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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과 전복 - 현대 한국 영화의 어떤 경향
김영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3월
평점 :
<순응과 전복>
오랜만에 책을 낸 김영진 평론가의 신작을 읽게 되었다. (그것도 장편!) 제일 최근에 본 책이 <평론가 매혈기> 였다. 그때 당시 입시를 준비하면서 봤었는데 영화를 분석하는 과제나 시험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김영진 평론가의 글은 단순 평론이 아닌 영화에 대한 애착이 보이고 직업으로서 갖는 의무감의 내용이 아닌 진정성이 느껴지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김영진 평론가의 책을 접하고 나서 그 뒤로 계속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순응과 전복을 받고 설렘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책을 출간해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데, 과거부터 현 시대까지 한국 영화의 경향을 담아낸 책이라니 안 좋아할 수가 있나 싶었다. 나는 한국 영화 말고 외국 영화를 자주 본다. 한국 영화를 싫어하기보다는 순응하는 자세가 영화에 보여서 보기가 더욱 꺼려진다. 그렇다고 한국 영화를 안 볼수가 있나 싶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영화들은 주로 내 관심사와 맞닿은 독립영화들이다. 상업영화의 경향이 꼭 누군가 지배해서 "이번 해는 이런 장르만 만들어 알겠지?" 형식을 정해놓고 그 틀에 맞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이런 한국 영화사가 참 안타까울 뿐이다. 이래서 영화도 감독판이 더 주목을 받는 이유인 듯 하다. (제작, 투자자들의 간섭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점은 순응과 전복을 읽으면서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도 있다. 책을 읽으면 친숙한 감독들과 낯선 감독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처음 주제부터 강렬하다. 아비 없는 영화감독. 나는 읽기도 전에 이미 매료가 되었다. (김영진 평론가를 좋아해서 일 수도 있다) 이 책은 그저 한국 영화감독을 나열하고 감독들의 영화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만들어진 한국 영화의 특징과 장르적 관습을 잘 엮은 책이다.
사람들이 흔히 거장이라고 말하는 감독의 영화를 오마주하는 것은 존경심을 표현하고 자 하는 것이다. 오마주를 보여주게 되면 고전영화의 환기를 이끈다. 하지만 오마주를 보여주는 태도는 좋지만, 현재는 많이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안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마주를 표현하는 데 어설프고 약간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거장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저 느낌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만 보인다. 책에서 현대에 오마주를 볼 수 없는 대답은 예전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장르가 있다는 것은 창작 작품을 만드는 처지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감독들은 작가주의와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몇 안 되는 감독들에 한해서다. 지금은 예전보다 주제나 소재를 정하는 데 있어 자유로워졌지만, 상업적인 느낌이 강해졌다. 장르 영화는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한다. 예전 시대 상황을 보면 왜 문예 영화들이 많았냐는 생각도 들었고, 1970년대는 특히 한국영화의 암흑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1962년도에는 검열제도도 높았다고 하니 통제 사회에서 어떤 영화들이 나왔을지 상상이 되는 시대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이나 영화도 그렇듯 자아의 모멸감과 사회의 문제성을 드러낸 창작작품들이 있다는 것이다.
장르관습이 이 시기 영화감독의 강박관념이었다는 흔적은 장선우, 정지영과 함께 '코리아 뉴웨이브'의 일원이었으며 현대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리얼리스트로 평가받던 박광수의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박광수는 현대적인 어법을 소화할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였으나 그에게는 선배 세대의 감독들이 검열의 제한 속에서나마 1960년대에 추구할 수 있었던 대항 장르적 스타일을 전경화시킬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5공화국 시대의 엄혹한 검열 제약 속에서도 당대 기층 민중의 삶을 스린에 묘사하려는 대담성을 갖고 일련의 비평적 주목을 받는 영화를 연출했다. P.51
2000년대 한국 영화감독들은 고전적인 내러티브를 탈피한다. 이창동 감독은 시간의 속성을 거꾸로 한다. 특히 이미지의 직접적인 환기를 통해서 경험의 재구성을 한다.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의 이야기를 사랑은 꿈과 판타지의 역설이라 표현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을 평론한 글을 뒤에 더 자세하게 나온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홍련>은 이야기의 앞뒤가 뒤집힌 서사이며 내러티브의 빈틈을 이미지로 채운다. 또 다른 김지운의 연출작 중 하나인 <달콤한 인생>에서는 전형적인 느와르 영화의 팜프파탈의 형식을 잊게 했다.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 어떤 인과성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 연출작인 <친절한 금자씨>도 그렇다. 명확한 인과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금자의 내면에 집중했고 복수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며 구원에 초점을 뒀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실화에 기초한 원인과 결과에 따라 사건을 묘사하지 않았다. 장르관습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사실상 반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도와 공동체가 무심할수록 개별적 인간들은 초조감과 불안은 더욱 증폭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아버지가 없는 한국 감독들은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재밌게 본 부분이 있다. 멜로와 로맨스에 관한 장이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서구 멜로에서는 여주인공이 한 순간이나마 사회와 대립할 수 있었으나 한국 멜로에는 없었다. 그저 운명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면서 눈물짓는 비련의 주인공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멜로드라마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점은 이미지의 힘과 사진의 환기. 사람들에게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더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향이라는 느낌을 주는 영화 속 공간은 거부할 수 없는 희귀의 욕망이다. <봄날은 간다>는 공간처리를 통해 한때 채워졌던 것이 비워졌을 때 느껴지는 상실감을 일깨워주는 영화이다. 로맨스라고 하기에는 상우의 삶에 더 초점을 두었다. 사라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카메라는 그 순간을 기록한다.
허진호가 그의 초기 영화들을 통해 멜로드라마의 관습성에 순응하면서도 저항하는 변증법을 보여 주는 가장 큰 지점은 결국 그의 영화가 '사랑의 낭만성과 영원성'이라는 멜로드라마의 대전제를 의문시하는 지점에 이른다는 점이다. 그는 사랑 혹은 인생의 순간성, 덧없음. 일상성을 멜로드라마 장르를 빌려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보여 준 바 있다. 허진호가 장르관습에 저항했던 첫 번째 지점은 바로 이 장르의 신화에 복종하면서도 파괴하는 이중의 운동을 행하고 있다는 데 방점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P. 137
한국영화를 잘 안 보지만, 그래도 많이 봤던 영화들의 감독님을 살펴보면 역시 2000년대 감독들이다. 특히 이창동 감독, 박찬욱 감독,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제일 많이 봤다. 이창동 감독의 스타일은 정말 문학적이다. 메타포가 심어져 있고 서사의 힘이 크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면 한 장면에서의 운율 감이 좋다. 어떤 상황을 주면 그 상황을 받쳐 줄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 그 환경 속에서 주인공은 살아간다.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손이 가는 작품들이 많다. 영화를 그냥 감상하는 것보다는 곳곳에 숨겨져 있는 장치들을 찾는 재미를 느끼게 만들어 준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볼때 줄거리나 겉면으로 보이는 사실에 기초해서가 아닌 다른 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사실 이런 도전의식이 많아야 한다. 고민도 많이 해봐야 하며 흐름에 따라가서 순응할 건지 아니면 그 흐름을 바꿀 것인지 말이다. 해외 영화들 많이 보면서 느끼는 점은 왜 한 곳에서만 국한돼서 벗어나지 못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저것뿐이고, 표현할 수 있는 게 저게 다일까라는 것 말이다. 이번에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버닝이 올랐을 때 그래도 희망은 조금이나마 가졌으나 다른 후보작 중에 좋은 영화가 너무 많았다. 그래도 버닝은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봐도 잘 만든 작품이다. 그래서 상이라는 것에 의미를 주기보다 한국 영화의 흐름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싶다. 한편으론 그 뒤를 이을 감독들의 작품들이 기대되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에 절정에 달했던 반역적인 현대 한국 영화의 표현법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세대의 한국 영화감독들은 이제 청년에서 장년이 되었고 그들의 향후 작품 행보에 한 때 모험적이었던 야심적 표현 양식의 흐름 지속을 전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되었다. 그것이 전통이 되려면 계승과 거부의 변증법을 통해 다음 세대의 감독들이 만들어 내는 작품들의 성격과 질이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