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 우리가 지나쳐 온 무의식적 편견들
돌리 추그 지음, 홍선영 옮김 / 든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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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사람을 마비시킨다.
수치심을 느낄 때 하는 행동은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죄책감은 동기를 부여한다.
죄책감을 느끼면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대인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선한 사람'은 수치심을 잘 느낀다.
수치심은 교묘한 감정이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런 강력한 자기 위협과 맞닥뜨리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닫은 채 회피하고 싶어진다.
반면 죄책감을 느낄 때 우리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원제 The Person You Mean to Be: How Good People Fight Bias 처럼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기 위한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가 적혀있다.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으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작은 빛이나마 주변을 비추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다.
저자는 빛으로 주변을 밝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천들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인종과 민족, 젠더와 종교, 신체적·정신적 능력과 성적 지향을 막론하고 더 나은 직장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선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저자는 '내재적 편견 연관 검사(IAT)'를 받아본 뒤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낮게 나온 점수에 당황하면서 이 결과를 받아들이고 개선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색인종이자 여성이며 이민자 출신인 저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시적 태도와 내재적 태도간에 큰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 IAT를 받은 사람 가운데 70~75%가 인종 문제에 관해 내재적 편견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지만, 실제로 자신이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은 이보다 훨씬 낮다.
많은 경우 무의식적 편견은 우리가 속한 문화와 법, 역사, 조직 안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드러난다.
흔히 우리는 시스템이 자기 자신보다 크며, 자신과 분리된 개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스템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지 몰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 편견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무의식적 혹은 내재적 편견 자체를 없애는 방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지만, 내재적 편견을 현실에서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하는 방법은 있다.
바로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사람(believer)'에서 선함을 '구축하는 사람(builder)'으로 변화하려는 노력이다..
구축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의식적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자신이 문화적, 법적, 구조적으로 편견이 내재한 시스템의 일부임을 자각한다.
이렇게 시스템에 내재한 무의식적 편견에 맞서려면 고정형 사고방식을 넘어 성장형 사고방식을 쉼 없이 가동해야 한다.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동하면 자기 자신을 이미 완성된 선한 사람이 아니라 조금씩 발전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여 편견에 대해 개인적, 시스템적 차원에서 맞설 수 있다.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빋기 때문에 오로지 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틀리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는 말은 실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러면 틀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는 뜻이다.
반대의견을 맞닥뜨릴 경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거나 아예 노력 자체를 중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성장형 상고방식을 고수할 경우, 좋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기꺼이 책임을 지려 한다. 스스로 성장할 여지를 주면 책임감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진다. (97쪽)
저자는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를 선한 목적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내재적으로 인종 차별주의자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불편한 정보를 외면하지 않고 수용하는 '의도적 인식'을 하고 자기의 책임이 없다고 해서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일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스템에 개입하는 자세 역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육체적 한계극복도 아니고 지적 성취도 아닌 도덕적 행동이다. 증오에 사랑으로 답하는것, 소외된 사람을 포용하는 것, 그리고 "내가 잘못 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힘든일이다." -시드니J. 해리스 (43쪽)
선한 사람이, 아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은 간단하다.
더 많이 행동하면 된다.
모든 걸 다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조금 더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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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사랑학 수업 - 사랑의 시작과 끝에서 불안한 당신에게
마리 루티 지음, 권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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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에 관한 집단적 통념은 남녀를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놓습니다.
이는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낫다는 전제를 내포하죠.
그리고 둘의 관계를 본디 적대적인 것으로, 즉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떻게든 ‘져줘야’ 한다고 느끼게 합니다.
게다가 엄청난 노력만이 둘의 차이를 좁힐 수 있다고 암시합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녕 남녀만의 문제일까요?
두 여성이 서로 사귄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 있을까요?
단지 두 사람이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요?
여자 커플은 애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자동적으로 비켜가게 될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원했던 책의 제목은 On Love: Gender, Sexuality, Identity..인데 원제인 The Case for Falling in Love도 한국판으로 오면서 선택하기 힘든 책 제목이 되버렸다.
비판이론과 정신분석학 전문가이자 페미니스트 문화비평가인 마리 루티의 책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판 저자소개에는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전무가라는 소개가 빠져있다.
인터뷰에서는 문화비평가로서 자신을 포스트페미니즘시대를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비판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 책은 남자와 여자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틀에 박힌 오해를 넘어서 섹스와 젠더 그리고 정체성을 기반으로하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힘은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여있는 저자의 관점과 사상에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남녀에 관한 유해한 이분법을 라캉이나레비나스 프로이드의 이론으로 비판하고 퀴어이론을 기반으로 섹스와 젠더의 벽을 허문다.
사랑이라는 당근을 사용하면서 서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관계맺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죠.
하지만 인간은 사랑에 미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 안의 결핍은 즐거움과 생기와 가능성으로 다시 충만해집니다.
인생은 그제야 의미를 되찾죠.
일상의 스트레스와 짜증은 뒤로 물러납니다.
발걸음은 가뿐해지고 불안도 사라집니다.
말솜씨도 좋아져 말속에 지혜가 넘쳐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풍랑 이는 바다의 작은 조각배가 아닙니다.
외려 작은 연못의 큰 배가 되죠.
저자가 예를들어 말하고 비판하는 미드 중에 본게 없다는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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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트라우마 - 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
셸리 램보 지음, 박시형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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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 좋게 반짝거리는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일 것이다.
이 구원은 약속만으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약속한다.
많은 이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125쪽)
메시아라 믿었던 스승이자 친구의 비참한 죽음, 예수를 저버린 자신들에 대한 죄의식, 오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재림,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고향, 자신들을 적대하는 동포들, 의지했던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 탄압속에 죽어가는 신앙의 친구들.....초대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상처와 깊은 트라우마는 단순히 신앙으로 극복했다는 한마디로 정의 될 수 있을까
성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불과 하루 사이로 이야기 하지만 제자들의 삶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하며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으로 힘겨워 하지 않았을까
트라우마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 상처는 몸 안에 영구적으로 각인된 흔적이다.
그 영향력은 영속적이고 언제든지 현재로 침입할 수 있다
죽음과 부활사이 침묵의 날, 성토요일이야말로 상처입은 자들을 경험하고 만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날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125쪽)
부활 신앙으로 대표되는 '승리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했던 고통에 대한 빈약한 대답은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는 커녕 비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남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증언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십자가에서 곧바로 부활로 직행하는 기독교 신학의 구원론은 트라우마 사건과 치유 사이의 중간 단계에서 생존자들이 겪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지지해줄 수 없는 구원론이다.
트라우마 생존자가 경험하는 삶은 새로운 것도, 더 나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이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한 삶으로 선포되는 한, 트라우마의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은 묻혀 버린다.
우리는 이런 방식의 부활 선포가 죽음의 여파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침묵하고 그 경험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이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하고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죽음과 부활 사이, 그 중간에서 생존을 위해 상처를 증언하고 되짚고 해석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려고 한다.
'중간(the middle)이라고 비유하여 부르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 이 중간은 삶도 죽음도 아닌, 생존이라는 당혹스러운 영역이다.
그동안 신학은 죽음과 삶의 사건에 집중한 나머지 이 중간이라는 영역을 다루지 못했다.
중간은 위태로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가려지거나 무시되고 시간과 몸과 언어가 중간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에, 중간을 증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이 중간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
고통경험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구원의 성급함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에 자리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내러티브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나는 신학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고통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트라우마 속에서도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현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구원 말이다.
삶과 죽음을 양극단에 놓는(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보는 - 옮긴이) 해석으로는 이런 구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트라우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삶 속에 남아 있는 죽음, 혹은 삶 속에 만연한 죽음을 설명해야만 한다.(35쪽)
생존은 한사람이 죽음을 넘어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늘 삶 안에 죽음이 잔존해 있는 것이고, 삶은 죽음의 빛 안에서 재형성되는 것이다.
죽음의 경계와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보는 저자의 관점은 피해 생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트라우마 경험을 상처가 아니라 증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상처는 죽음을 증언하는 동시에 삶의 가능성을 증언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부활을 첫번째로 경험한 마리아를 보여준다.
성토요일, 내 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극심한 피로만 느꼈다.
영혼의 상태.
그녀는 그 고통을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심리적인 고통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극도의 고독, 버림받음, 포기가 지옥에 존재한다.
그녀의 경험은, 지옥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녀가 손에 넣을 수도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옥의 고통은 그녀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마치 성자가 성부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졌듯이. 지옥은 고통을 떠맡는 곳이 아니라, 버려짐을 견디는 곳이다.(115쪽)
깊은 트라우마 속에서 예수를 만난 마리아의 증언은 누구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 증언은 미끄러지고, 받아질 수 없고, 지연된 것이다.
우리의 인지구조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경험이고 이들이 증언을 해도 우리는 그 증언을 알아차릴 수 없는 맥락에 서 있을 때가 많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증언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에 있었으나 거기에 없었다.
그는 그녀가 전에 알지 못하던 방식으로 현존한다.
마리아에게 트라우마의 경험은 상처가 아닌 증언이 된다.
트라우마에 대한 통찰들은 또한 예수라는 인물 대신에, 증언이라는 행위에 의해 드러나는 성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모델들은 예수가 떠나고 난 뒤, 예수의 부재로 인해 형성된 증언의 방식들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며, 성령이 하는 증언과 성령에 대한 증언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증언을 성령의 증언과 연관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어떤의미가 있을까?
많은 경우에, 우리가 성서 속에서 보는 증언은 지금 제안된 해석들보다 훨씬 덜 직접적이다.
만약 증언이 말로 전달하기 어렵고, 간접적이며,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증언에 대한 개념이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우리의 관심이 증언의 내용이 아니라 증언하는 행위 자체로 옮겨지고, 목격된것들은 계속해서 생략된다면 어떻게 될까?
트라우마라는 렌즈는 선포되어야 하는 분명한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담아낼 수 없지만 증언해야만 하는 진실을 주목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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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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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지만, 그렇다. 인간은 모일수록 좋은 것 같다. 적어도 축구공 앞에서, 특히 여자들은. 무엇보다 축구는 재미있으니까. 너무 재미있으니까.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김혼비 작가의 또다른 에세이집 <아무튼, 술>을 읽고 망설임 없이 손에 집어든 책 ..역시나 작가의 드립력이 눈부시게 넘쳐나는 재미 있는 책..ㅎㅎ
축구와 일상이 엮이면서 풀어나가는 페미니즘 이야기도 즐겁다.
일 나가고 아이 돌보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어떻게든 일상에 축구를 밀어 넣는 이 여정 자체가 어떻게든 골대 안으로 골을 밀어 넣어야 하는 하나의 축구 경기다.
기울어진 축구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라는 걸 잘 알기에 모두들 최대한 모두의 일상에 축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패스를 몰아주고 공간을 터 주고 리듬을 맞취 준다.
여기서 우리는 한 팀이다. (270쪽)
축구 초짜이자 초개인주의자인 작가가 아마추어 축구팀에 들어가 3년 동안 공을 찬 사연을 유쾌하게 즐겁게 때로는 우아하게 풀어 놓는다. 축구를 하다가도, 맨스플레인을 만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로빙슛을 호쾌하게 날린다. 느리고 우아하게...
작가는 축구가 하고 싶어 틈틈이 인터넷을 뒤진 지 2년 만에 드디어 초보자도 환영이라는 여자축구팀 회원 모집 공고를 발견한다
덜컥 전화부터 했는데 수화기 너머의 남자(감독)은 자꾸 일단 와 보면 된다고 한다.
일단 지원부터 하고 나서 마음의 준비를 할 속셈이었는데 당장 며칠 후 훈련부터 합류하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엉겁결에 축구팀 일원이 됐다.
입단한 지 1시간 10분 만에 철망과 인사이드 킥을 나누다가 느닷없이 빛나는 데뷔전을 치른다.
무언가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그 현실태를 눈앞에서 본 순간, ‘나도 하고 싶다.’를 넘어서 ‘내가 이걸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구나.’를 깨닫게 될 때 어떤 감정이 밀려 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 무언가 마음으로 쑥 들어와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어떤 감정을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는 그리움. (236쪽)
그리고 축구에 빠져든다.
제발, 제발, 누가 받아 줘. 하프라인을 넘어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며 속으로 간절히 외치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주장이 달려갔다.
공의 예상 낙하지점에 FC 페니 선수 두 명이 이미 버티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깨로 거칠게 부딪치며 공을 따 내는 데 성공했다.
왼발로 공을 한 번 툭 쳐서 그녀가 좋아하는 오른발로 슈팅하기 좋은 위치에 갖다 놓은 그녀는 그대로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골망을 흔들었다.
세상에, 오 세상에! 오른쪽 구석에 꽂히는 깔끔한 골이었다.!(260쪽)
하프라인은 고사하고 저 멀리 반대편 골대 근처에서 상대 팀 선수가 공을 가로채기만 해도 불안 불안하게 매달려 있던 목젖이 배 속 밑바닥으로 뚝 떨어지며 어딘가 움푹 파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선수들의 전진 패스에 따라 공이 (<슬램덩크> 시절 또 하나의 고전인 영화 <여고괴담>의 귀신 점프 컷처럼) 순식간에 턱, 턱, 턱 크게 다가올 때면 골문 따위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 반대쪽으로 몸이 움찔움찔하다가도, 골 먹히는 건 또 싫어서 다시 공이 날아오는 쪽으로 움찔움찔 움직인다.
그렇게 공이 날아올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자아가 분열하기 바빴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첫 번째 게임에서 딱 네 번의 슈팅을 받았을 뿐인데도 슈팅 하나에 10년씩 늙은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경기가 끝나갈 즈음 나의 상태는 노년기에 접어들었을때 보일 법한 증상과 비슷했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기력이 없었고, 축구장 끄트머리에 가만히 서서 정중앙에서 치열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펄펄 뛰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현명한 노인들이 세상을 조망할 때 으레 그렇듯이 선수 각각의 움직임과 전개 방식이 한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게다가 역정도 잘 났다!(67쪽)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운동‘이 되는 순간이다.
일상에서 개인이 편견에 맞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건 결국 편견의 가짓수를 줄여 나가는 싸움 아닐까.
˝여자가 00를 한다고?˝라는 문장에서 00에 들어갈 단어의 숫자를 줄이는 것 같은.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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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 자본주의에 숨겨진 위험한 역사, 자본세 600년
라즈 파텔 외 지음, 백우진 외 옮김 / 북돋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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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하다”는 것의 의미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적은 보상을 주고 동원하는 폭력’이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싸구려로 만듦으로써 작동해왔다.
기후 위기, 극단적 불평등, 금융 불안 같은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가 감춰온 비용이 비로소 우리에게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져렴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것들은 자본주의가 성장의 희생물로 삼아 억누르고 착취한 모든 것들이다.
노동, 여성, 자연, 식량, 에너지, 생명등 많은 것들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싸구려 취급 받으며 이익 창출의 도구가 되어왔다.
우리의 저렴한 것들은 마술처럼 스스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현대 세계의 아이디어와 정복, 통상이 폭력적으로 뒤섞인 연금술을 통해서 등장했다.
그 심장부에는 서로 얽혀있는 일련의 이분법이 자리하고 있다.
사회와 자연, 식민지 개척의 주체와 객체, 남성과 여성, 서구와 나머지, 자본가와 노동자 같은 구분들이 그것이다.
자본가들은 이 이분법적 세계를 유지하고 그 경계를 허물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끊임없이 새로운 '저렴한 것'들을 확보할 수 있고 인간과 자연의 저렴한 노동을 강제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닌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현세를 ’자본세(Capitalocene)라고 규정한다. 1400년대 이후의 역사를 자본세로 불러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인간과 지구 생명망의 관계를 엮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자본세 600년의 역사가 어떻게 구축되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파고든다.
자본주의의 시작을 18세기 영국 산업혁명이 아니라 14세기 유럽에서 시작해 지배 계급이 이윤의 원천을 찾아 대서양의 섬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 속에서 추적한다.
14세기 말엽에 소빙기라는 전지구적 기상 재앙이 갑자기 찾아왔고 농업 생산량은 급감한다. 더구나 흑사병이 유럽 인구 절반의 목숨을 앗아가자 유럽인들은 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나가기 시작했다.
바다로 나간 유럽인들은 15세기에 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섬들을 발견한다.
유럽과 중동에서 비싸게 거래되는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밀림을 사탕수수밭으로 일구기 위해 불을 질러 밀어버렸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끌고 와 아메리카에 대량으로 퍼뜨렸다. 소위 노예 품종 개량에도 나서 온순한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와 체력 좋은 백인 노예, 더위에 강하고 지구력 좋은 흑인 노예들의 교배로 오늘날 중남미 대부분을 차지한 혼혈 인종이 탄생한다.
유럽의 자본과 아메리카의 토양, 아프리카의 노동력이 결합된 삼각무역은 이렇게 태어났다.
대항해 시대의 초기 식민지 체제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로 유럽에 재수입된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를 깨뜨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자연을 파괴하며 원자재를 생산하고 영주의 장원에 매인 노동력을 끄집어내 저임금 노동자로 만들었다.
노동력의 바탕인 가정도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재편되기 시작했다.
도시화와 핵가족화라는 물결 속에서 농경사회에 근간한 유럽 전통의 대가족 체계가 무너지고 무한한 권한을 지닌 가부장이 이때 출현한다.
중세까지 남성과 동일하게 모든 노동에 동원된 여성의 노동력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갇힌다. 여성의 삶은 우수한 인적 노동자원을 생산ㆍ관리해 자본주의 체제에 바치는 일로 목적이 변질된다.
저자는 자연, 돈,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생명 등 7가지 저렴한 것들의 역사를 다루며 이들을 값싸게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거래를 가능하게 했던 오랜 자본주의 전략을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재에서 보여준다.
치킨산업의 경우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유전자를 조합해 닭의 가슴 근육을 부풀리고 육계 농장과 사료용 토지에는 저렴하게 쓸 수 있는 공공자금이 투입된다.
에너지도 (세금으로) 싸게 공급되고 계육공장을 굴러가게 하는 이들은 시급 25센트의 저임금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86%가 각종 질병을 앓고 있지만 치료보다는 가족의 돌봄에 의존한다. 이렇게 가공된 닭은 다시 저렴한 식재료로 공급돼 노동자의 입으로 들어간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자연과 사회를 분리해서 사고하며 사회는 자연을 지배하고 자본으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토지 등 자연 하나하나에 값을 매겨 ‘개발’이라는 단어 아래 착취하였고 그 결과 이제는 기후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극단적인 기상이변도 나타난다.
그간 저렴하게 유지됐던 세계는 이제 지속가능하지 않다.
흑인, 식민지인, 여성, 노동자, 환경운동가들은 각각의 자리에서 자본주의가 저렴한것들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이분법에 저항한다.
새로운 세계와 답은 이분법의 틀을 깨고 나서야 보게 될 것이다.
생명과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인정하고 탈성장 사회로 가야만이 비로서 탈출구를 열수있다.
유일한 잘못이 지금 태어난 것인 사람들, 여성, 원주민, 기후변화와 공해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면, 그리고 이 문장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 모두의 행위가 모여 그들의 삶을 더 악화시킨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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