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를 번역한 여러 책들 중에 첫장을 비교해서 가장 읽기 편하다고 생각되어 열린책들 판을 읽기 시작했는데.. 뒤로 갈수록 번역 가독성이 엉망이다. 예전 수능특강 영어지문 직독해설을 읽고있는 기분이 되어, 어느샌가 반 쯤 흐린눈 하고 페이지만 넘기는 중.. 그래도 책 편 김에 끝은 봐야겠는데.









어떤 도시 하나를 아는 데 손쉬운 방법이란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랑에서도 사람들은 시간도 없고 생각도 짧아 사랑하는지도 모르면서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혼란이 만연한 상황에서도 결국 이야깃거리도 안되는 소소한 일들의 역사가가 되려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가 보잘것없는 사람들임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생각에는 재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그들은 장사를 계속했고, 여행 계획을 세웠으며, 개인적인 견해들이라는 것도 가지고 있었다. 미래며, 여행이며, 토론들을 앗아 가버리는 페스트를 그들이 과연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벌어진 이상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재앙이란 사실 공동의 문제이지만, 일단 닥치면 사람들은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있어왔다. 그렇지만 전쟁이든 페스트든 사람들은 늘 속수무책이다.

무언지 모를 불안과 그래도 다 잘되리라는 믿음 사이에서 그가 어찌할 바 몰라 했던 것 역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도 같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 처음 몇 주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모든 시민들의 감정이 되었고, 두려움과 함께 이 길고 긴 유배 기간 동안 가장 큰 고통이 되었다.

헌데 사용할 수 있는 표현들이란 금세 바닥나 버리기 마련이다. 그러자 오랜 세월 함께한 삶이며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난 잘있소, 몸조심하오. 사랑을 담아>와 같이 상투적인 문구들의 정기적인 교체로 재빨리 축소되어 버렸다.

미래란 전혀 보이지 않는 이 완전하고도 갑작스러운 이별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하루하루를 차지하는 존재, 여전히 그토록 가깝지만 어느새 이미 저 멀리로 사라진 그 존재의 추억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였다.

그러나 페스트는 그들을 빈둥거리게 하고, 활기를 잃은 도시에서 결국 빙빙 맴돌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추억이라는 실망스러운 놀이에 매일매일 전념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왜냐하면 정처 없는 산책 때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길을 또다시 지나가기 마련이였고, 너무나 작은 도시다 보니 대개의 경우 그 길들은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과 예전에 함께 다니던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그런 장난은 당연히 계속될 수 없었다. 기차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는 순간은 언제건 오고야 만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이별이 계속될 운명이며 시간을 두고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수감자라는 우리의 처지로 결국 되돌아오고 말았고, 우리는 우리의 과거 안에 갇혀 버린 꼴이었으며, 그래서 우리들 중 몇몇이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가려는 시도를 했다 하더라도 상상이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상처를 입자, 감내할 만큼 작은 상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마저 금세 미래를 포기하고 말았다.

현재는 견딜 수 없고, 과거와는 적이며, 미래는 빼앗긴 채, 이를테면 우리는 인간의 정의 또는 증오심 때문에 철창 뒤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참으로 비슷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 참을 수 없는 휴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상상으로라도 기차를 다시 달리게 하는 것, 완강히 침묵하는 초인종 소리를 계속 울리게 해서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부터 그들은 하늘의 변덕에 좌우되는 처지가 돼버려, 이를테면 그들은 아무 이유없이 괴로워하고 또 아무 이유없이 희망을 품었다. 이런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은 어느 누구도 이웃의 도움을 바랄 수 없었고, 저마다 홀로 외로이 자신의 근심에 싸여 있었다.

이렇듯 이례적인 광경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이 무엇인 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별이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하는 공통의 감정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를 우선순위에 놓고 있었다. 이 질병을 실제로 받아들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습관을 방해하거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 특히나 민감했다. 그래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냈는데, 그런 감정들로는 당시 페스트에 맞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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