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 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책세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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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가능성은 끝까지 욕망하고 저항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꽉 차있어어 짧은 글로 정리하기 힘든 책...신학책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다. 
저자의 다음 책 읽기 시작

라캉에게 진리란 과거의 철학이 생각하던 초월적 실체, 그러니까 인간이 진리에 대한 탐사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궁극적 실체로서 '이미 그곳에 있으며,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최종적 의미' 로서의 그 무엇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리란 인간이 세계를 사유하고 정립하는 '지식 체계' 내부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균열' 과 같은 것이다. 
이는 곧 모든 지식은 완전할 수 없고, 모든 새로운 지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새로운 세계는 기존 지식 체계의 균열점으로부터 탄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자는 라캉의 진리를 유령에 비유한다.

‘유령phantom’이란 이 세상에 없어야 하는 (비)존재가 이승에 출현하여 놀라움과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세계의 모든 이미지가 자신들의 확고한 리얼리티를 주장하며 세계의 완결성이라는 허구적 신화를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면, 유령이미지는 그 모든 것이 허망할 뿐이며, 초월적인 것으로 숭배되었던 세상사의 진리들은 한갓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출현한다.

유령과의 이 같은 만남 속에서 주체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가장 흔한 선택은 진실을 알리러 온 유령을 망상으로 간주하고 현실의 기만적 리얼리티 속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유령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면 - 라캉식으로 말해서 진리에 대한 욕망을 고집하게 된다면 - 그때부터 세계는 그에게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14쪽)

우리의 자아가 속해 있는 현실 세계의 존재 질서가 균열을 일으키면서 현시하는 유령적 비-존재의 출현과 주체가 만나게 되는 사건이야말로 진리를 마주치는 순간이다.

성서에서 예수의 '유령'의 등장은 사람들이 믿었던 진리와 세상이 단지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닫는 체험이다.
로마의 권력과 지배가 예수라는 진리를 '죽음'에 가두지 못하는 사건과 마주치면서 그들이 믿던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우리의 의식과 전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출현한 그와 같은 유령적 증상을 억압하여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유령은 끊임없이 다시 돌아온다.

세계의 균열이며, 삶의 부조화라는 은폐된 진리로부터 출현하는 공백의 유령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공백의 유령을 두려워하여 외면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킬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과 같다. 
반대로, 유령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든 자신의 정체성을 폐기하고 다른 무엇으로의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갖는다.

성서에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예수를 보고 “유령이다” 하고 소리친다.
베드로는 구약의 질서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존재였다. 
그의 세계속에서 예수는 오직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들은 구약성서의 세계관, 바리새인들의 세계관, 또는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로마의 세계관 속에서는 유령이미지 였다.
그것은 그전까지의 세계관을 완전히 포기하는 관점에서만, 다시 말해서 현실을 구성하는 모든 리얼리티의 토대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조건하에서만 비로소 기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유령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예수의 행색(거지꼴)과 언행(알아듣지 못할 사랑 타령)은 베드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던 토대의 질서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유령의 매혹에 자신의 존재를 내맡겼고, 예수(유령)는 주어진 모든 담론―베드로에게는 구약의 담론―을 완전히 해체하는 공포의 순간까지 그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베드로(주체)는 진리의 텅 빈 장소―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신약의 출발점―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유령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받아들인다는 것은 언제든 자신의 정체성을 폐기하고 다른 무엇으로의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갖는다. 
유령은 우리에게 변화와 저항의 윤리를 요구한다.

강제된 세상의 법과 권력에 순응하는 것은 가장 비윤리적인 행위이며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이다.

저자는 예술속에서 구현되고 체험되어 지는 유령을 이야기 한다.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습관이며,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새겨진 타자의 문신이다. 
우리가 추함과 아름다움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이렇듯 스스로의 영혼에 새겨진 문신에 근거해서이다. 
마치 어린 시절에 형성된 미각이 평생의 미각을 좌우하듯. 감상자는 바로 그러한 타자의 미적 욕망을 그대로 반복할 테지만, 어떤 작품들은, 유령처럼 기분 나쁜 어떤 사물들은 바로 이러한 관객의 소외된 욕망에 의문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출현한다. 
이들이 바로 유령으로서의 작품이며 이런 작품들은 결코 공짜로 쾌락을 주지 않는다. 
준다 해도 그것은 절정의 순간에 쾌락을 환멸로 되돌리며 감상자를 배반한다. 
이처럼 진정한 관객이란 바로 낯선 사물로서의 작품에 자신을 개방하는 결단을 실행하는 자이다. 관객은 유령적 작품과의 만남 속에서 그 역시 유령이 되며, 유령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때 주체는 어떻게 하나의 예술작품이 예술 자체의 역사에 저항하는지를 체험하고 이러한 체험을 자신의 삶 속에서 반복하는 결단을 실천하게 된다.(23쪽)

유령이미지는 삶의 질서화된 이미지들의 연쇄가 정지될 때, 혹은 그와 같은 이미지의 자연스런 흐름이 갑자기 느려질 때 불현듯 등장하는 어떤 효과이다. 
유령이미지의 출현은 결국 삶의 질서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세계의 질서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폭로하면서 우리에게 '다시 그리고 더' 욕망할 것을, 세계에서의 삶을 처음부터 '매번' 다시 시작할 것을 강제한다.(217쪽)

4.3항쟁, 광주항쟁, 세월호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변화와 저항을 요구하는 유령이며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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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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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우리와 달라요. 
저는 수십 년 동안 식물을 연구한 뒤 깨달았어요. 
식물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공통점이 있긴 합니다. 
빛을 향해 자란다는 거죠.

다양한 식물 일러스트와 나무이야기로 가득차 있을거라는 기대 속에 펼친 책....이었는데 그런 책이 아니다.

자서전이나 위인전 혹은 1인칭 관점의 글을 읽는데 취약한 편파적인 독서(편)력 탓에 그만둘까 하다가 나무이야기를 워낙 좋아해서 결국 끝까지 읽은 책

나무와 삶, 식물과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서 이야기 하는 식물과학자의 수필집이다.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 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48쪽)

과학자들의 글이 자신들의 연구 분야에 따라 다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에서 살아있는 나무냄새가 난다.

연구실을 닫아야 할 최악의 상황에서도 저자는 식물로 자신을 비유한다.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한다.

남성/자본/이익 중심의 과학계에서 살아남기위한 저자의 분투는 눈물겹지만 좋아하는 일을 향하는 그 여정은 정말 아름답다.

스스로 표현하길 ‘우주가 나만을 위해 정해놓은 작은 비밀을 잠깐이나마 손에 쥐고 있었다는, 그 온몸을 압도하는 달콤함은 아무도 앗아갈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내 은청가문비는 생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내 나무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내 삶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나무의 삶이 거치는 중요한 고비를 모두 넘겼고, 최고의 시간을 누렸고, 시간에 따라 변화했다.(49쪽)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또 하루가 밝고, 이번 주가 다음 주가 되고, 이번 달이 다음 달이 되는 동안 내내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숲과 푸르른 세상 위에 빛나는 어제와 같은 밝은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끼지만 마음속 깊이에서는 내가 식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개미에 가깝다. 
단 한 개의 죽은 침엽수 이파리를 하나하나 찾아서 등에 지고 숲을 건너 거대한 더미에 보태는 개미 말이다. 
그 더미는 너무도 커서 내가 상상력을 아무리 펼쳐도 작은 한구석 밖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과학자로서 나는 정말 개미에 불과하다. 
다른 개미들과 전혀 다르지 않고, 미흡하지만 보기보다 강하고, 나보다 훨씬 큰 무엇인가의 일부라는 점에서 말이다.(397쪽)

저자는 자신의 책을 어머니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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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1~3 세트 - 전3권 -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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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만화를...

어떤 시대건 쉽게 사는 게 제일 편하고 좋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엄혹한 시대라면 모두가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합리화해도 된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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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 최선을 다해 대충 살아가는 고양이의 철학
보경 지음, 권윤주 그림 / 불광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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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 최선을 다해 대충 살아가는 고양이의 철학'은 보경 스님과 노란줄무늬 고양이 냥이의 한철 겨우살이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림은 유명한 스노우캣 작가 권윤주다..^^

산중에서 동물을 내 손으로 기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고양이 한 마리가 내 품으로 걸어 들어오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24쪽)

고양이에게 선택 받아 '집사'가 되어버린 스님은 인연의 끈으로 고양이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에 집중한다.

불쑥 찾아들었으니 불청객이나 다름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고양이를 택한 것이 아니고 고양이가 나를 택했다는 사실이다. (44쪽)

아침마다 "안녕, 잘 잤어? 배고프지 기다려봐" 하고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해 질 녘 산보를 나가거나 숨바꼭질을 한다. 
물티슈로 눈물을 닦아주고 눈부실까 봐 밤에 불도 제대로 못 켠다.

추운 계절이 다가오자 보일러실에 전기 매트를 깔고 열기가 직접 닿지 않도록 그 위에 헝겊을 덮어주고 종이 박스와 스티로폼 박스로 집을 만들어 준다. 
밥을 안 먹는 냥이가 걱정돼 들여다보기도 하고 영역 다툼으로 다친 냥이를 치료도 해준다.

만약 주인 없는 길고양이와 친구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나 운이 좋을 것이다. 
미국 속담이다. 
나는 고양이와 행복하게 겨울을 나고 싶다. 
고양이와 나, 누가 운이 좋은 거지? 너야, 나야? 
잠을 자나 싶어서 가만히 내다보면 여전히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올려본다. 
내가 잠을 깨우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맘 놓고 잠들만 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자리에 누워 생각하면 바람 세찬 오늘 밤은 나도 고양이도 서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52쪽)

종종 고양이와 함께하면서 생겨난 설렘, 걱정, 화, 슬픔, 불안, 기쁨 등의 감정을 통해 순간의 삶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경험을 이야기 한다.

냥이와의 인연을 통해 스님은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보고 마주보며 새로운 깨달음에 닿기도 한다.

고양이의 눈동자를 보면 꼭 선승의 눈 같다. 
결코 먼저 말하지 않고 오히려 묻는 듯하다. 
내가 뭔가 물어보려 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너는?, 하고 되묻는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내가 나를 보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자기관조 내지는 마음의 빛을 돌이키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법문이다. (66쪽)

고양이가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참선하는 선승 같은 분위기가 있어요. 
뭘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무언가를 보는 것은 아닌, 
고양이에겐 그런 시선이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까지 보진 못해요. 
무엇을 해도 의도적인 게 있고, 
마음속에 생각의 끈이 떨어지지 않고, 
개인의 욕망이랄지, 미련, 
여러 가지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잖습니까. 
내가 명색이 참선을 한다지만 
고양이 마음의 경지에는 오르기 어려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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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니에의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
장 바니에 지음, 이현주 옮김 / 나무생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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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가 있는 것은 오늘 이 부서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치고자 거기 있는 것이다.

한글판 제목이 좋다.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

예수는 무조건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가르쳐준 진리로 살아가면서 저절로 믿어지거나 아니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포기하고 돌아서야 하는 그런 존재이다.

장 바니에는 몸으로, 삶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1964년에 프랑스의 트로즐리 브로이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두 사람과 함께 노아의 방주라는 뜻의 ‘라르슈’ 공동체를 만들고 25년 간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그의 신앙 고백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의 예수전은 성서학자의 논문이나 역사가의 글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예수의 추종자로 살고자 한 바니에의 성숙과 미숙에 의하여 그의 삶에 의하여 잉태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예수의 추종자로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기쁨을 맛보기도 했고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힘든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속물근성과 이중성에 낙심하였고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과 남에게 거절당하고 명예가 더럽혀지고 죄인으로 비난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의 깊은 수렁에 스스로 빠져들었고, 
내 가슴의 상처 입기 쉬운 나약함과 허무와 분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나는 여러 방어기제와 분노와 그 밖의 도피방법으로 상처 입기 쉬운 자신의 나약함을 감싸주려 하였다. 
예수의 크신 선(Goodness)을 드러내려고 나는 이 책을 쓴다. 
그분은 누구에게도 엄격하거나 가혹하지 않고 남을 지배하거나 남에게 당신 뜻을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거나 그들을 심판하려고 거기 계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의 사명감이다. 
그분은 강하시고 그분 안에는 진리의 빛과 깊은 겸손과 어린아이의 천진한 사랑과 세상에 생명을 주려는 소명과 기다림이 있다. 
온유한 연인이자 치유자인 예수께서는 충만한 생명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각자에게 빛을 비추고자 교만, 두려움, 봉쇄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세상 안팎의 어둠을 조용히 파고드신다.(8쪽)

장 바니에 고통과 경쟁, 증오와 폭력, 불공평과 억압이 있는 이 세상에서 생명과 구원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약하고 소외 당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복음서 안에서 가장 작고 가난하며 연약한 이들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만난다.

강하고 넉넉한 자에게는 남들이 필요 없다.
그는 자기만으로 충분하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는 남들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우리에게 힘을 넣어주려고 우리의 굳어진 가슴을 녹이고, 자신의 약함을 보호하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감추려고 쌓아놓았던 장벽들과 방어기제들을 무너뜨리려고, 말씀이 몸이 되고 나약함이 되셨다.
존재의 중심에서 우리를 만져주고, 우리 안에 깊숙이 잠재된 힘을 일깨워 사랑과 자비로 살아나게 하시려고, 그분이 오셨다.(230쪽)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예수가 그들을 부르신 것은, 당신을 중심하여 다른 많은 남녀 제자들을 핏줄보다 깊은 신앙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서로 보살펴주는 법을 배우고, 
각자 자기 자리를 차지하여 받은바 은사를 실현하고, 
자기들이 얼마나 깨어져 있고 남을 질투하고 힘을 추구하는 존재인지를 배우고,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고 치료하고 치료해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 알고,
가난한 이와 불편한 이, 눈 먼 이들에게 자신을 끊임없이 열어주는 법을 배우는 그런 공동체였다.
안전을 위해 폐쇄된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자유와 사랑 안에서 성장을 돕고 서로 치유해주는 공동체,
서로를 버텨주고, 
존재 자체로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사랑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을 배출하는 공동체였다.(82쪽)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예수의 삶은 결국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예수에 걸려 넘어진 자들은 그분이 너무나 급진적인 이상주의자요
비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 자들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재물을 가난한 자들과 나눈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폭력을 쓰지 않는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원수를 사랑한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용서하고 또 용서한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된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단 말인가?
묻고 또 묻고, 
머리로 이해하고자 한 자들은 기다리기를 거절하였다.
그분의 가르침과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 자들은 믿고 따르기를 거절하고 돌아서서 떠나갔다.(142쪽)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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