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 물 속 골리앗
비가 많이 오던 올해의 장마와 잘 어울리던 단편. 장마가 한창이던 한 달 전에 봤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어떻게 이렇게 지독한 묘사를 할 수 있는지. 이루는 문장 하나하나 모조리 씹어삼키고 싶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단편이였다. 김애란 작가의 글을 더 읽어보려고 한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말이다. - P47

여름은 평소 우리가 어떤 냄새를 풍기며 살아왔는지 환기시켜줬다. 지상에 숨이 붙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모든 체취가 물안개를 일으키며 유령처럼 깨어났다. 폭우 속, 사물들은 흐려졌고 그럴수록 기이한 생기를 띠었다. - P48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은 급속도로 황폐해졌다. 우리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과일처럼 무르고 썩어가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지켜봤다. 복도에는 쓰레기와 건축자재가 뒹굴었다. 빈집의 깨진 유리창 안으로 빈번하게 빗물이 들어왔다. 구멍이 숭숭 뚫려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아파트 주위로 축축하고 으스스한 기운이 맴돌았다. - P50

가끔은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버리고 간 애완견이 방에 갇혀, 배가 고파 우는 소리였다. 몇 번 찾아내 풀어주려 했지만 소용없었따. 울음의 진원지가 시시각각 변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지하에서, 한번은 이층에서, 어느 때는 또 옆집에서. 두서없고, 음산하게...... 어머니와 나는 며칠 동안, 유기견이 천천히 죽어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공동화된 건물 내장 깊숙한 곳에서 흐느끼는 바람을 타고 새벽 내내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소리가 그쳤을 때, 우리는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알았다. - P50

날씨는 예측할 수 없었다. 빗줄기가 잦아드는가 싶으면 얼마 안 가 벼락이 쳤다. 구름이 가벼워졌다 싶으면 어느새 폭풍이 왔다. 자연은 자연스럽지 않게 자연이고자 했다. 예상하지 말라는 듯. 예고도 준비도 설명도 말며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듯. 네 조상들이 했던 것을 너희도 하라는 듯 난폭하게 굴었다. - P58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갔다. 빗방울은 저마다 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듣다보니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의가 없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 P54

나는 창밖을 내다보거나 이런 저런 몽상에 잠기는 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러곤 눅눅한 방바닥에 누워 지구의 살갗 위로 번져나가는 무수한 동심원의 무늬를 그려봤다.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들...... 오래전에도, 그보다 한참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양으로 떨어졌을 동그라미들. 우리의 수동성을 허락하고, 우리의 피동성을 명령하며, 우리의 주어 위에 아름다운 파문을 일으키는 시끄러운 동그라미들. 그렇게 빗방울이 퍼져가는 모양을 그리다보면 이상하게 내 안의 어떤 것도 출렁여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사춘기 소년에 불과했고, 당장 뭘 이해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조차 몰랐다. - P54

나는 좀 외로웠다. 얼마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마저 잃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리고 이럴 때 내게 다른 형제가 있었으면 어땠을 까 생각했다. 그들이 존재했다면 이렇게 어두운 날, 모든 자식들이 모여 뭔가 상의해 볼 수 있었을텐데.
...
하다못해 그들은 나보다 더 잘 울었으리라.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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