 주장하였는데, 내가 보기엔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한다. 예술이 소수 엘리트의 것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의 공동 활동에서 생겨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였다. 아마도 예술이란 어떠한 일을 하던 자신과의 연관성을 자각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이는 노동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관련해서는 프롬은 종교 문제는 신에 관한 논쟁에 초점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종교의 핵심은 신의 증명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각 종교나 다른 모습의 신들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또 종교가 비판해야 하는 우상숭배란 일신 이외의 이교도 신들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 성격을 조장하는 권위주의나 물신주의의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프롬의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당시 시대적 한계일 수 있겠으나 프롬의 관점이 정신분석적 관점에 입각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은 특정 상황에 대한 깊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실증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짓이라고 할 순 없으나 또한 진실이라고도 쉽게 말할 수 없다. 프롬을 접할 때는 이 점을 유념하면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을 감안하고서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수많은 비판 중에서 프롬의 비판이 특별한 점은 심리학적 관점을 도입하여 성격적 차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였다는 점이다. 윤리학적 정당성에 근거하여 비판을 전개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성격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부터 뉘앙스를 풍기는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근거다. 이 책에서 프롬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할 뿐, 인간 본연의 모습이 어떻다는 것을 설명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였다. 앞으로도 이 점에 유의하며 프롬의 저서를 읽어나가고자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석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히 프롬은 사상적으로 정말 다양한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가 스스로 인정했듯,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로부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관점,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관점은 프롬 사상체계의 핵심을 이룬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만 보더라도 성격에 접근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정신분석적 견해를 따르며, 심리적 요인에 사회적 요인, 물질적 토대를 고려하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접목시키면서 프로이트의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인다. 정신분석적 관점에 사회적 요인을 접목시킨 프롬, 설리번, 호나이를 보통 신프로이트 학파라 부른다. 이 뿐만이 아니라,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초반부에는 대상관계적 접근을 통해 개체화 과정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를 인류에 접목시킨 점이 또 흥미롭기도 하다.

 

 프롬 자신이 직접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프로이트, 마르크스와 더불어 프롬 사상의 뼈대를 이루는 또 하나의 사조가 바로 실존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율성을 중시하고, 도피기제를 설명하기 위해 죽음, 고독 등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언급하는 부분들로 미루어 볼 때, 프롬을 실존주의자로 분류하기에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뿐만 아니라 이후 프롬의 저서들에서도 그는 심리학적 분석 뿐 아니라 윤리적 가치판단을 하며, 특히 올바른 사회관을 그린다. 이때 기준이 되는 관점이 실존주의적 윤리관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되는 것처럼, 진짜 이상적 사회의 기준은 우리의 가능성을 잘 펼쳐보일 수 있는 사회, 즉 우리의 실존을 구성해갈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프롬의 견해는 매우 인간적이고 휴머니즘적이다. 그렇기에 따뜻하며, 진정으로 인류의 행복을 바라는 그의 희망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프롬의 관점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프롬은 그 사상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나의 결론이다. 그것은 프롬이 말하는 진정한 자신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프롬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신과 진정한 자신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나, 진정한 자신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는 않는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만 보더라도 도피기제 중 하나인 자동적 동조와 대비해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프롬의 모든 사상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는 토대 위에 서있다. 그런데, 적어도 여태까지 내가 봐온 것 중에는 그에 대한 정당화가 깊이 있게 이루어진 서술이 없었다. 이 점이 내겐 의문이며, 내가 아직 프롬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프롬의 저서들을 차분히 읽으 찾아가보고자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의 교육학 - 민주주의와 윤리 그리고 시민적 용기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사람대사람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드디어 프레이리의 마지막 저서인 자유의 교육학까지 읽었다. 프레이리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시기별로 사용하고 강조하는 언어가 다른 점이 보이기도 한다.

 

 70년대의 페다고지는 프레이리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이 그의 교육사상의 토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프락시스, 은행적금식 교육과 문제제기식 교육이 이 책에서 강조를 두는 내용일 것이다.

 

 프레이리는 80년대의 교육과 정치의식에서는 교육의 정치성개념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 책에서도 프락시스가 강조되면서 거듭 서술되고 있지만, 교육은 본질적으로 정치성을 띤다는 점 또한 새롭게 강조하였다.

 

 「페다고지를 회고하면서 쓴 90년대의 희망의 교육학에서는 민주주의개념을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권위를 부정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대화하며 세상의 모순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기존 프레이리의 교육관은 민주주의적 요소가 많았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언급한 적은 없었다. 여기서도 물론 기존의 프락시스는 중요하다. 하지만 희망의 교육학한정으로 비중있게 다뤄지진 않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프레이리의 마지막 저서로 알려진 이 자유의 교육학에서는 민주주의를 강조함과 동시에 윤리를 강조한다. 조금씩 조금씩 첨가되어 온 것이지만, 70년대와 90년대의 프레이리는 제법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가 이해한 프레이리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기존 저서들에서 보여왔던 프레이리의 지식관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프레이리의 지식관은 비고츠키와 같은 사회적 구성주의에 가깝다. 지식이란,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언어를 매개로 한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대, 상황에 따른 역사성을 띠며, 민중이 목소리를 내도록 한다는 교육목표는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여 주체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지식이 그러하듯, 인간 또한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 또한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여 스스로를 구성해나가야 하는 미완성된 존재다. 미완성된 존재이기에 인간에 대한 교육 가능성이 보장된다. 여기서의 교육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성해나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스스로를 구성해 나간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며 교육은 결국 윤리적 맥락과 떨어질 수 없는 활동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한 교육은 가치론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활동이기에 본질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띨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교육이 중립적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소리다. 이렇게 보면, 프레이리가 말하는 윤리란 실존주의적 윤리관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것 역시 프레이리의 지식관과 인간관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식은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며 역사성을 갖는다. 자신을 구성하는 것 또한 스스로 고립되어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을 구성해나간다. 이 상호작용(대표적으로 교육)에서 프레이리는 정답을 정해 두는 온갖 종류의 권위주의, 기계론적 운명론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런 입장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상호작용이 아니라 일방적인 주입, 교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레이리는 겸손, 오류에 대한 개방성 등의 자질을 갖출 것을(특히 교사가)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프레이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우리가 지식을 구성하고, 자신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 올바른 대화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 어떠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