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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트라우마 - 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
셸리 램보 지음, 박시형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19년 4월
평점 :
허울 좋게 반짝거리는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일 것이다.
이 구원은 약속만으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약속한다.
많은 이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125쪽)
메시아라 믿었던 스승이자 친구의 비참한 죽음, 예수를 저버린 자신들에 대한 죄의식, 오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재림,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고향, 자신들을 적대하는 동포들, 의지했던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 탄압속에 죽어가는 신앙의 친구들.....초대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상처와 깊은 트라우마는 단순히 신앙으로 극복했다는 한마디로 정의 될 수 있을까
성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불과 하루 사이로 이야기 하지만 제자들의 삶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하며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으로 힘겨워 하지 않았을까
트라우마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 상처는 몸 안에 영구적으로 각인된 흔적이다.
그 영향력은 영속적이고 언제든지 현재로 침입할 수 있다
죽음과 부활사이 침묵의 날, 성토요일이야말로 상처입은 자들을 경험하고 만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날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125쪽)
부활 신앙으로 대표되는 '승리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했던 고통에 대한 빈약한 대답은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는 커녕 비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남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증언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십자가에서 곧바로 부활로 직행하는 기독교 신학의 구원론은 트라우마 사건과 치유 사이의 중간 단계에서 생존자들이 겪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지지해줄 수 없는 구원론이다.
트라우마 생존자가 경험하는 삶은 새로운 것도, 더 나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이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한 삶으로 선포되는 한, 트라우마의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은 묻혀 버린다.
우리는 이런 방식의 부활 선포가 죽음의 여파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침묵하고 그 경험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이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하고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죽음과 부활 사이, 그 중간에서 생존을 위해 상처를 증언하고 되짚고 해석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려고 한다.
'중간(the middle)이라고 비유하여 부르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 이 중간은 삶도 죽음도 아닌, 생존이라는 당혹스러운 영역이다.
그동안 신학은 죽음과 삶의 사건에 집중한 나머지 이 중간이라는 영역을 다루지 못했다.
중간은 위태로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가려지거나 무시되고 시간과 몸과 언어가 중간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에, 중간을 증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통경험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구원의 성급함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에 자리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내러티브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나는 신학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고통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트라우마 속에서도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현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구원 말이다.
삶과 죽음을 양극단에 놓는(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보는 - 옮긴이) 해석으로는 이런 구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트라우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삶 속에 남아 있는 죽음, 혹은 삶 속에 만연한 죽음을 설명해야만 한다.(35쪽)
생존은 한사람이 죽음을 넘어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늘 삶 안에 죽음이 잔존해 있는 것이고, 삶은 죽음의 빛 안에서 재형성되는 것이다.
죽음의 경계와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보는 저자의 관점은 피해 생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트라우마 경험을 상처가 아니라 증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상처는 죽음을 증언하는 동시에 삶의 가능성을 증언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부활을 첫번째로 경험한 마리아를 보여준다.
성토요일, 내 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극심한 피로만 느꼈다.
영혼의 상태.
그녀는 그 고통을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심리적인 고통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극도의 고독, 버림받음, 포기가 지옥에 존재한다.
그녀의 경험은, 지옥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녀가 손에 넣을 수도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옥의 고통은 그녀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마치 성자가 성부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졌듯이. 지옥은 고통을 떠맡는 곳이 아니라, 버려짐을 견디는 곳이다.(115쪽)
깊은 트라우마 속에서 예수를 만난 마리아의 증언은 누구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 증언은 미끄러지고, 받아질 수 없고, 지연된 것이다.
우리의 인지구조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경험이고 이들이 증언을 해도 우리는 그 증언을 알아차릴 수 없는 맥락에 서 있을 때가 많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증언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에 있었으나 거기에 없었다.
그는 그녀가 전에 알지 못하던 방식으로 현존한다.
마리아에게 트라우마의 경험은 상처가 아닌 증언이 된다.
트라우마에 대한 통찰들은 또한 예수라는 인물 대신에, 증언이라는 행위에 의해 드러나는 성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모델들은 예수가 떠나고 난 뒤, 예수의 부재로 인해 형성된 증언의 방식들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며, 성령이 하는 증언과 성령에 대한 증언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증언을 성령의 증언과 연관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어떤의미가 있을까?
많은 경우에, 우리가 성서 속에서 보는 증언은 지금 제안된 해석들보다 훨씬 덜 직접적이다.
만약 증언이 말로 전달하기 어렵고, 간접적이며,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증언에 대한 개념이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우리의 관심이 증언의 내용이 아니라 증언하는 행위 자체로 옮겨지고, 목격된것들은 계속해서 생략된다면 어떻게 될까?
트라우마라는 렌즈는 선포되어야 하는 분명한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담아낼 수 없지만 증언해야만 하는 진실을 주목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