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깨기 때문에 꿈이다.
꿈을 깨기 전에는 꿈은 현실이다.
지금의 현실에서 언젠가 깨어난다면 지금도 꿈이다.

가끔 울 둠옥은 근사한 말을 한다.
이번도 꽤나 근사하긴 하지만, 아마도 둠옥도 모르겠지만, 저건 테카르트의 리비젼이다.

종종 죽음이 나쁜것인가 생각을 해 본다.
DNA적인 두려움 말고 그만한 이유가 어떤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살아 있을때는 죽음이 하등 영향을 줄 수 없다. 죽고 난뒤에는 죽음이 영향을 미칠 대상이 없다. 따라서 죽음이 나쁠 수가 없다.
먼가 잘못 된것 같은데 어디가 잘못 되었을까? 잘못된 부분이 있기는 한가? 이건 에피쿠로스 이다.
 
잘못 되었다면 죽음을 삶의 반대 개념으로 둔 것일 것이다.
죽음은 아마도 삶의 경계선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영원한, 불멸의 존재라면 삶이란걸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이란 경계가 삶의 영역을 표시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다.

인간은 미래지향적 존재이고 죽음은 미래를 박탈해버리니 나쁜것이다. 이건 하이데거 이고
 
그러나 인간은 또한 죽음 지향적이다. 마지막 미래는 결국 죽음이니까.
 
난 자살을 부정하는 주장에서 납득할 수 있는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내게 남겨지는, 내가 가질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아마 자살일 것이다.
하이데거를 충실히 따른다면, 미래가 없다면, 다시 말해 미래의 희망이 없다면 이미 죽음은 아무것도 내게서 박탈 해 갈것이 없기 때문에 나쁜것이 되지 못한다.
남은 생이 전혀 무가치하다면 이 복잡한 탄소화합물을 지탱해 나가는 건 아마도 전우주적인 낭비가 될 것이다...이건 로간스 런의 리비젼이다.
 
정상적인 자살이라면, 물론 이런 말은 없다.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우울증 같이 자살 유발성이 높은 정신병 같은게 원인인 자살이 아닌.
미래는 커녕 당장의 절망적 상황에서 운명의 늑대떼에게 찢기고 더럽혀진 육신을 먹이로 던져주며 무심하게 바라 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희열인가.


살것인가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마음 아프게 참는것과
무기를 들어 고난의 물결에 항거하여 이를 종식케 하는것은
어느쪽이  더 고상한  태도인가
죽는다는건  곧 잠드는것.
이것뿐이야.
잠이 들어 이 육체에 따르기 마련인 마음의 고통과 수없는 고뇌가 끝장이 난다면
이것이야 말로  열열히 바랄만한 생의 극치가 아닌가.
죽는다.
잠이 든다.
잠이 든다는 것은 아마도 꿈을 꾼다는것.


인정하고 싶지만, 항상머리에 남아있는건, 죽음의 경계를 넘은 다음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꿈속에서 생의 굴레를 벗어날때 어떠한 꿈이 다가올것인가,여기서 망서리게 된다.
고된 인생을 그처럼 오래 끌고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검을 한번만  휘두르면 이 몸이 조용하고 편안해지는데.
누가 무거운 짐을 메고  피곤한 인생을 신음하며 땀을 흘리겠는가.
다만 죽음 다음에 올 무서움 때문에  결심을 못하는것이 아닌가.

경계를 넘는 순간 나는 약탕기 화로에 부채질하다 깜박 졸다 깬 동자가 되어 있을 것인가.
깬 다음, 겹겹히 쌓여 있는 그 다음 꿈으로 깊이 빠져 들어 갈 것인가.

죽은자에 대한 감정은 죽은자와는 사실 별 상관없는 자신 내면의 투영이다.
종종 먼저 깨어서 가버린 자를 보면서, 곧 올 차례를 기다리며 느끼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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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05-2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레이시즌 님이 참 좋아요.

hanalei 2009-05-28 00:2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마노아 2009-05-27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때문인지 음악이 레퀴엠으로 들려요. 한참 듣고 갑니다.

hanalei 2009-05-28 00:32   좋아요 0 | URL
플래툰에서도 레퀴엠,그러니까 미사곡 보다는 진혼곡,으로 사용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