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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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지만, 그렇다. 인간은 모일수록 좋은 것 같다. 적어도 축구공 앞에서, 특히 여자들은. 무엇보다 축구는 재미있으니까. 너무 재미있으니까.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김혼비 작가의 또다른 에세이집 <아무튼, 술>을 읽고 망설임 없이 손에 집어든 책 ..역시나 작가의 드립력이 눈부시게 넘쳐나는 재미 있는 책..ㅎㅎ
축구와 일상이 엮이면서 풀어나가는 페미니즘 이야기도 즐겁다.
일 나가고 아이 돌보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어떻게든 일상에 축구를 밀어 넣는 이 여정 자체가 어떻게든 골대 안으로 골을 밀어 넣어야 하는 하나의 축구 경기다.
기울어진 축구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라는 걸 잘 알기에 모두들 최대한 모두의 일상에 축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패스를 몰아주고 공간을 터 주고 리듬을 맞취 준다.
여기서 우리는 한 팀이다. (270쪽)
축구 초짜이자 초개인주의자인 작가가 아마추어 축구팀에 들어가 3년 동안 공을 찬 사연을 유쾌하게 즐겁게 때로는 우아하게 풀어 놓는다. 축구를 하다가도, 맨스플레인을 만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로빙슛을 호쾌하게 날린다. 느리고 우아하게...
작가는 축구가 하고 싶어 틈틈이 인터넷을 뒤진 지 2년 만에 드디어 초보자도 환영이라는 여자축구팀 회원 모집 공고를 발견한다
덜컥 전화부터 했는데 수화기 너머의 남자(감독)은 자꾸 일단 와 보면 된다고 한다.
일단 지원부터 하고 나서 마음의 준비를 할 속셈이었는데 당장 며칠 후 훈련부터 합류하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엉겁결에 축구팀 일원이 됐다.
입단한 지 1시간 10분 만에 철망과 인사이드 킥을 나누다가 느닷없이 빛나는 데뷔전을 치른다.
무언가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그 현실태를 눈앞에서 본 순간, ‘나도 하고 싶다.’를 넘어서 ‘내가 이걸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구나.’를 깨닫게 될 때 어떤 감정이 밀려 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 무언가 마음으로 쑥 들어와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어떤 감정을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는 그리움. (236쪽)
그리고 축구에 빠져든다.
제발, 제발, 누가 받아 줘. 하프라인을 넘어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며 속으로 간절히 외치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주장이 달려갔다.
공의 예상 낙하지점에 FC 페니 선수 두 명이 이미 버티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깨로 거칠게 부딪치며 공을 따 내는 데 성공했다.
왼발로 공을 한 번 툭 쳐서 그녀가 좋아하는 오른발로 슈팅하기 좋은 위치에 갖다 놓은 그녀는 그대로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골망을 흔들었다.
세상에, 오 세상에! 오른쪽 구석에 꽂히는 깔끔한 골이었다.!(260쪽)
하프라인은 고사하고 저 멀리 반대편 골대 근처에서 상대 팀 선수가 공을 가로채기만 해도 불안 불안하게 매달려 있던 목젖이 배 속 밑바닥으로 뚝 떨어지며 어딘가 움푹 파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선수들의 전진 패스에 따라 공이 (<슬램덩크> 시절 또 하나의 고전인 영화 <여고괴담>의 귀신 점프 컷처럼) 순식간에 턱, 턱, 턱 크게 다가올 때면 골문 따위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 반대쪽으로 몸이 움찔움찔하다가도, 골 먹히는 건 또 싫어서 다시 공이 날아오는 쪽으로 움찔움찔 움직인다.
그렇게 공이 날아올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자아가 분열하기 바빴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첫 번째 게임에서 딱 네 번의 슈팅을 받았을 뿐인데도 슈팅 하나에 10년씩 늙은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경기가 끝나갈 즈음 나의 상태는 노년기에 접어들었을때 보일 법한 증상과 비슷했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기력이 없었고, 축구장 끄트머리에 가만히 서서 정중앙에서 치열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펄펄 뛰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현명한 노인들이 세상을 조망할 때 으레 그렇듯이 선수 각각의 움직임과 전개 방식이 한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게다가 역정도 잘 났다!(67쪽)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운동‘이 되는 순간이다.
일상에서 개인이 편견에 맞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건 결국 편견의 가짓수를 줄여 나가는 싸움 아닐까.
˝여자가 00를 한다고?˝라는 문장에서 00에 들어갈 단어의 숫자를 줄이는 것 같은.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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