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도
부시카 에쓰코 지음, 에가시라 미치코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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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기도>는 사랑하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마음을 기도의 형식을 빌어 풀어낸 그림책이다. 아이를 키우며 자연스럽게 그림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그림책은 아이들만을 위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이번 <엄마의 기도>는 특히 더 그랬다. 30대 아빠인 나는 읽다가 눈가가 촉촉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 책에는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나면서 부모가 한번은 느꼈을 감정과 감동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끔씩 아이가 떼쓰거나 울면서 부모의 혼을 쏙 빼놓을 때면 힘들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럴 때 이 책을 읽으면 '아, 그때 내 마음이 그랬지'하고 잠시 놓쳐버린 마음을 다시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도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부모의 따뜻한 사랑도 느낄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은 아이들이 글에 익숙치 않아 부모가 책을 대신 읽어줘야 하기에 다른 일반 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소리내어 읽게 된다. 아이에게 <엄마의 기도> 소리내어 읽어 주는데 내가 잔잔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딱딱 맞아 떨어지는 운율과 반복, 대구, 나열 등의 표현이 시적인 효과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그림책에 조금씩은 시적인 느낌이 들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뭔가 달랐다. 소리내어 읽어보면 확연히 느껴진다. 이윽고 나는 글을 쓴 작가의 이력에서 그 비밀을 알 수 있었다. 1928년 생으로 현재 나이 93세인 그녀는 동요 창작에 평생 활동 해왔고 수상경력 또한 화려하다. 동요집과 시집을 내고 이렇게 그림책도 쓰는 아동문학계의 거장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섬집 아기'같은 잔잔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시적인 글은 형식적 효과도 중요한 장르이기에 번역을 하다보면 본래 언어의 맛을 살리기 어렵기도 한데 번역가가 이를 잘 살려내기도 했으며, 일본어와 한국어의 어순과 어휘의 유사성도 작가의 시적 감성을 고스란히 살려내는데 한 몫했을 것이다.


책 첫 장에 '사랑스러운 내 아기 / 네가 태어나 / 나는 엄마가 되었구나.'는 부분에서 벌써 짠한 감정이 전해진다. 이 구절은 내가 우리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을 담아내기도 함과 동시에 나의 부모님이 나에 대해 가지셨었을 마음도 느끼게 해준다. 지금의 나는 한 아이의 부모임과 동시에 한 부모의 아이이기도 했었으니까.



'벌레가 얼마나 신비한지 /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부분에서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아이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태어난 아이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세상에 엄청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도 없이 오직 있는 그대로 순수한 도화지 같은 마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 아이에게 만물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예쁘고 좋은 것들만 보여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말이다. 들판으로 나가고 바다를 보고 바람소리를 들어보자는 글도 여러 생각을 떠올리 게한다. 바깥 보다는 집이나 학원에서, 자연을 보고 자연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TV와 스마트폰에 마음을 뺏긴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반대로 세상살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소홀했던 스스로도 돌아보게 된다.


구름과 별로 슬픔을 위로하고 기쁨을 나눈다는 표현이나 가족, 친구, 마을, 학교, 세계, 지구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사랑으로 가득하다는 표현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오래도록 간직하길 바라는 마음, 험한 세상 사랑에 의지해서 살아가라는 지혜가 담겨있다.


'이 작디작은 손도 / 언젠간 엄마 손을 꽉 잡을 수 있을 만큼 / 크고 강해지겠지.'라는 구절도 감성을 자극한다. 저 문장은 시간의 유한함을 상기시켜준다. 아이 키우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기에 힘들 때는 언제 빨리 안 크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느새 부쩍 커버려 품안의 아이가 자신만의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시기가 도래하면 막상 서운하기도 한 것이 부모 마음이다. 우리 아이가 지금보다 더 갓난쟁이 일 때 생각이 난다. 새벽에 아이가 깨서 울면 업고 밖을 걸어줘야 잠이 들곤 했다. 아이 소리에 자다 깨서 시계를 보면 4시다. 피곤하기도 하고 당장 몇 시간 있으면 출근도 해야했지만 그래도 아이를 매고 새벽 밖을 나간다. 뒤로 업으면 울고 앞으로 매야만 안 울던 우리 아이, 내가 앉으면 울고 서야 안 울던 우리 아이는 한참을 생글생글 잠이 들지 않고 알수 없는 소리로 옹알거리다가 집주변을 걸은지 한시간쯤 지나 조용하다 싶어 쳐다보면 어느새 잠들어 있곤 했다. 그렇게 집에 오면 5시, 6시. 몽롱한 정신을 찬물로 씻어 깨우며 출근준비를 했지만 그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우리 아이를 이렇게 품고 있을 순간이 내 생에 얼마나 되겠나' 하는 생각 덕분이었다.



이야기가 조금 새지만 저 구절과 비슷한 감정의 동요를 하나 소개하고 싶은데, '나도 어른이 되겠지'라는 국악동요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위와 같이 품 안의 자식이라는 가장 예쁜 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지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있다. 부모는 자식의 아이일 때의 예쁜 모습을 밑천으로 평생 자식을 키워간다고. 나만 하더라도 우리 부모님께 무엇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 없이 평생 받기만하고 살았다. 해드리긴커녕 속을 썩이고 애태우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부모님 가슴에 못박는 모진 말도 했었다. 그런 경험들만 돌이켜봐도 부모란 자식의 어렸을 때 귀여운 그 모습을 보는 댓가로 평생 속썩임을 감당해야하는 불공평한 거래에 무모하게 뛰어든 사람이란 것에 공감한다. 내가 느끼는 그 짠한 마음에는 나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물론 나의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함도 깔려있고 어느덧 이 모든 것이 이해되는 어른이 되버린 생경함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책에서 조금 인상적인 것은 '부디 이 손으로 / 총을 겨누는 일이 없기를'이란 문장에서다. 그 곱디 고운 손이 커서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누군가를 다치게도 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총을 쥐기도 한다. 작가는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무려 6페이지에 걸쳐 다뤘다. 그 중 한 그림은 매체보도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중동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아직도 세상에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 또한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자식들이었고 한때는 순수하고 예쁜 아가였을 것이다. 작가의 글에서 전쟁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이로 발생되는 수많은 난민과 고아들에 대한 연민도 느껴진다.


더 나아가서 정확히 '총'과 '전쟁'을 언급한 것에 나는 작가의 국적과 나이를 연과지어 생각해본다. '1928년 도쿄 출생'. 그렇다, 그녀는 전쟁 세대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뤘고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그녀의 유년기에는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수많은 어른들이 군인으로,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가 죽이고 죽는 것을 목도했을 것이다. 애지중지 키워낸 소중한 누군가의 아들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전쟁으로 희생당하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다시는 그런 참상이 반복되지 않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그 마음이 '새가 지저귀는 환한 아침'을, '엄마가 지어주는 아침밥'을, '창가에서 달을 보는 고즈넉한 저녁'을, '엄마와 나란히 기도하는 밤'을 아이들에게서 빼앗지 말아주길 기도하고 '평화'라는 아이들의 보물을 지켜주길 희망한다는 글에 잘 담겨있다.



후반에는 아이가 잘 성장하여 배우자를 만나고 또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그려진다. 쑥쑥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엄마가 지켜주겠노라 약속하며 책은 끝이난다. '지켜준다'는 말에는 어떤 힘이 있다. 우리아이는 안아주면서 '지켜줄게'라고 말해주는 것을 참 좋아한다. 세상 누구라도 지켜준다는 말을 싫어할 이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강하기도 하지만 반면 충동적이고 감성적이며 약하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커갈수록 그 마음을 더 깊숙이 숨기는 것 같다. 책에 나오는 '지켜준다'는 부분은 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것이다.


책의 첫 장에 노오란 민들레가 나온다. 별 것 아니게 지나갈 수 있지만 마지막에 아이가 다 커서 아빠가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아래에 다시 민들레 그림이 등장한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처음에 나왔던 노란 민들레가 아니라 뒤에는 새하얀 민들레 꽃씨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샛노란 민들레는 예쁘고 젊던 엄마의 모습을 하얗게 변한 민들레는 이젠 손주를 기다리는 할머니가 된 엄마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의 새어버린 머리 같은 하얀 꽃씨가 청춘의 노란 꽃잎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에 담긴 희생과 사랑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기도>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들려주는 것과 동시에 내가 받은 따뜻한 사랑 또한 떠올리게 하는 한편의 '시'같은 그림책이다. 읽을 때 눈물을 흘릴 각오를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우리들도 우리의 부모님께 자주 안부전화도 드리고 찾아뵙는 것도 잊지말고, 잘 안되는 줄 알지만 '사랑한다'고도 말해보고 껴안아 드리기도 해보자. 자식 금방 크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이 그만큼 내 부모님도 늙어버리실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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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 반일 종족주의 거짓을 파헤친다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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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의 정치, 경제, 외교, 사회를 통틀어 가장 큰 이슈를 꼽으라면 일본의 경제 보복일 것이다. 이 사건은 모두가 잘 알듯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전범기업인 신일본제철에게 과거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 선고에 일본 정부가 반발한 것이다. 판결 당시 신일본제철도 이를 수용하여 이행하고자 했으나 극우 성향의 아베 정부가 이를 가로 막았으며, 되려 나온 조치가 바로 2019년 7월 1일, 한국을 상대로 한 수출 규제 발표인 것이다. 우리정부와 여러 통상 전문가들은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 밝혔으나 일본은 북한을 걸고 넘어지며 누가봐도 정치적 이유의 경제 보복을 안보상 이유라고 우기는 지록위마를 시전했다. 한국 법원의 판결을 한국 정부에 대한 경제 보복으로 뒤엎고자하는 아베 정부의 태도는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사법권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으며 과거 일제 만행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묘하게 그 시기에 함께 발행된 책이 있었으니 이영훈 교수를 대표저자로 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한국과 일본간 역사적, 정치적 갈등을 철저히 일본 극우의 논리로 대변하고 있다. 대표적인 한일간의 이슈인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어떻게 같은 한국인으로서 저렇게까지 자국과 자국 민족에 대해 비관적이고 패배주의적 인식을 가질 수 있는지 놀랍다. 그는 위안부는 매춘부로서 돈을 벌기위해 자원한 것이고, 강제징용 또한 고임금의 일자리를 위해 자발적인 의사로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민족적 차별도 없었다 주장한다. 심지어는 독도 조차도 일본의 영토라고 서슴치않고 주장하며 우리 학자들이 밝혀 놓은 많은 사료와 논증은 도외시하고 일본의 주장과 논리는 적극적으로 수용, 대변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 교수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린 그이기에 더욱 충격은 컸다.

 

그렇기 때문에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등장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책의 내용이 너무도 황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을 너무나 벗어난 주장이었지만 세세한 사료와 학술적 근거에 익숙치 않은 일반 국민들은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이성적으로 풀어 반박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답답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상식적인 학자들도 많았기에 그들을 책, 언론, 방송 등의 매체를 통해 사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국민들의 충격을 달래주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한일간의 이슈가 뜨거울 때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이번 서평 책, <신친일파>의 저자 '호사카 유지' 교수다. 내가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을 과거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질 때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명실상부 우리나라 독도 영유권 전문가로 그의 독도사랑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그는 귀화까지하여 법률상으로도 한국인이다. 그는 독도 문제뿐 아니라 위안부, 강제징용 같은 한일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 사료와 논증을 제시하며 일본의 왜곡과 억지에 품격있게 맞섰으며 일반 대중들이 관련 내용들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해주는 활동을 해왔다. 앞서 언급한 일본의 경제 보복 사태 때에도 한국인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일본 내부의 상황을 한국 대중들에게 알려 대중의 관심과 이해도를 높이고 현대판 독립운동이라 불리는 일본에 대한 불매운동을 효과적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과거 한 방송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에게 '귀화를 했는데도 왜 이름을 한국식으로 왜 바꾸지 않는가'는 질문에 '독도가 한국의 영토인 것에 대해 학자로서 국제사회에 증명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는 일에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그의 마음씀이 한국인으로서 고맙고 감사하다. 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다운 한국인이었다.


<신친일파>는 호사카 유지 교수가 이영훈 교수를 대표저자로 한 <반일 종족주의>의 거짓과 왜곡을 낱낱히 파헤치고 그에 대해 객관적인 사료와 합리적인 논리로 반박한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호사카 유지 교수의 예리한 반박에 통쾌함도 느끼지만 과거 조상들이 당했던 아픔과 그것이 지금도 '신친일파'들에 의해 청산되지 못한채 이어져 오는 안타깝다 못해 슬프기까지한 현실에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알아야 한다. 알아야 그런 일이 미래에 재발되지 않는다.

 


책의 구성은 3부분으로 나뉜다. 한일간의 갈등이 다양하게 상존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세 가지,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독도 문제에 대해 호사카 유지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가 주장한 내용을 반박하고 은폐된 내용들은 보충하여 소개하고 있다.

 

우선 강제징용 문제를 살펴보자. 일전에 개봉했던 <군함도>가 바로 대표적인 일제의 강제징용 문제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 영화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라 탄다. 하지만 그들이 속아서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일본 나가사키 근처 감옥섬이라고도 불렸던 하시마(군함도)의 탄광이었다. 거기서 남자는 탄광노동자로 끌려가고 여자는 매춘을 강요받는다.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분명한 차별이 존재하였으며 조선인들은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가장 열악한 조건으로 일하게 된다. 수시로 매질을 당하며 탄광이 무너지거나 가스로 인한 폭발로 죽는다. 제대로 된 치료나 보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지옥같은 노예생활에 도망도 시도하지만 섬이라 바다에 쉽쓸려 죽고 일본군에게 잡혀서 죽어나갔다. 영화의 내용이 사실이었음을 책에 실린 여러 증언과 행정 사료들을 통해 보여준다.

 

강제징용에 대해 <반일 종족주의>에서는 자발적이었고 고임금의 좋은 일자리였으며 민족적 차별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은 임금도 적었을 뿐더러 일본인은 통장을 직접관리한 것에 비해 조선인들은 전범기업이 일괄관리했다. 그리고 임금은 당장 쓸 정해진 '용돈'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강제저축을 하여 도망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저축된 돈들도 상당부는 여러 이유로 피자들에게 최종 지급되지 않은 것이 적지 않았다. 특히 남자들이 끌려온 경우 조선에 있는 가족들은 생사가 막막해진다. 실제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어 총독부에서도 이를 우려하는 문서도 나온다. 이에 조선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을 할수도 있었으나 전범기업의 관련 지침에 따르면 '조선의 아내들은 생활을 잘 하지 못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송금액도 일정 소액으로 제한한다. 그리고 송금액도 일부 또는 전부 떼먹기까지한다.

 

일제가 강요한 탄광 노동이 얼마나 가혹하고 힘들었는지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다. 일제가 조선인을 탄광에 도입하기 전에도 탄광산업은 존재했다. 그 당시 일이 너무 위험하고 고되어 사람이 잘 구해지지 않자 일제는 이른바 죄수 노동, 죄수들을 동원하는 것이다. 일의 강도는 세고 위험은 산재되어 있으며 제대로 된 식사도 기대하기 어려우니 죄수들 중에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벨트' 지급을 금지했다한다. 노예에게는 자의적 죽음 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한 것이 강제징용인 것이다. 그 당시 선조들의 참혹함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은 산 지옥이었다.

 

작년에 일본의 경제 보복이 심화되어 한국 기업 경영이 위협받고 한국 경제가 흔들리는 것을 보자 강제징용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 할아버지가 괜히 폐를 끼친것 같다며 죄송해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정작 사과하고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당당하고 큰 소리치는데 생사를 오고가는 끔찍한 일을 당한 피해자가 죄송해야 하는가. 정말 안타까웠다.

 


위안부 문제 또한 참 슬프다. <신친일파>의 사료에서 가장 어린 위안부 소녀의 나이는 '15세'로 나온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세는 나이'로 기록된 것이라 만 나이로 따지면 13세~14세로 추정한다. 그 어린 소녀들을 취업 시켜준다고 속이거나 납치해서 어딘지도 모르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어느 최전방 전선으로 끌고가 하루에 20~30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볼수록 말이 안나온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날마다 월요일은 공병대, 화요일은 수송대, 이런 식으로 요일마다 부대가 정해져 있었고 하루 일과도 몇시부터 몇시까지는 병사, 또 몇시부터는 부사관, 그 이후는 장교 이런 식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위안부를 운영한 자료가 나온다. 한 사람당 30분씩 할당되었다고 하니 20~30명이면 오로지 위안부 역할 수행만 10~15시간이다. 지금으로 치면 여중생 쯤되는 아이가 전장의 최전방, 총알과 폭탄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전쟁으로 반은 미쳐버린 군인들을 하루에 20~30명씩 상대해야 하는 비극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위안부 소녀들은 적의 공격에도 죽고 일본군의 총칼에도 죽었으며 인생을 비관한 나머지 목을 매거나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이영훈 교수는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위해 간 '매춘부'라 하니 언어도단을 느낀다.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이 이런 일을 당해도 공분을 느낄 것인데 어떻게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반대의 편을 들수 있을까. 그들은 일본은 그동안 충분히 사과를 했다고 말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이 벌이는 문제 제기와 사과 및 배상 촉구 운동을 그저 한 몫 벌기위한 것인냥 비하한다. 하지만 당장 그런 생각이 든다. 진실로 일본정부가 사과했다면 왜 각 재외 공관을 통해 타국에서의 위안부 소녀상 건립을 방해하고 철거에 압력을 넣는가. 작년 일본국제예술제에 출품된 소녀상이 3일만에 강제 중단시키는 것이 사과한 정부의 태도인가. 더 서글픈 것은 해외도 아니고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조차 소녀상 건립이 일부 세력에 의해 저지당하고 어떤 자치단체는 불허했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아픔을 우리 국민이 품어주지 못한다면 누가 품어준단 말인가. 그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실제로 일제시대 일본군으로 활동했었던 만화가가 과거 경험을 그린 만화를 보면 그 광경이 더 피부로 다가온다. 동남아 전선 어느 정글 속에서 허름한 오두막 3채가 있다. 그 안에는 위안부 여성이 1명씩 있고 각 오두막 앞에는 80~100명의 군인이 줄서 있다. 군인들 중에는 오늘은 공쳤네하고 발길을 돌리려는 이도 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끝까지 기다리는 이도 있다. 이걸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과거 일본군 출신의 일본인이 양심선언을 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거기 이런 말이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80명 정도의 병사들을 상대해야 한다. 병사들도 지옥이었겠지만 '위안부'들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지옥이지 않았을까." 아, 증거가 있는데도 없다고 할 것인가.


특히 위안부 할머니 중 '문옥주'할머니의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다. 문옥주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분이 살아계실 때 다행이 증언집을 남겨놓았다. 책에 인용되어 있는 부분만 보더라도 위안부의 고통과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임을 알수 있다. 일본판이 발행되고 9년 후 한국어판이 발행되었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찾아 읽어 봐야겠다. 문옥주 할머니는 강한 분이셨고 너무도 힘들고 괴로웠지만 차마 죽을 수 없어 적응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려 살아남을수 있었으나 그 중에는 성격상, 체질상 적응하지 못해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분들을 위로하고 함께해주지 못할 망정 손가락질하고 폄하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이들에게 다시금 큰 상처를 안기는 것이다.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로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의 정부 및 극우의 논리를 적극 반영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한 것을 <신친일파>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독도 연구에 평생을 바친 독도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다. 그가 이미 저술한 책이며 기고한 글이나 각종 매체, 학교 강연에서 밝힌 내용만 해도 상당하다. 하지만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는 이를 보지 않는 것인지 못본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독도는 실효적으로 대한민국이 점유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한국의 영토임을 밝히는 많은 사료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음에도 일본측 주장과 사료 근거삼아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 일본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을 제정하여 운영중이며 일본 국민들에게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교육하고 있다. 얼마전 방송인 김구라씨가 나와서 다케시마의 날을 주최하는 시네마현과 일본 영토전시관을 방문하는 방송을 보았다. 거기서 독도는 쌀농사를 짓는 곳도 아닌데 버젓히 '일본 다케시마(독도) 쌀'이라고 이름 붙여 팔고 있고 독도 모양의 빵이 있었는데 빵과 함께 들어있는 일본 깃발을 빵 위에 꽂아 먹는 것이었다. 일본 극우들은 합법적으로 신고하고 취재하는 제작진 일행에게 한국에서 온 것을 알고는 고성과 욕설, 심지어 밀치는 등 폭력적인 행동도 보여 현지 경찰이 제재하는 장면도 나왔다. 일본인들에게 제작진이 물었다. 독도가 어느 나라 영토이냐고. 모두들 일본의 영토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연이어 이런 질문을 했다. 독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이에 대답하는 일본인은 아무도 없다. 나는 안다. 독도가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80km)"에 있다는 것을. 씁쓸하다. 알아야 한다. 정말 알아야 한다.


작년 일본의 경제 보복 당시 잘못한 것은 일본 정부인데 우리 정부의 합법적인 대응은 비난하고 국제법까지 어겨가며 불법적은 대응을 하는 일본 정부는 비호한 세력이 있었다. 21세기, 독립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친일파는 100년전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신친일파>의 제목처럼 친일파는 '신친일파'로서 여전히 존재하고 계승되고 있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관심을 가지자. 그래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신친일파들이 더 이상 거짓선동을 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다시는 과거의 슬픈 역사가 반복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불우한 역사는 반복되고 미래는 없는 법이니까.


P.S.

이영훈 교수의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 충격받으신 분들은

호사카 유지 교수의 <신친일파>로 놀란 가슴을 달래주자.

가만히 위의 문장을 들여다 보니 참 모순적인 인상을 받는다.

일본 입장에서 일본 극우의 논리를 비호하고

과거사 왜곡에 앞장 선 사람의 이름은 한국 이름이고

한국 입장에서 이에 맞서 거짓에 대항하고

진실을 알리고자 앞장 선 사람의 이름은 일본 이름이니 말이다.

한쪽은 이름은 한국인데 한국인 같지가 않고,

한쪽은 이름은 일본인데 너무도 한국인 같다.

다시한번 <신친일파>라는 이번 책의 제목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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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요가 - 인도 최고의 지성과 영성, 비베카난다의 말
스와미 비베카난다 지음, 김성환 옮김 / 판미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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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요가>는 19세기 인도에 등장한 후 지금까지 세계인의 마음 속 영적 지도자로 남아있는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강연집이다. 우리는 그보다 6살 어린 간디는 알아도 비베카난다는 잘 모른다. 인도의 국부이자 위대한 사상가 간디는 "그의 글을 만나고, 나의 사랑은 1,000배 불어났다."라는 말로 그를 향한 존경을 드러냈다. 내가 비베카난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인도서 요가를 배우면서다. 만나는 요기(요가 수행자)들 마다 그를 스승으로 칭송하는 것을 보았다. 후에 그의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 통통한 얼굴과 투박한 체형으로 그가 과연 요가를 잘 할수 있겠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런 생각은 당시 나의 요가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요가는 요가의 한 부분인 '아사나(행법)'이다. 실제 요가는 인도 사상과 힌두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수행법의 총체를 뜻한다. 비베카난다의 요가는 몸의 요가보다는 영적 요가, '마음의 요가'였다. 사족이지만 책 제목을 <마음의 요가>로 한 것은 신의 한수라는 생각이 든다. '비베카난다의 가르침'과 같은 이름이었더라면 과연 인도나 인도철학사에 관심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대부분 이 책을 그냥 지나쳤을 테니까. 다행이 요즘 웰빙, 워라벨, 소확행과 같은 행복과 내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음'과 '요가'라는 키워드는 사람들의 눈낄을 끌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의 요가', 아직은 몸의 요가가 더 익숙한 우리들에게 참 매력적인 이름 아닌가.


비베카난다는 그와 그의 글을 접한 세상 모든이들의 영적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엄청난 명성에 비해 너무도 짧은 39세의 일기로 생을 마친다. 당시 나에게 요가를 가르쳐주던 한 요기는 스와미 비베카난다를 이해하는 것은 인도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도 했었다. 나는 그의 삶과 가르침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급한대로 현지에서 그의 책을 몇 권 샀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 그와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으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마음의 요가>라는 비베카난다의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설레임마저 느꼈다.


책은 지금부터 120여년 전 그가 영국과 미국에서 했던 12번의 강연을 12개의 챕터로 담고 있다. '이 삶이 진짜일까?', '자유를 향하는 길',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당신은 태어난 적도 없고, 죽지도 않습니다.'와 같은 챕터 제목은 비단 요가 수행자들이나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일 것이다.


인도 철학은 베다를 근원으로 하며 '베다의 끝'을 의미하는 '베단타 철학'으로 발전한다. 비베카난다의 강연은 베단타 철학과 다양한 요가 수행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베단타 철학의 이해에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비베카난다의 업적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종파로 갈린 힌두이즘을 집대성하고, 종교적 맹신과 허황은 걷어내고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재정비하여 현대화를 이뤄내고, 종교와 민족을 넘어 누구라도 수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일반론적 가치를 발굴하여 대중화를 실현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 디자인을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일단 책의 첫 인상은 예쁘고 신비스럽다. 저채도의 연분홍 톤은 '마음'을 다루는 책답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양장본을 채택하여 고급스러움과 종교적 이미지가 어우러져 신성한 분위기도 연출해낸다. 글자에는 핑크골드를 금박하여 세련된 느낌도 주었다. 특히 측면 모서리와 전면에 '무드라(수인)'를 연상시키는 손 모양의 포인트를 주어 인도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러한 무드라는 델리 공항에서도 볼수 있는데 인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상징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이 무드라가 베단타 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그와 같이 환영해 주는 것 같다. 요즘은 책도 패션을 입는 시대이며 책의 기능 중에는 분명 심미성도 존재한다. 아무리 내용이 좋다고 하더라도 어울리는 디자인을 갖추질 못한다면 독자의 이목을 끌수 없다. 내용과 더울어 겉에도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보였다.


책을 읽다보면 그의 통찰력 있는 비유와 마법같은 설명에 여러번 감탄하게 될 것이다. 마치 거대한 도서관을 머리속에 넣고 다니다가 강연장의 빈 공간에 수천년 동안 인류가 쌓아온 진리를 차곡차곡 꺼내어서 구현해내는 느낌이었다. 이 잘 짜여진 문장들을 실시간으로 대중 앞에서 술술 풀어내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설명은 쉽고 명확하며 거침없었다. 살아있던 그는 분명 언어의 마법사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주장을 풀어내는 과정이 더 흥미로웠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을 그는 신과 인간에 대한 한 편의 시로써 표현해내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참으로 문학적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천재성도 있겠지만 사회적 배경도 한 몫했을 것이다. 인도 카스트의 2번째 크샤트리아(무사) 계급으로 어려서부터 승마, 수영, 성악, 기악 같은 각종 교양을 습득하고 자연과학, 천문학, 수학, 철학 같은 여러 학문을 익혔다. 인도 고대 문헌을 탐독하고 명상 같은 영적 수행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서양의 종교와 철학도 공부하였다. 나중에는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지도 아래 인도 전역을 유랑하며 수행자의 길을 걷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인류의 지성과 영성을 양분 삼아 그는 놀라운 통찰력을 피워낼 수 있었다.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쉽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신'이다"라는 것이다. 360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은 이것의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 황당해 할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옮긴이가 서두에서 한 말처럼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읽고 소화해 가다보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마야(무지)로 인해 분리된 다수성인 것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베단타 철학이 주장하는 불이일원론이다. 이것은 신과 내가 분리되어 있다거나 너와 내가 따로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부정하고 동시에 모든 것은 변하기에 불멸부동 불가분의 존재는 있을수 없다는 불교의 불이론 마저도 부정한다. 정확히는 부정이라는 표현 보다는 두 가지 설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뺀 '하이브리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불이일원론의 흔적을 타종교 속에서도 찾아내어 이것이 보편적인 개념이며 지혜로운 성인들은 이미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논한다.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일찍이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었다.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 '인내천'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 속에는 신이 존재하므로 모두는 평등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베카난다 또한 모든 세상의 만물의 본질이 하나의 '신'이라는 존재인 것을 주장함으로써 사랑의 당위성과 증오의 부당성을 설명한다.


불이론과 불이일원론에 대해 조금더 이야기 해보면 불이론과 불이일원론의 차이는 이해하지만 그 차이가 있든 없든 궁극적으로 이 생각이 추구하는 길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는 연기법을 통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베단타 철학에서는 모두가 같은 신이라는 것으로 하나라고 말한다. 연결된 것이나 하나라는 것이나 말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변하므로 나라고 할 어떠한 실체도 없고 본래 나라고 할 것이 없기에 생과 사도 없다며 불생불멸을 설명한다. 다만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관점에 따라 생도 있고 사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베단타에서 모든 것이 하나의 '그것'이기에 생과 사는 마야의 현현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뿐 실재는 나고 죽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불생불멸을 설명하는 것이 과정의 차이지 의도하는 바는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불교 또한 인도 철학 토대 위에서 생기다보니 서로 뿌리는 공유되어 있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비베카난다의 위대함이 잘 드러내는 부분은 마지막 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이상적인 종교란 모든 마음에게 양식을 공급할 정도로 커야한다고 설명하면서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를 융합할 때라야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배척이 아닌 포용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포용이라고 말한다.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고 모두와 함께 예배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적극적인 포용의 태도에서 깊은 인류애가 느껴졌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를 복을 구하는 종교로 생각하면 오해하기 쉽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앞에서 언급된 것 처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종교다. 힘이 필요한 이에게는 힘을 붇돋아주고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는 위로가 되어주는 영혼의 양식을 키워내는 영혼의 밭말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타종교에 다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종교 자체를 경멸시하는 모습도 보인다. 실로 지금은 종교가 사라져가는 시기다. 불교의 본산이라는 조계종에서 스님들의 각종 비리와 비행이 공중파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고발되는가 하면 정치적 극우세력의 중심을 자처하는 목사님들의 사랑과 용서가 아닌 증오와 저주의 발언이 매체를 통해 들려온다. 과거에 비해 사람들은 지적 수준은 높아지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일반화 되면서 종교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 들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보자.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나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외로운 사람들도 늘었으며 그에 따라서 자살율도 높아졌다.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 육체의 영역이 아닌 두뇌의 영역 또한 AI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때 일수록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종교적 해답의 요구는 커질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종교의 의미가 사라져가는 이 시기가 역설적으로 마음과 영혼에 양식을 주는 종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시작은 이미 120년전 비베카난다가 주장했듯이 '포용'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베카난다가 한 말 중에서 이 말이 인상깊었다. "사람들이 종교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설교자들이 청중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것일뿐 적합한 진리를 주는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무신론자나 유물론자였다 했을지라도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책이 종교로 분류하자면 힌두교 서적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 이유로 타종교인들이 기피할지 모르겠으나 12장에 담긴 내용은 길 잃은 양을 이끌어야 하는 목자가 도리어 길을 잃고 헤맬 때 그 목자에게 길을 찾아주는 지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 그래서 좋은 책이었다. 위대한 사상가란 잘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혼란스러운 대중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는 사람일 것이다. 이 책 속에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가 제시해놓은 그 길이 담겨있다. 그러니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귀 있는 자 와서 들으라. 서평은 이 정도로 줄이고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현재를 딛고 서 있지만, 우리의 가슴은 무한한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현재의 빛을 즐기면서, 앞으로 도래할 모든 것을 향해 모든 마음의 창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이렇게 기도드리기로 합시다. 과거의 모든 예언자들에게 경배를! 현재의 모든 현자들에게 경배를! 미래의 모든 성인들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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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아 2020-04-30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분...정체가..? 안살수가 없게 만드시네요

따부시향덕 2020-05-21 11: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_^//
 
결혼하고 싶은 나비 - 존중 네 생각은 어때? 하브루타 생각 동화
브레멘+창작연구소 지음, 청운 그림, 전성수 감수 / 브레멘플러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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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데르센, 덴마크의 동화작가이자 소설가인 그는 우리에게 <성냥팔이 소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림책 <결혼하고 싶은 나비>는 바로 그 안데르센의 작품으로 명작으로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다. 5분만에 다 읽을 수 있는 명작이 있다는 것이 반갑지 않은가.

5살인 우리 아들은 남자 아니랄까봐 벌써부터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최근 만화 <공룡메카드>에 나오는 '초신비'라는 예쁜 여자 캐릭터에 빠져 있었다. 엄마와 결혼하겠다던 굳은 약속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렸고 어느새 초신비 바라기가 되어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며 가감없는 애정을 드러낸다. 결혼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는 아이를 보며 저 단어의 무게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묘한 미소가 지어진다.

책 내용은 나비가 자신과 결혼할 꽃을 찾아다니며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따뜻한 봄날 이제 막 성충이 되어 일생에서 가장 멋지고 탱탱한 시절을 맞이한 나비는 자신과 결혼할 아름다운 꽃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만나는 꽃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된 만남조차 시작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눈이 높다. 시간은 공평한지라 어느덧 청춘시절은 다 가버리고 가을이 되었다. 이제야서야 겨우 마음에 드는 박하꽃을 만나 청혼을 해보지만 애석하게도 다 늙어버린 나비가 한창인 박하꽃(7~9월 개화)의 눈에 들어올리 없다. 결국 짝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나비는 사람이 사는 집에 들어가 따뜻한 난로불을 쬐다 그만 잡혀 버리고 곤충수집상자에 갇힌채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한숨만 짓는다. 씁쓸하다.


책의 교훈은 존중과 타이밍이다. 모든 사람은 일장일단, 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나비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너무도 자만한 나머지 남의 장점 보다는 단점을 보고 쉽사리 상대를 판단해버린다. 이런 존중없는 태도가 결국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타이밍,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곤충의 수명은 짧다. 화창한 봄날 그토록 기다리던 성충이 되지만 나비는 꽃다운 청춘을 자만으로 허송해버렸다. 그 많은 꽃 중에 완두콩 꽃의 경우는 잘 될뻔도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보인 단점에 나비는 미련없이 돌아선다. 

누군가를 만날 때 너무 따지면 만나기가 어렵다. 차라리 너무 따지지 말고 호감만 있다면 일단 만나보며 단점은 장점으로 극복하며 열린 마음으로 다가갔다면 나비의 말로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생각을 하다보니 이 책은 연애 지침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재되 있는 의미가 깊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역시 명작은 이래서 명작인가보다.

책을 보면서 나비의 기대수명에 대해 찾아 보았다. 나비가 가을까지 살수 있던가 하는 궁금함 때문이었다. 나비의 종마다 편차가 크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호랑나비가 성충인 상태에서 보름을 살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드물게 알에서부터 2년을 살수 있는 종도 있다고 하는데 동화책에 나온 나비도 그런 종일 것이다.


아무리 명작이라 하더라도 그림책이라는 범주에 속하기에 그림이 제 맛을 살리지 못 한다면 감동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림작가는 충분히 명작을 명작답게 잘 살려냈다. 책 페이지 마다 꽃으로 가득한 그림을 보면서 봄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냥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매우 사실적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데이지, 수선화, 붓꽃, 제비꽃, 튤립, 백합, 개나리, 사과꽃, 완두콩꽃, 박하꽃이 등장한다. 

나는 꽃이 등장할 때 마다 핸드폰으로 검색해서 아이에게 해당 꽃의 실물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정말 사진 속에서 보이는 꽃의 특징이 그대로 그림에 묘사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단순히 '아 그런 꽃이 있는 갑다'하고 넘어가지 말고 '붓꽃은 이렇게 생겼고, 사과꽃은 이렇게 생겼네'하며 아이와 함께 꽃 이름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과꽃이 제일 예뻤다. 사과꽃은 벚꽃과도 많이 닮아 있는데 둘 다 같은 '장미목'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복숭아 나무에 열리는 복사꽃도 벚꽃과 비슷한데 복사꽃은 벚꽃에 비해 분봉빛이 짙다면 사과꽃은 순백색이 짙은 차이가 있다. 그림의 디테일은 계절에 따른 나비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봄에는 머리도 금발에 더듬이도 팔팔하지만 가을이 된 나비는 머리도 하얗게 세고 더듬이도 일그러저 있다.


책에는 하나의 장치가 있다. 책을 읽다보면 달팽이 표시를 볼수 있다. 거기서는 별책부록으로 포함된 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카드 앞장에는 해당 페이지의 그림이 있고 뒷장에는 질문이 있다. 부모가 수록된 질문을 하면 아이는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수 있는 것이다. 책에서는 이를 '마따호쉐프'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히브리어(유대어)로서 '네 생각은 어때'라는 말이라고 한다. 유대인 부모는 아이를 키울 때 '마따호쉐프'라는 말을 많이 해주어 아이의 사고력을 길러준다고 한다. 이런 교육법에서 착안하여 그림책을 읽는 중간에 아이에게 질문을 할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아이가 중간에 달팽이 표시가 있으면 '달팽이다!'하고 흥분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아이들은 자기 역할을 갖고 싶어하는 것을 느낀다. 사소한 거라도 아이는 자기를 믿고 무언가를 맡겨 주는 것을 원한다. 가위를 다룰 때 부모들은 아이가 다칠까봐 못 미덥고 불안해서 대신 해준다. 하지만 그럴 때 조차도 가위는 부모가 다루되 아이에게 종이 끝부분을 잡아 달라든지 하는 식으로 그 역할이 사실상 효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아이가 함께 자신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 아이의 행복과 자존감 배양에 분명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림책은 일방적으로 부모가 읽어주는 부분이지만 중간에 달팽이를 찾거나 생각을 말하게 하는 부분을 넣어서 아이가 참여할수 있도록 한 점이 마음에 든다.

<결혼하고 싶은 나비>는 재밌는 이야기와 의미있는 교훈도 있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꽃들도 배울 수 있는 예쁜 그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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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인생은 없다 - 이야기로 풀어 쓴 경전 에세이
이미령 지음 / 담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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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인생은 없다>는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불교경전을 체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 낸 경전 에세이다. 저자는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전공하였다.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경전이 자신에게는 재밌게 느껴진다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로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경전 속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는 경전 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이력 중에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고익진 교수님에게 사사'라는 것이다. 과거 도올 선생이 고익진 교수를 최고의 불교학자로 소개 했는데 그때 고익진 교수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 고익진 교수가 쓴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도 소개되었는데 그 책을 읽어보고 싶어 찾았으나 오래전에 절판되어 읽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실력있는 스승에게 배운 작가라니 뭔가 더 기대 되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소위 바이블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글고 딱딱하고 말도 어렵고 어떨 때는 허풍도 이런 허풍이 있나 싶기도 하고 이해도 잘 안된다. 이는 성경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불경이든, 성경이든 '강해', '이해' 라는 꼬리가 달린 주석집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그런 책 조차도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이 책은 여러 경전에서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들을 모아 피부에 와닿는 교훈들을 '채집'해 놓았다. 그래서 저자는 일반인들이 '만만하게' 읽을 수 있도록 책을 만들었다. 하지만 책이 주는 교훈만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또 이미 불교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할 지라도 새삼 반짝이는 일깨움을 느껴 볼 수 있는 책이다. 좋은 책, 좋은 글은 볼 때마다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


이 책을 읽으며 인용된 경전을 세어 보았다. 상윳따 니까야, 디가 니까야, 숫따니빠따, 맛지마 니까야, 살레야카 숫따, 앙굿따라 니까야, 법구경, 대반열반경, 불설마하가섭도빈모경, 대방등대집경, 증일아함경, 승가나찰소집경, 본생경(자타카), 불본행집경, 출요경, 잡보장경, 부사의광보살소설경, 불설이수경, 수행본기경... 여기에 적지 않은 경들도 더 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 출저가 되는 경전을 직접 찾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저 중 <대반열반경>은 제목 그대로 열반, 부처님의 마지막 이야기가 담긴 경전인데, 죽음 앞에선 한 성인과 그 옆을 지키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대반열반경>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다른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이젠 내용을 좀 살펴보자. 무소유에 대한 이야기에서 '탐욕이란 것은 거창하고 값비싼 것을 바라는 욕심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버리지 못하는 마음, 무엇이든 채워 넣으려는 마음이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욕심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마음'만 생각하기 쉽지만 '버리지 못하는 마음 또한 욕심'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다못해 이미 문닫아버린 동네 치킨집의 쿠폰도 시원하게 버리지 못하더라는 이야기는 나를 뜨끔하게 했다. 나도 뭔가를 잘 버리질 못한다. 최근들어 집 안의 불필요한 짐을 줄이고 단조롭게 만드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도 그런 가치에 동의하여 불필요한 것들은 나눠주고 쓰임새가 없는 것들을 버리려고도 하지만, 참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느낀다. 이는 물질적인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에서도 적용된다. 마음 속에 꿈쳐둔 원망, 서운함, 분노, 미움 같은 것들도 '미니멀라이즈'되어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물질)부터 하나씩 비워내는 연습을 해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번뇌)도 하나씩 비워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부처님의 이복동생인 난다의 깨달음 이야기도 영원한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여기서 난다를 혹 아난다와 헷갈리면 안된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출가하여 십대 제자 중 한사람이 되었으며, 55세의 부처님이 80세 열반에 들기까지 곁에서 시자로 모신 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반열반경>에서도 등장한다. 불교경전의 시작은 항상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여시아문)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내(아)가 들었다고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아난다'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아난다가 아니라 '난다'라는 스님의 이야기인데, 난다는 부처님의 이복동생이다. 참고로 밝히면 부처님의 이복형제를 포함해서 사촌형제들까지 형제랑 형제는 시점만 다르지 다 출가한다. 그는 천상의 선녀가 내새에 그가 태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로지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속물 수행자'였다. 하지만 어느날 지옥에서도 그를 위해 불가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충격을 받는다. 현세에 지은 복으로 죽어 천상에 태어나지만 좋은 복이 다하고 나면 다시 지옥에서 태어나 지은 죄값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천상에 태어날 것만 생각했지 그 복이 소진되면 지옥에 갈 것은 생각을 못한 것이다. 결국 행복이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고 유한하다는 이야기다.


이는 책에 실려있는 공덕천과 흑암천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쾌락과 즐거움을 상징하는 공덕천과 괴로움과 불행을 상징하는 흑암천은 늘 함께 다닌다는 것이다. 동전의 앞면만 취하고 뒷면은 버릴 수 없듯이 항상 행과 불행은 함께 하는 것이다. 따라서 즐거움에서 곧 괴로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즐거움이 다하면 곧 괴로움이 올 것임을 알면 좋은 일 앞에서도 오만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나쁜 일 앞에서도 슬픔에 빠져 허우덕 거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평안 만이 영원한 행복 가져다 주는 열쇠가 된다.


화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가 화가 맛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이와 관련하여 '분노의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는 꿀이 묻어 있습니다'라고 하셨단다. 화를 낼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것이 쉽고 당장 시원하다. 이것이 붓다가 말하는 꿀이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결과는 후회와 손해로 돌아온다. 이것이 독인 것이다. 꿀과 독은 우리를 중독시킨다. 화를 내는 것을 꿀이 묻어 있지만 뿌리엔 독이 있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 재치있으면서도 공감간다. 그리고 분노를 죽이면 슬프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분노든 슬픔이든 그 뿌리는 뜻대로 되지 않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하나만 해결하면 나머지도 자연히 해결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성자의 일곱가지 재물(칠성재)과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일곱가지(무재칠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경전에는 마음의 작용과 삶의 이치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현실적인 이야기도 담겨있다.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목련존자가 졸음에 빠지자 부처님이 졸음을 이기는 법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잡생각에 빠지면 졸음이 온다며 잡념을 버리라는 말씀이나 세수하고 귀를 지압하고 걸으라는 현실적인 팁도 나온다. 그 중에서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라는 충고는 낭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또한 말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바른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에 맞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실이고 진실하고 듣는 사람에게도 유익하고 듣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때가 아니면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그 때라는 것이 언제이냐는 생각이 들텐데, 이 부분에서 '아' 하는 소리가 나와버렸다. 바로 그 때란 '듣는 사람이 들으려고 할 때,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일 때'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제 때'를 위한 기다림이 없다면 무용을 넘어 손해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래, 잊지말자.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때에 맞는 말을 해야하는 것이다.


경전에 있는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 사이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라 유혹에 대한 절제가 어렵더라는 말도 공감간다. 어떤 선택을 할 때 나름 잘 한다고 했는데 그 결과가 다른 이에게 손해를 끼치고 결국에는 나에게도 불이익이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습관이란 참으로 무섭다. 또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그렇게 후회해놓고 과거에 어리석은 선택을 똑같이 하곤 한다. 그렇기 늘 어리석은 선택의 반복을 막고 유혹에 절제하는 것을 연습하고 훈련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가 참선, 명상일 것이다. 여기서도 경전에 실린 참선에 대한 부처님 말씀이 나온다. "참선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참선으로 온갖 잡념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했지만 흔히 사람들은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참선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선후가 바뀐 것이다. 참선을 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이 참선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런 식의 화법이 마음에 든다. 조금 확대해 볼까. 사람들은 흔히들 종교에 대해 그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어리석음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나아가 타인을 구원하는 것이 믿음이다. 즉 그러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그리되는 것이다.


불교경전을 다룬 것이라, 종교적인 이유로 불편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알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무슨 종교가 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단순히 2500년 전 살았던 한 성인의 보편적이고 일반론적인 삶에 대한 지혜만 있을 뿐이다. 어떠한 종교적 강요도, 허황된 사후 세계의 약속도 없다. 대단한 종교적 비밀이나 기복적 횡재를 바라고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시시하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던가 돌아보게 해준다.



개인적으로 나는 종교와 관련된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다. 고백하자면 한번 씩 그런 생각도 든다. 다 뻔한 좋은 말과 바이블에 나오는 명구절을 돌려막기 하듯 채운 내용에 식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느껴질 때 나를 돌아보면 대게 내 마음이 뭔가 삐뚤어져 있다. 그런 시기에 나는 사람들에게도 예민하게 대하고 생각도 부정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 그랬다. 술은 기쁠 때 마시면 기쁜 맛이나고 슬플 때 마시면 슬픈 맛이 난다고. 이런 책도 그와 같아서 거울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을 읽으며 혹 기분이 좋지 않거든 책이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뭔가 그것을 야기하는 원인이 있지는 않나 살펴보면 미쳐 몰랐던 중요한 것을 발견할수도 있다. 나도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사소한 갈등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고 식상하더라도 엄마 잔소리 치고 틀린 말은 없다. 그리고 엄마의 잔소리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을 때 더 듣기 싫은 법이다. 여러 경전을 현대인의 이야기로 쉽게 풀어 쓴 이 책을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아보면 어떨까. 우리 각자의 인생은 시시하지 않고 소중하니까.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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