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랑 노랑 - 시인 오은, 그림을 가지고 놀다!
오은 지음 / 난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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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그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도무지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느끼게 해준다. 표정 하나로 온 우주를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 존재가 온 우주이듯이. 여러 종류의 그림책을 읽었는데, '색'그림책은 처음이었다. 색으로 그림들을 나누고,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색과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책.

 

 

Red

 이 요상한 책을 처음에는 잘 집중을 못했었다. 첫 페이지엔 앙리 마티스의 <붉은 조화> 그림이 떡하니 있고, '생기 있게 식탁을 차리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인생의 정점을 표현하는 레드라는 색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다음엔 활활 타올랐다가 광기에 휩싸였다가 급기야는 붉은 열정으로 댄스, 댄스, 댄스, 춤을 추고 있었다.

 

 나에게도 레드로 가득했던 시간들이 있었을까. 빨강을 떠올리면 주저없이 떠오르는 크리스마스. 너는 손수 뜨개질을 했다며 동그란 통에 말아넣어 선물해 주었던 빨간 목도리. 난 그걸 받고도 시무룩했고, 너는 얼른 목에 둘러 보라고 손짓했고, 그것이 싫어 내팽겨쳤다가 데굴데굴 굴러가버린 빨간 목도리. 마치 올이 풀린 것처럼 너의 마음도 비실비실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던. 마음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뚝뚝 눈물을 흘렸던 그 때. 아픈 줄도 모르고 건드렸다가 지어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던 철없고 이기적이었던 나 그리고 한없이 너그럽고 레드처럼 따뜻했던 너.

 

 

Blue

 메리 커셋의 <파란 안락의자의 소녀>를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나른한 자세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소녀가 응시하고 있는 건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는 고양이가 아니다. 이곳이 아닌 저곳. 다른 세계다. 소녀가 꿈꾸는 세계다. 꿈꾸기 위해 소녀에게 필요한 건 단지 공간을 가득 채울 파란 안락의자였다. 나는 얼른 소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세계에 가닿는다. 꿈을 꾼다. 내 꿈이 닿는 어떤 지점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나른해진다. 햇살이 비춰지고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좋다. 나는 소녀가 되고, 소녀는 내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되었다가 타인이 되었다가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나는 그 파란 의자를 시작으로 블루의 세계 속으로, 듬뿍 빠져 들었다. 오은 시인이 그려낸 <파란색 크레파스로, 사랑해> 꼭지를 읽으며 눈물이 났다. 다섯 살이 되었다가 일곱 살이 되었다가 열여덟, 스물일곱이 되면서 순간순간 어떤 때를 그려놓았는데, 난 그의 시선을 따라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왔다가 하다가 그만 슬픔이 목에 걸려 버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고 있었을 때

.......

유혹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때

.......

상처를 감당하는 게

삶의 커다란 부분임을 깨달았을 때

.............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을 때

.........

몇 개의 달성되지 않은 다짐들이 튀어나왔을 때

그것들이 살아야 할 이유로 둔갑했을 때

........

파랗게, 파랗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로 시퍼렇게 아득해질 때 (p.88- 92) 

 

 

푸르스름한 공기가 번진 저녁. 조금씩 더욱 짙어져 검푸른 저녁하늘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그 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색이 파랑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하늘에 보이는 그 짙은 파랑. 저녁과 밤 사이 보이는 그 짙은 파랑은 늘 새초롬한 달과 함께여서 더 좋았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저녁이면, 만나고 싶지만 보지 못하는 밤이면 언제나 그렇게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 봐 주는. 그래서 덜 외롭다여겼던 그런 저녁과 밤, 밤과 저녁의 사이가 있었다.

 

 

 Yellow

 빈센트 반 고흐 <수확하는 사람>. 노랑의 반란 같다. 금세라도 모든 일렁임이 내게로 밀물처럼 쳐들어 올 것 같은 느낌. 고흐의 그림은 언제나 떨림을 간직하고 있다.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속이 울렁거리고 세계가 흔들린다. 입가엔 미소가 눈가엔 눈물이 맺힌다. 아름다운 것들은 늘 그렇게 떨림으로 다가온다. 환한 빛으로 다가오는 노랑. 너무도 눈이 부셔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고, 만지면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같은 그림 오딜롱 르동의 <베아트리체>. 시인은 어느새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한 남성으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구애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랑으로 눈 먼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의 갈구를 노랑으로 표현한다.

 

 노란색 알전구 하나로 작은 상에 환한 빛을 뿌린다. 잘 구워진 고등어 하나에 둘러싸인 밥그릇들이 반질거린다. 그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한 숟갈 뜨고, 고기 한 점 먹고, 벌레 한 마리 잡고, 환하게 웃고,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내내 행복했으면 싶었던 어떤 때를 떠올렸다.

 

White

 알프레드 시슬레의 <루브시엔느의 설경>.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하나의 길이 나있고, 그 길로 검정색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멀리 사라져 가고 있다. 눈은 수북히 쌓이고, 바람 한 점 없는 겨울이다.

 

 봄이 올 때까지, 오늘이라는 달이 저물 때까지, 내일이라는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내 몸에서 울컥 어떤 물질이 치솟을 때까지, 그 물질로 두 손을 바득바득 씻을 때까지. (p.161)

 

 누군가 흰 색은 모든 걸 품고 있는 색이라 했다. 또 누군가는 흰색은 우유부단한 색이라고도 했다. 모든 색이 숨어 있을 것도 같고, 누군가 건드리면 금세 다른 색으로 물들어 버릴 것도 같은 색. 하양. 그런 하양이 난 좋다. 금방 더럽혀지더라도 흰색 티셔츠가 좋고, 청소하기 힘들고 지저분해지더라도 눈이 수북히 내리고 또 내리는 것이 좋다. 온 세상이 하얗게 된다면 더욱 좋다. 그냥 그렇게 하얗게 하얗게 하얘지고 나면 내 마음도 깨끗해질 것만 같다. 눈 오는 날엔 왠지 눈물조차도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눈이 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일지도.

 

 

Green

 움베르토 보초니의 <마음의 상태 - 떠나는 사람들>. 그의 거친 붓질을 오은 시인은 '숲은 달린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림은 곧 그에 의해 시가 되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혼자인데도 쓸쓸하지 않았다

나에게만 중요한 중간이었고,

나는 조금 이기적으로 이기죽거렸다(p.276)

 

바람을 이기고 소용돌이를 창조하는 것

나무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우뚝 서는 것

남들이 감히 꿈꾸지 못한 곳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p.279)

 

 질주하는 숲속 풍경을 바라보고 그려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초록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속력으로 어디론가 내달린 적은 있었는지, 어떤 곳으로 휩쓸려 간 적은 있었는지, 자연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는 것들이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새벽 속으로 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Black

 에드바르드 뭉크의 <키스>. 이 키스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키스가 그렇듯이. 다비스 시케이로스의 <절규의 메아리>. 이토록 처절한 슬픔이 있을까. 커다란 아이얼굴의 이마주름이 일그러지고 그 아이 입으로 또다른 아이가 튀어나온다. 주변은 캐캐한 매연과 쓰레기더미. 블랙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 같다.

 

 

 블랙하면 대부분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에게 블랙은 어둠과도 같은 의미다. 그러나 내겐 부정과 긍정이 함께 온다. 처음으로 느꼈던 따뜻한 어둠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울고 울었을, 혹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바다였다. 그 바다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완벽히 어둠이 찾아왔을 때, 주변에 있는 사물과 사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들리는 건 밀려갔다가 쓸려오는 파도소리 뿐이었다. 그게 난 좋았다. 어둠에 휘감겨 포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만큼은 완벽하게 외롭지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어둠 속에서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그 어둠이 지독히 부정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가족들을 기다릴 때, 깜깜한 집에서는 바람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둔 밤 골목길에서 뒤따라 오는 사내의 구두소리, 먹이를 찾아 쓰레기를 뒤지러 다니는 밤의 여왕 검정 고양이까지..... 색 하나에도 이렇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공존하는 듯하다.

 

너와 나 함께 놀다!

 책을 읽는 동안 색과 그림이라는 조합으로 한 편의 시가, 동화가, 인터뷰가 되기도 했고, 그림 속에 주인공이 되었다가 그림 속에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가 되었다가 그림 자체가 되었다가 화가가 되었다가 했던 오은 시인의 상상력과 표현력에 놀라고 감탄했다. 또한 마지막 책을 덮었을 때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가능성까지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가 차가웠다가 뜨거워졌다가 했던, 고민이 떠오르면 펜을 들고 공부하듯 읽었다가 어느 새 빠져들어 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색과 그림을 통해 시와 이야기를 통해 나는 내 마음 언저리에 있던, 언젠가 꽁꽁 숨겨두었던 아픔들을 치유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따뜻했고 한편으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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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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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편지를 쓰다_

                                                                     장은진,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늘 편지가 쓰고 싶어진다. 아직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궁금증과 설렘을 전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뻔한 말도 편지로 옮겨쓰고 나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고, 내 마음을 더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도 같다.  

 

 

#1. 살아있다는 건 길 위에 서 있다는 것_ 삶

 

'나'는 모텔을 전전하는 길 위 생활 여행자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와조'라는 개와 동반하는 여행이라는 사실. 그들은 벌써 여행 자체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오다가다 사람들을 만나고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이름 대신 숫자로 그에게 기억된다. 그리고 매일 그는 모텔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우체통에 텅, 하고 넣을 때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집에 편지가 왔는지 묻는다. 늘 대답은 한결같다.

 

오늘,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P.39

 

자신의 집에 한통의 편지라도 도착하는 날이 그에겐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대답은 반복되는 녹음 테이프처럼 같았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갈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2. 죽음은 예고된 순간조차 갑작스러운 것_ 삶과 죽음 사이

 

모텔을 전전하는 '나'와 와조에게 관심을 보이는 751. 751은 『치약과 비누』라는 소설을 쓴 작가이고, 자신의 책을 어디서든 판매하고 다니는 여성이다. 처음엔 '나'는 자신을 귀찮게만 하던 751이 왠지 모르게 싫고 피하고 싶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털어놓게 되는 사람이 바로 751이고, 어느새 함께라는 것이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혼자서 생활하는 데 익숙한 두 사람이 만나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유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751의 책을 낭독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751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 '나'를 혼란에 빠뜨린, 편지 한통만을 남긴 채 떠나버린 옛 애인과 마주친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도려내야만 했던 옛 애인과의 조우는 지난 시간들을 다시금 기억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분명한 건 옛날에 내가 느꼈던 그런 둘의 느낌은 아니란 거야."

"어떤 느낌인데요?"

"그냥 혼자인 느낌."   P.159

 

 

늦은 시각, 꽉 들어찬 모텔에 빈 방이 없는 관계로 예외적으로 가게 된 고시원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골아 떨어진 '나'를 와조는 급히 깨우고, 751과 '나', 와조는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 방 한 칸 사이사이에서 삶과 죽음은 이렇게 우리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잠속을 헤매고 있는 '나'를 깨워 화재로부터 구한 것은 그의 동반자 와조였다. 와조는 끝까지 '나'를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점차 에너지는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3. 편지를 입에 넣지 못한 차갑고 딱딱한 텅 빈 우편함 _ 죽음

 

'나'는 당연하게도 집에 편지가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도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물론 병든 와조 때문이었다. 나이를 제법 먹은 데다 길 위에서의 생활이 녹록치 않았을 것이 분명한 와조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 삶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조부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날 한 줄짜리 이별 편지를 받은 것처럼. 편지를 기다리는 그에게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것처럼. 와조가 아픈만큼 자신도 여행을 지속시킬 힘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죽음은 그랬다. 정작 죽음이 필요한 사람에겐 더 큰 고통을 주고서 삶을 선물했다.

 

 

 

#4. 절벽 뿐인 낭떠러지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 삶은 반전처럼 환히 웃고 있다 _ 삶

 

집으로 돌아온 '나'. 화장실 문을 열자 똑.똑.똑. 수도꼭지에 물이 새고 있다. 약 3년 간 이렇게 물은 홀로 묵묵히 새어 나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지 하루만에 기다렸다는 듯 와조는 죽음을 맞이한다. 집에서 편히 눈을 감은 와조를 얕은 곳에 잘 묻는다. 3년 간의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 버텨낼 수 있었던 힘. 그 힘은 와조와 함께 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옆집 아주머니의 부산스런 발걸음과 수다가 들려온다. 그는 들려오는 소리를 의미로 해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하다. 그리고 아차, 하며 옆집 아주머니가 나갔다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에게 내미는 커다란 박스 하나. 그속엔 그동안 오지 않았다고 믿었던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처럼 축복처럼 자신에게 내려앉은 편지들을 보며 3년 간의 시간들이 눈물처럼 터져나왔다.

 

이 편지 속에 다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 들어 있다. 이 사람들이 보내준 편지에 답장만 쓰고 지내도 평생을 충분히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신기한 건 편지를 읽고 나서부터 발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앞으로 내게 오는 편지만 있다면 발작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 사람뿐이라 하더라도. P.277

 

 

#5. 마주해야 할 삶의 진실은 결국엔 자신의 몫이다 _ 죽음

 

3년 간 외면했던,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믿고 싶지 않은 그 진실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길 위에서 그 삶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그는 걷고 또 걷고, 편지를 쓰고 또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나고를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언제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에겐 가족이 없다.

 

그가 돌아온 곳은 북적대는, 일상에 바쁜 가족들이 귀가하여 돌아오는 집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집이다. 가족들의 죽음.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어서 소중한지 잘 몰랐던 가족들의 죽음.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피부처럼 살갗처럼 붙어있는 것을 떼어내는 고통이 뒤따랐으리라.

 

조부의 장례를 치르러 장지로 떠나던 날, 등기 우편으로 날아온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통보편지를 받는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편지에도 일방통행이 있다는 것을. P.211 때론 단 한 줄의 문장이 날카로운 칼보다 더 깊고 아프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잃는 것은 죽은 사람을 잃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함께 탑승한 자동차에서 내려 '나'는 여자친구를 찾기 위해 헤맨다.

 

그리고 그 날.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이를 찾아 헤매던 그 시각. 가족들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저 멀리, 저 높은 곳으로 흩날리듯 먼저처럼 사라지고 만다.

 

 

#6. 나는 오늘도 너에게 편지를 쓴다 _ 삶과 죽음을 잇는 '기억' 으로부터

 

우리는 각기 다른 길 위에 서 있다. 다른 곳을 바라 보거나 다른 곳을 향해 가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 진실을 마주하며 우리는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누군가에게 매일 편지를 쓰기로 선택했다. 그 행위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될 것이다. 그 통로에서 때론 빛을, 때론 어둠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알록달록 다른 색으로 물들어진 자신의 삶의 광채를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 사람들은 오래오래 죽지 않고 그의 가슴 속에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 그가 숫자로 명명한 사람들은 숫자의 특징처럼 끝없이 계속 더해져 갈 것이고, 반복되거나 겹쳐지는 일 없이 명확하고 개성있게 기억될 것이다. 기억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살아 있다. 기억을 불러오는 순간 우리는 보고 싶은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 마치 내일이라도 당장 볼 수 있을 것처럼 일상을 이야기하고 편지를 쓴다.   

 

 

#7. 삶과 맞바꾸듯 편지에 집어 넣는 일상 속에서 내게 남겨지는 것_ 새콤달콤한 여운

 

나는 줄곧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왔다. 홀로 있는 시간이면 늘 누군가가 떠올랐고, 그 시간 속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나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었다. 내 시간을 곱게 말아 우체통 속에 툭, 하고 집어 넣으면 그 날의 공기와 바람, 햇살이 어느 날 나의 수신인에게 반짝 가닿으리라 믿으면서.

 

 

편지란 어쩌면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떠나 보내기 위한 것일까. 내 안에 혹은 내 곁에 나인듯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들을 언어라는 형식으로 내보내는 일. 슬픔, 기쁨, 아픔, 설렘, 고통, 즐거움… 모든 감정들을 편지 속에 털어 놓고 나면 묘하게도 내용 대신 어떤 느낌만이 내 속에 잔잔히 남겨진다. 무거운 진실들도 그렇게 언어의 옷을 입혀 내보내면 늘 가볍게 털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편지지에 장 마다 번호를 매기고 봉투 크기에 맞게 고이 접어 봉투 속에 쏘옥 집어 넣는다. 풀로 깨끗하게 봉하고 우표를 오른쪽 상단에 붙여 넣는다. 편지를 가슴에 한 번 가득 안고 행운을 빌며 빨간 우체통에 퐁당 집어 넣는다. 편지가 도착할 때 즈음엔 내용은 모두 잊혀지고 보내는 순간의 기억만 남는다. 그 여운으로, 그 기억으로 새로운 바람을 느끼는 오늘을 맞이한다.

 

 

 

책을 다 읽고 나는 '아무도 편지 하지 않다'의 제목을 마음으로 '모두가 편지 하다'라고 바꾸어 불러 본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우편함에 대롱대롱 줄지어 편지들이 늘어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지금. 느리게 가지만 아주 오랫동안 마음 속을 차지하게 되는 손편지로 풍성한 11월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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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전.숙영낭자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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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문학'을 얼마만에 접해 봤는지 눈을 굴려 생각해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한 번도 들여다 본적이 없었다. 번뜩 생각나는 거라고는 심청전, 홍길동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기출시험문제를 풀면서 접한 어지럽게 흩어진 한자와 고어들이 상형문자처럼 내 앞에 펼쳐졌을 때, 내 오른손은 연필로 그 문장들을 밑줄 그으며 따라가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잡념으로 그득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왜 나는 이 문장을 해독하지 못하는가, 하며. 과연 나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인가. 문학을 문학으로 대하지 못하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고전이 내 속에 스며들 틈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멀어져간 고전문학이 다시 내게로 찾아온 건 십년도 더 지난 지금, 아무 거리낌없이 책을 넘기며 다음 장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 참 오래 살고 볼일이란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애정소설'이라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 책엔 '숙향전'과 '숙영낭자전' 두 가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숙향전은 꽤나 긴 이야기로 그녀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때론 버겁고, 때론 힘겹고, 지치기도 한 온갖 역경과 시련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고, 숙영낭자전은 후딱 해치울 수 있을만큼 짧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두 작품 모두 비슷한 구성과 짜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부부가 나와 간절히 빌면 갑작스레 아내에게 태기가 생기고 아이가 태어난다. 그들은 천상에서 죄를 짓고 인간세계에 내려와 여러가지 액운들을 거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바로 천생연분인 사람을 만나는 것. 그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죽기 살기로 투쟁해야지만 그 사랑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사랑을 얻는 게 전부는 아니다. 사랑을 얻고 나서도 다시 고난은 시작되니까. 그리고 그 고난의 끝이 사랑이든 비극이든 자신의 본분을 다 하고 나면 다시 천상으로 가게 된다. 인간 세상에서 해피엔딩이든 언해피엔딩이든 상관없이 하늘에서의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1. 이선-선군. 당신이 원하는 남성상은?

 

 숙향의 남자 이선과 숙영낭자의 남자 선군. 그 두 인물을 살펴보자.

 

 

 이선은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좋은 집안, 좋은 용모, 대단한 재주까지 어느 하나 모자라는 것이 없는 이선. 그는 운명의 여인 숙향을 찾기 위해 그녀가 지나온 모든 길을 하나씩 밟아 찾아 헤맨다.

 

이선이 한 살 때부터 걷기 시작하고 두 살 때에는 말을 배웠는데, 말주변이 소진과 장의만큼이나 뛰어났다. 네 살 때에는 글을 배워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다섯 살 때에는 처음 본 글도 또렷하게 외웠고, 일곱 살 때에는 천하의 문장가나 명필도 이선을 따를 수 없었다. p.71.72

 

 운명의 여인 '숙향'과 연을 맺은 후에는 자신에게 또다른 운명의 여인이 한 명(천상에서 자신의 아내였던 설중매) 더 있다는 것을 황태후의 약을 구하러 다니며 알게 된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설중매를 둘째 부인으로 받아들인다.

 

 

 선군 역시 좋은 집안에 좋은 용모, 좋은 재주를 지녔다.

 

얼굴은 관옥 같고 울음소리는 신선처럼 맑고 깨끗한지라.

... 선군이 점점 자라매 골격이 빼어나고 온갖 일에 모르는 것이 없으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칭찬했다. 선군이 열다섯 살이 되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군은 틀림없는 천상의 선관이라" 하더라. p.214 

 

 

 하지만 선군은 숙영낭자 한 사람만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자신이 가진 재주는 있었지만 과거시험이나 지위, 권력 이러한 것들에 무심했다. 그의 소원은 한시라도 숙영낭자와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고, 늘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숙영낭자를 보지 못해 앓아 누운 것도 그의 사랑의 열병이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뻗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보기 싫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간 것도 숙영낭자의 청이었기 때문에 떠밀리듯 간 것이었다. 가는 길에 묵었던 곳에서 다시 돌아와 숙영낭자와 속삭이고 간 것도, 숙영낭자를 한시라도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펄펄 끓는 사랑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일 중 무얼 선택할래?"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 여자들 대부분은 '사랑'을 선택한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 대부분은 '일'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을 선택한 남자들이 대답한다.  

"사랑을 선택했더니 여자가 떠나더라."  

 

 정말일까? 조선시대라는 상황에서 두 부인을 둘 수 있는 남자들에겐 감격스런 제도가 구비되어 있고, 양반인 남자들이 신분도 집안도 알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 자체는 백마 탄 왕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끝내 두 부인을 마다하고, 단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한, 선군의 펄펄 끓는 사랑에, 장원급제할 실력인데도 '사랑'을 택하고팠던 선군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다.  

 

 

2. 숙향-숙영낭자에겐 그들을 시기하는 이가 있었으니! 미美도 권력이다!

 

 짙은 향내가 번지고, 하얀 백옥 같은 얼굴. 누구나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고, 반하게 되는 그러한 얼굴.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천하고, 더럽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진 그녀들이 보고 나면 모두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향수라도 흡입한듯 정신을 못 차리고 그녀들에게 빠져들게 된다. 반대하던 사람들도 모두 운명이라며 받아들이게 되고,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호통 치던 부모도 그쯤에선 반대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 그 시대에도, 지금 이 시대에도 '미美'는 권력이다. 그녀들은 가진 것 없고,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그 시대에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 있었지만 천상의 선관이라 할 수 있는 이선과 선군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는다. 만약 그들이 가진 재주는 탁월하다 하더라도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천상에서 선녀였다는 것.

 

 그렇다면 미를 갖추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두 인물을 살펴보면 숙향을 질투하여 이간질하는 사향을 살펴볼 수 있다. 진작에 그 집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향은 몰래 그 집에 있는 것들을 빼내어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만약 그곳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그렇듯 주변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 시기와 질투를 부른다. 선군을 좋아했던 매월이도 그렇다. 자신의 청을 거절한 선군이 숙영낭자만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얄미웠겠는가. 그렇다고 그녀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늘 2인자로 남는, 주인공 대신 홀로 뒤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가슴 앓이를 하는 '미'라는 권력을 갖추지 못한 이가 안타깝게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 지지리 복도 없지! 이게 과연 운명이란 말인가?

 

 전쟁 중에 고아가 된 숙향. 그녀는 다섯가지 액운을 가지고 태어났다. 열다섯까지는 그 액운을 피할 수 없다. 그 액운은 하나같이 죽을 액이다. 아무리 제 운명을 익히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런 일이 닥치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을 것이다. 차라리 죽어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푸념도 들 것이다. 천생연분이 있으면 뭘하나, 자신이 힘겹게 쫓아다니며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동안은 그와 만날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데!

 

 

 숙영낭자는 자신의 천생연분이 다른 이와 혼인하려는 걸 알고 만류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다. 선군의 사랑은 지극했으나 그의 사랑이 오히려 해가 되어 버린다. 간통죄로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 썼으니 말이다. 거기다 제대로 된 혼인도 올리지 않은 채로 그 선군의 아내가 되었는데, 두 아이에게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을 못한 채로 자결하게 된다. 자신의 몸에 칼을 꽂은 채로 말이다. 그것만이 자신에게 던져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장담하듯이. 피눈물로 흘러넘치는 인간세상에는 더이상 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녀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4. 환상의 세계는 현실을 잘 살아내기 위한 시원한 숨구멍

 

 조선 시대, 그 당시의 사회 현실은 신분 차별과 부조리한 관습으로 하층민의 인격을 무시하고 남녀의 진정한 사랑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만약 내가 그 당시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면, 신분이 낮은 여자였다면 더더욱 나는 다른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동안만큼은 웃을 수 있으니까. 내게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은 어쩌면 천상에서 지은 나의 죄 때문이라면 그 죄가 다 소멸하고 나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늘나라로 가서 아무런 차별 없는 세상 속에서 화사하게 하하호호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거기다 나는 천상에서 신선이자 월궁선녀인 것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훨훨 날아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에 그 현실을 해결해주는 책보다 내 마음을 달달하게 녹여주는 문학을 찾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거란 믿음. 지금은 찌질하고 구질구질하지만 언젠간 화사하고 밝게 빛날 거란 꿈을 꾸는 것이다. 숙향전과 숙영낭자전에서 차르르 펼쳐지는 환상성은 팍팍한 현실에의 도피가 아닌 현실을 잘 살아가기 위한 숨통이 아니었을까.

 

 

5. 운명이란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

 

 나에게도 운명이 있을까. 어쩌면 내 손바닥에 자글자글 생겨난 잔주름이, 쓱쓱 그어진 손금이 내 운명을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년이면 으레 보게 되는 점집에서처럼 우리가 태어난 연월일시인 '사주'가 이미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삶을 그 운명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운명 위에 또다른 삶을 개척할 것인가.

 

 숙향과 숙영낭자전을 읽어 내려가며 그들의 운명은 어쩌면 정해진 대로 흐르듯 전개 되어 갔다. 그래서 조금은 불만도 있었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하고. 그러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확고한 믿음과 끈기는 어쩌면 그들의 운명길을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운명이 그렇게 정해 놓아도 중간에 뭔가에 미혹되거나 흔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여성에게만 정절이 요구되는 것 또한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운명을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사주가 있듯이 물건에게도 그들의 사주인 바코드가 있다. 그러나 그 바코드가 그 물건의 운명을 결정 짓진 않는다. 그들이 어떤 주인에게 가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바뀐다. 우리들의 손금이 해가 거듭될 수록 달라지는 것과 같이. 운명이란 자신의 행동에 따라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변해갈 내 운명을 믿어보기로 한다. 조금씩 무수히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운명 속에 아마 숙향과 숙영낭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다. 짙은 향내를 풍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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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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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  

 

 

  '이 일' 인해 관계가 부서지고 망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일은 분명 그들의 잘못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엄마가 있다. 어쩌면 그들도 힘들었을텐데 내치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아빠가 있다. 친엄마가 아닌 사람에게 차별과 멸시를 받은 입양한 여자 아이가 있고, 입양한 여자 아이를 자신의 엄마처럼 함부로 대한 동갑내기 딸도 있다. 입양한 여자 아이를 자신의 친동생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대해준 오빠와 언니가 있고, 그것을 질투와 미움으로 바라보는 동갑내기 동생도 있다. 동성친구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한 여자 아이가 있고, 세상의 숫자와 영어 단어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 나간다.

 

 각 챕터마다 한 사람의 시선으로 내면까지 보여주는 글쓰기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속도감 있게 그들의 내면을 따라가 읽었다. 그들의 내면을 지켜보는 일은, 나의 내면을 지켜보는 일처럼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웠다. 우리가 확신하는 일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다. 추측할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단호히 잘라내고 끊어낸다. 무엇이 옳은지는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대변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딱딱하고 어색한 엄마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내 모든 마음을 털어 놓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A4 용지에 빽빽하게 3장 가량 편지를 썼다. 나는 그 편지를 쓰며 때론 웃고, 때론 울고, 때로 뭔가가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편지를 엄마에게 줄 때, 나는 대단한 용기를 발휘해야 했다. 나는 그에 대한 결과로 엄마가 내 손을 붙잡고는 참 많이 힘들었지, 하며 나를 꽉 안아주는 모습을 아주 여러 차례 머릿 속으로 반복 재생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정말 너무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결과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건넨 건 싸늘한 표정과 한 마디의 말이었다.

 

"넌 정말 별걸 다 기억하는구나. 이젠 그만 잊어도 될 것을. 애가 왜 그리도 특이한지...쯧."

 

 눈물과 포옹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나의 상상은 산산히 부서져 내렸고,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힘들었던 시간만큼 엄마는 엄마가 가진 삶의 무게만으로도 버거워 겨우 살아내고 있었다는 것을. 각자의 상황을 누구에게 토로한다고 한들 관계는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표현해주는 것. 섭섭한 일보다는 당신이 있어서 좋았던 일, 여전히 함께 해서 좋은 것들을 끊임없이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모든 것을 털어 놓는 일과 무작정 솔직해지는 일은 항상 터무니 없는 결과와 서로에게 또다른 상처를 남길 뿐이었다.

 

 

 완벽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운명처럼 거울을 보듯 누군가가 내 마음을 투명하게 헤아릴 때가 있다. 그것은 서로의 상처를 보았을 때다. 서로의 어둠을 보았을 때다. 아마 책 속에 나온 두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 비난을 던지고 싶지 않다. 그들의 선택이 누군가의 마음을 닫게 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겐 그것이 살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어찌됐든 살아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금기시 되는 말처럼 '그 일'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맨 마지막에 되어서야 그 일이 무슨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책 속에서 확인하시길.

 

아, 나는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203

 

 인간이란 존재는 죽음을 앞에서도 가장 반짝이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의 죽음이 또다른 생명을 부르는 것처럼.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나는 그저 함께 하는 사람이 여전히 그대로 내 곁에 남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밑줄 긋기>

 

 물론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도 재미만 들리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버릇을 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연습이 귀찮다. 새것에 적응하는 데 난 늘 어려움을 겪어왔다. 진취성은 나와 거리가 있다. 사람들의 행태, 생김새, 옷 색깔, 대화에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책을 선호한다. -9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써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12

 

 어느 쪽이든, 책과 삶을 포개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술 마실 때를 빼곤 오직 책 속에서만 어렵사리 생기를 유지하는 내 삶을 바스러뜨릴 수도 있는 짓이다. 나는 사람보다 책이 좋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12

 

 

 

 어쨌든 얼마 되지 않는 내 친구들은 거의가 술친구들이다. 그러나 그 친구들마저도 내가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 어쩌면 가장 가깝다 할 P마저도. 가족들에 대한 내 감정이 그렇듯. 그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대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그리 대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나를 진정으로 대하겠는가? -25

 

 

 황량한 문체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 내면이 황량해 보였고, 경쾌한 문체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 성품도 경쾌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다. 강건하리라 짐작했던 사람이 실제론 여린 경우도 있었고, 겸손하리라 건너짚었던 사람이 실제론 오만하기도 했다. -27

 

 

 

"세상에 금지돼 있는 건 없어요. 마셔도 되지요. 근데 오늘 술을 드시면, 치료기간이 두 배 이상 길어질 거예요. 저 같으면 완치될 때까지 술을 안 마실 겁니다." -34

 

 나는 술 없이는 낯선 사람과 얘기를 못 한다. 낮이든 밤이든. 남과 얘기하는 데 반드시 술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술 없이 얘길 나누는 것이 열없다. -34

 

 

 세상에 금지돼 있는 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해볼 필요는 없다. -36

 

 

 내가 속물인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속물이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처럼. 그러나 중간 규모의, 아니 작은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며 한세상 살아온 나는 신분의 힘이라는 걸, 계급의 힘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남에게 고개 숙이고 사는 인생이 얼마나 수모스러운지도 알고 있다. 내 나이가 되면 민형이도 그걸 깨달을까? 아니 그 아이는 이미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언젠가 민형이에게 그 얘길 노골적으로 꺼내자, 그 녀석은 오히려 "계속 공부를 하는 게 수모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알 듯도 싶었고 모를 듯도 싶었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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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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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_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아빠'란 존재에 대한 생각_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잠들기 전에 아빠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아빠는 늘 바빴다. 함께 놀 시간도 없었고, 함께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난 그런 의미에서 '바쁜' 사람이 싫었다. 난 이 다음에 결혼을 하면 나와 자주 이야기 할 수 있고, 결정적인 순간엔 일보다는 사랑을 택할 남자를 선택하고 싶었다.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살짝 스치듯 지나가는 마음이 아니다. 온전히 자신의 것들을 줄 수 있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누군가의 마음에 흠뻑 빠지고, 그 속에서 허우적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법.

 

 

언제든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자신을 만나야 한다고_

 

 어느 순간 여러 책을 만났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점점 내 자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내 속에 갇혀 나를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나 자신을 알아간다는 건,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의 밖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완벽하게 내 바깥에 타인으로 존재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건 아이러니 하게도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맡길 때라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를 알려면 나를 잊고 타인을 온전히 만나야 했고, 내 침몰했던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타인을 위해 내 온 힘을 쏟아야 함을 알았다.

 

 

리처드 노박에게 일어난 일_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된다. 도무지 자신에 대해 떠올려 봐도, 통증에 대해 떠올려 봐도 알 길이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지 또한 언제 시작되었는지. 기억도 사라지고, 존재도 사라지는 순간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911에 구조 요청을 한다. 금세 통증이 사라지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란 버터빛의 환한 도넛 가게를 발견하게 된다. 도무지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는 운명의 이끌림이 느껴진다. 인생은 때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압도 당한다. 그것은 아마 제 속에 운명을 되돌릴 방향키가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매일 그는 앤힐의 도넛 가게에 간다. 도넛 만드는 걸 진정으로 즐기는, 맛있는 도넛을 만들어서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부자라고 믿는 앤힐을 만난다.

 

 가족 모두에게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쓰지만 늘 불평만 되돌아오고, 자기 자신은 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생활에서 지친 신시아는 마트 농산물 코너에서 홀로 울고 있다. 그것을 본 노박은 그녀가 신경 쓰이고,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차를 몰고 가다가 앞차의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고, 트렁크에 납치된 여성을 구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이고, 행복인지를 알게 된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타인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쓸모 있고 기쁜 일인지를!

 

 

이 책이 내게 준 것들_

 

 나에게 좋은 책이란 정답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물론 정답을 알려주는 책은 없다. 내게 좋은 책이란 내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불러 일으켜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책 혹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세계 혹은 경험 속으로 나를 초대해 온전히 그것을 이해하고 느끼게 만들어 주는 책. 마지막으로 내게 좋은 책이란 평범하고 다 알 것 같은 내용이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큰 여운과 함께 새로운 생각들이 샘솟는 책. 보통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눈다. 세 가지 중에 하나인 경우에도 나는 꽤 만족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 세 가지가 잘 버무려진 책 같다. 다소 어지러운 감이 있어서 중간 부분에서는 집중력을 잃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아주 명료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상쾌한 그런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연결고리를 찾아서_

 

리처드와 신시아 (농산물 코너에서 울고 있던 한 여자)

리처드와 닉(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 아주 유명하지만 잠시 그 속을 떠나 있다)

리처드와 앤힐(도넛 가게 주인, 버터의 따뜻한 빛이 흐르는 도넛 가게!)

리처드와 벤(리처드의 아들, 리처드가 늘 함께 하고 싶어하던 아픔과 상처가 많은 존재)

리처드와 그의 아내(늘 바쁘고, 일이 많고, 잡념을 두려워하고, 쉴 틈을 주지 않는 여자)

 

 이렇게 연결 고리 속에 펼쳐진 그들의 대화와 그들의 상황들은 나를 때로 아프게 했고, 나를 되돌아 보게 했다. 모두가 너무도 다른 존재들이지만 모두가 원하는 건 평범한 관심이나 사랑일지도. 그들은 내색하든 내색하지 않든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존재다.

 

 

 

 

뒤죽박죽 정신없이 전개 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 분위기들을 한껏 느끼기 위해 내 기억을 연결_

 

 때로 소설 속에서 나의 기억이 폴폴 흘러간다. 그 상황, 그 분위기. 내가 느꼈던 그 순간과 닮았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어렴풋이 그들의 기분을 짐작해 본다.

 

 

 

 

 그는 유리창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너무 늦게서야 그것을 본다. 새의 폭격이다. 리처드와 새의 눈이 마주치고, 다름 순간 둔탁한 소리를 내며 새가 유리를 들이받는다. 바로 앞에서 백 퍼센트 살아 있던 존재가 유리를 때리고는 백 퍼센트 죽은 존재가 되어 땅에 떨어진다. 그는 부엌에 가서 커다란 국자를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가, 땅을 파고 새를 묻는다. 집 안으로 돌아가서 꽃을 가져다가 무덤 위에 놓는다. p.70

 

 

 고등학교 때, 한 학년 언니가 옥상에서 자살을 했다. 그녀는 한낮에 옥상에 올라가 뛰어 내렸고, 수업 시간에 잡념에 잠겨 칠판 대신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한 학생이 스치듯 추락하는 언니의 눈과 마주쳤다. 그날 이후, 그 눈을 본 학생은 반쯤 미쳐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얼마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던진다는 것이 때로 타인의 인생을 반쯤은 망가뜨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방향으로의 에너지를 뿜어낸다면 타인의 인생을 구제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새' 였기 때문에 그가 미치지 않고 묻어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새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사람의 존재의 위력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벽 네시 반, 누군가가 복도를 오가며 종을 울린다. 사람들이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차가운 물, 차가운 샤워, 거친 수건. 그리고 모두 명상실로 향한다. p.215 

 

 한평 짜리 고시원에서 방음되지 않은 벽 사이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 누군가가 슬금슬금 화장실로 향한다. 물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는 빨랫감을 가지고 세탁실로 향한다. 누군가는 나갈 채비를 한다. 명상실을 향하고 있는 그 모습과 소리들을 느끼며 한 공간 속에 가장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모르는 척 타인이 되어 웃지도 않고,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고시원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그들은 세이지 횃불을 밝히고 둥글게 앉은 사람들에게 돌린다. 북이 울리기 시작한다. 허공에 향이 가득하다.

"이게 바로 와우와우 부분이지." 앤힐이 말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북소리와 바다가 부서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우리가 혼자이면서 함께임을 알라." 닉이 말한다.  

 리처드는 몸을 기울이고 벤의 귓가에 속삭인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갈 수 있다."  -p.368 

 

 우리는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거나하게 술을 마셨고, 가마솥에 구운 삼겹살을 다 먹어 해치운 뒤였다. 마음 치유집단이었던 우리들은 그렇게 앉아 중간에 모닥불을 피웠다. 돌아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집단을 이끌어 가는 전문 지도자는 둥그렇게 떠오르는 달을 향해 손을 내밀며 '님은 먼 곳에'를 불렀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가 님은 먼곳에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 물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가 님은 먼곳에

 

 

 왜 그렇게도 이 노래가 아렸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불꽃이 타닥타닥 타오랐고, 시간이 흐르자 각자 소리 없이 이동을 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에만 머물러 있느라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수용되는, 서로의 입김과 공기로 뒤섞였던 그 시간들이 오래오래 기억났었다. 그 흩어지던 밤의 분위기, 잊지 못할 여름밤. 이 구절을 보자 그때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어쩌면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어." 라고.

 

 

 

 

"내가 왜 쉬어야 해?"

"그 일을 사랑해? 만족스러워?"

"그런 생각할 시간 없어."

"그래서 그러는 건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p.485

 

 나는 때로 심심하고 외롭지만 바쁜 것 보다는 여유로운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여유를 모르고 살았다. 자신에게 쉴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재앙으로 여겨지는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어쩔 줄 몰라한다. 자신이 할 일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지극한 두려움. 자신의 영역에 대한 행사, 자신이 꾸려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감,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와 주길 바라는 강력한 마음들을 자식들에게 보여준다. 어쩌면 뭔가를 생각하기를, 스스로에 대한 감정을 느끼기를 거부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이젠 제발 좀 쉬세요! 이제 그래도 돼요!"

 

 

 

 

"요전에 자동차에 치인 다람쥐를 봤어.

죽지는 않고 누워서 미친 듯이 다리를 차고 있더군."

"깔아뭉갰어?"

"무슨 소리야?"

"다람쥐를 깔고 지나가서 그 비참함을 끝내줬느냐고."

"아니, 왜?"

"흠, 당신이 길가에 그렇게 누워 있다면 누군가가 그렇게 해주길 바랄 것 같지 않아? 비참한 순간을 끝내주길?"

"아니." 그는 충격을 받는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아니야." 그는 분명히 하려고 다시 말한다.

 "나에게 말을 걸어줘. 내 손을 잡아줘. 깔고 지나가지 말고." p.486

 

 자신의 비참함을 멈추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늘 스스로 뭔가를 헤쳐온 그녀와 자신의 손길이 누군가에게 생명을 건네는 방법임을 아는 리처드. 생각의 차이는 생과 죽음을 오간다. 우리는 이렇게 다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저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수밖에.

 

 

 

 

"우리 신혼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화산이 폭발해서 떠나야 했잖아. 재가 날리고 용암이 흐르고."

이것은 예전에 했던 놀이였다. 사귀면서 있었던 일들을 계속 다시 이야기하는 것. p.484 

 

 

 나에게 늘 달콤하고 로맨틱한 이야기만을 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K와 내가 만난 건 버거킹에서였고, 그는 쉬는 날에도 늘 먹을 것들을 사들고 매장에 와서 나를 도와주었다. 도넛을 잔뜩 사와서는 스파이에게 내가 도넛을 몇 개를 먹는지에 대한 보고를 하라고 했다. 트레이를 정리하려고 가면 어느새 그가 와서 내 트레이를 뺏고, 쓰레기 봉투를 집어 들라치면 잽싸게 들고가 정리했다. 생일에는 로커에 책과 편지를 넣어 두었고, 집에 도착하면 우편함엔 초콜릿 조각 케잌과 커피가 들어 있었다. 그와 사귀는 2년 동안 나는 우울해질때마다 그에게 첫 만남 이야기를 토시 하나 빼먹지 말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마치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늘 그렇게 내개 말해 주었다. "처음 봤을 때 말야. 너는 야자수 모자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웃고 있었어....."로 시작되는.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내 삶이 언제나 분홍빛으로 샤방샤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았던 이야기를 계속 계속 다시 이야기하는 놀이. 그건 정말 최고의 위안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 인생은 어찌 될지 모르니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니 잘 한 번 살아보세요, 하고 시원스럽게 알려주는 것 같다. 책의 마지막은 밝다. 딱히 밝은 상황이 아닌데도 리처드가 웃고 있는 것이 즐겁고, 그의 상황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나도 그를 따라 내 몸과 마음을 그냥 이 세상에 맡긴 채로 둥둥 떠다니고 싶다. 얼마 간은.

 

 내가 좋아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암리타'의 구절로 이 소설의 리뷰를 끝내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이렇게 해야할 것만 같아서.

 

『나중 일이야 어찌 되었든, 아무튼 지금 손을 맞잡고 날지 않으면,

이 어지럽게 변화하는 인생으로부터 낙오되고 만다.

 

서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사람은 무력하다. 무력한 것 같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_요시모토 바나나, '암리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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