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2
게리 윌스 지음, 김창락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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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Paul Meant

바울과 관계된 전체를 개관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 게리 윌스은 가톨릭 교인 문필가로 신학자는 아니기에 전문적인 영역에서 한계도 확실하지만 또한 대중적이라는 장점도 명확하다. 
저자는 역사비평적인 관점에서 바울의 7개 진정서신에 근거해서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보다 초대교회와 바울의 실제적인 역사 맥락, 역학관계에 따라 바울을 보고 있다. 
"바울의 신학적 해석"이라기보다 '초대교회에서 역사적인 역학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관찰하고 서술하고 있다.

"바울은 여러 가지 투쟁의 한복판에서 수신인들 편에서 제기한 물음에 답변하 거나 적대자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이 편지들을 구술하고 받아쓰게 했다' 
바울은 냉정하고 담담한 철학자가 아니라 전투태세를 갖춘 사자였다. 
그는 신비주의자이며 심원한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수다스러운 길거리 싸움꾼이며 많은 전선을 감당하느라고 분주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주 괴로워하고 때때로 격분하기도 했다. 
한사람이 다방면의 수많은 과제를 처리해야만 할 때 흔히 그렇듯이 바울은 상이한 상황들에 상이한 방법으로 대처했다."

바울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그를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틀을 공고히
하려 했던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비울이 전하려 했던 것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구주라는 것과 예수가 전 생애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 곧 사랑이 유일한 법’ 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따라서 게리 윌스는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자기 입맛대로 주무른 것이 아니라, ‘종교가 예수의 유산을 접수하여 입맛대로 주무른 것처럼 바울의 유산을 접수하여 입맛대로 주물렀다’ 라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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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What's Up 1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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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유럽의 대표적 좌파 철학자들이 바울에 관한 담론들을 생산했다. 
1998년 바디우의 사도바울이 출간된 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남은 시간>(2000년)이 출간됐고, 다시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2003년)에서 바울을 새롭게 해석했다. 
이른바 바울3부작의 등장이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자신들의 이론적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일련의 논의는 그리스도교 담론이 단순히 종교적 담론으로서의 가치를 넘어서 저항담론으로서도 유의미함을 보여준다.

해방적 가치의 원천으로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종종 예수의 혁명적 신앙을 변질시킨 주범으로 몰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동성애' '권력' '국가' '성'의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여전히 보수적인 담론의 도구로 사용되는 실정이다. 
다행히도 근래 바울에 관한 인문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신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바울 해석이 진행되고 있다.

바디우의 책 사도바울은 바울연구에 신학적 지평의 확장과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물론 이 책의 목적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아니라 이 책의 부제처럼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바울에게로 향한것이다. .

"나에게 바울은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의 모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한결같은 특징들을 실천하고 진술하는 사람이다. 
그는 단절과 전복에 대한 일반적 관념과 그러한 단절의 주체적 물질성인 사유=실천의 관념이 어떻게 온전히 인간적으로 결합되는가(나를 매혹시키는 건 바로 그러한 인간적 결합의 운명이다.) 를 제시한다.(13쪽)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유대인이었지만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한 예수와 만나는‘사건’이후, 자신의 모든 생애를 걸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파한 ‘주체’이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지배를 위한 담론은 지혜를 중심으로 하는 총체성의 담론인 그리스담론과 자연적 총체성을 넘어선 초월성을 가리키는 예외의 담론으로서 유대 담론 두가지 였다.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체험한‘진리-사건’은 기존의 담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바울은 이를 알리기 위해 새로운 담론인 '그리스도담론'을 창출하고 담론의 주체로서' 사도'가 된다.

진리-사건 즉 바울에게 있어서 다마스쿠스 사건은 기존 담론의 연속성이나 전통의 축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진리사건은 순수한 주어짐이며 그러기에 현재 상황을 규정하고 조절하는 법과 질서로부터 단절시키고, 그것들을 중단시킨다. 
그러나 진리사건은 법과 질서의 상태로 고착되지 않고. 이내 사라져 버린다.
단지 진리사건은 그것을 체험한 자를 주체로 소환하여 그 사건의 의미가 지속되게 하고 진리사건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자는 진리사건의 ‘주체’가 된다.

바울은 다마스쿠스에서 불현듯 도래한 사건을 경험하였고, 그러한 사건의 부름에 신실하게 응답함으로써 그리스 담론, 혹은 유대 담론을 모두 지양하는 새로운
담론의 주체, 곧 그리스도담론의 주체인‘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 진리사건을 선언하는 충실성의 과정,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다.

구원의 행위 즉 진리의 투사로서의 충실성은 즉‘믿음’,‘ 사랑’,‘ 희망’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믿음은 진리 사건이 자신을 주체로 세웠다는 것에 대한 전적인‘확신’ 을 의미하고 이러한‘확신’을 다른이들에게 전투적으로 건낼때‘, 사랑’이 발생한다. 
또한 진리과정이 완성을 향해 나아갈 때 주체는 전위의 힘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여기서‘희망’이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과정 곧 진리과정이란 기존의 담론과 질서를 모두 거부하는 사건을 통해 주체를 세우고, 그 주체가 사건으로부터 비롯한 확신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투쟁적으로 말을 건네며, 그 확신의 완성된 성격을 가정하고 전위를 투사처럼 행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8)
바울의 그리스도담론에는 기존의 지배담론에 저항하는 '평등'의 보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바디우(바울)가 주장하는 보편주의는 총체성의 위계적 헤게모니(그리스담론)를 해체하며,어떠한 특수한 정체성에 의거한 특권적 예외(유대담론)도 폐기하는‘평등’의 이념을 핵심으로 한다.

바디우의 평등은 차이와 다름을 무시한 획일적 평등이 아니라 그것들을 횡단하고 초월하는 즉 차이들의 위계를 점하지 않고 차이들 사이를 논쟁하지 않으며, 그저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것이다.
진리사건은‘아버지’의 위계적 담론이 해체하고,‘ 아들들’의 평등함이 담보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이라는 ‘진리사건’이 바울에게 의미하는 바 역시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평등한 한 형제라는 사실에 있다.

바디우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 어떤 종류의 특수성이나 정체성을 넘어서서“아들들의 평등을 정초”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을 우리의 동시대인으로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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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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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행복한 책 읽기가 다시 나왔다. 
김현의 글을 정말 좋아한다 
그의 글을 통해 책 읽기를 배웠고 조금이라도 비슷한 글을 써보려고 아둥거리던 대학시절도 있었다.지금도 그러하다 
생각해보니 페북에 책 이야기를 긁적이고 있는것도 김현탓이다.
토론토 대학 로버츠 도서관에서 김현전집을 발견하고 얼마나 가슴 뛰었던지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 
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 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도 최인훈의 회색인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책 읽기의 괴로움 중에서

1986. 6.16 자기가 쓴 글들을 읽을 때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문장들 사이의 침묵이 점점 무서워진다.

1986. 6.19 낭만적 지식인은 조직력의 결여를 그 약점으로 갖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조직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싸움의 변두리로 밀려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수가 있다. 토마스 쿠오의 [진독수 평전]을 읽고 느낀 점.

1986. 11.21 우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가끔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 작가는 꼬집듯 말하고 있다.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란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같이 있는 것은 불편해서, 괜히 담배를 피우거나, 해도 괜챦고 안 해도 괜챦은 말을 계속해야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 편안해져서 구태여 의례적인 말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 같이 아무 말 않고 오래 앉아 있으면 불편해지는 사람을 친구라 부르기는 거북하다. 친구란 아내 비슷하게 서로 곁에 있는 것을 확인만 해도 편해지는 사람이다. 같이 있을 만하다는 것은 어려운 삶 속에서 같이 살아갈만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런 친구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것 같다.

1987.2.3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는 문학이 어떻게 전체계를 싸잡아 비판할 수 있나를 가르쳐주었다. 그들에게선 자본주의는 이러이러한 결점이 있다는 생각보다는 체계 자체가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1987.2.10 사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은 욕망이다. 욕망은 인간을 관계 속에 집어 넣으며, 그 관계의 의미들 속에 집어 넣는다. 그 관계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로 나눌 수 있겠는데, 사르트르는 앞의 것을 실존적 정신분석이라 부르고, 뒤의 것을 사물과 그것의 질의 정신분석이라고 부른다.

1987. 2.11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토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 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누구처럼 되겠다가 아니면, 내가 왜 그렇게 돼가 된다. 그 마음가짐은 그의 이름붙이기 힘든 욕망을 달래고, 거기에 일시적인 이름을 붙이게 된다. 왜 일시적인가 하면, 전범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구조는 그렇게 많지 않겠지만.

1987.3.19 지라르의 욕망이론은 지식인들에겐 일정한 매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이야말로 책에서 읽은 대로 살려고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애를 쓰고 있으며, 자기가 전범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경쟁자로 변하는 것을 거의 매일 눈앞에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은 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중개의 집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스승이 어느 날 갑자기 경쟁자로 등장하는 날의 절망과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식인으로서는 그 두 체험이 다 같이 고통스러운 체험이며, 피하고 싶은 체험이지만,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제자로서 나는 스승을 모방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안 그러면 그에게 증오심을 느낄 테니까-스승으로서의 나는 제자들의 모방이 불가능한 곳에 가 있으려고 애를 쓴다-안 그러면 그에게 경쟁심을 느낄 테니까! 끔찍한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식 계층의 삶이다.

1988.8.2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이후부터, 단 하나의 담론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었다: 우리는 잘 살아야 하고, 잘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물질적으로 잘 산다는 것을, 그는 그냥 잘 산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조금 부유해졌다고, 과연 잘사는 것일까? 그는 물질을 올리고, 정신, 신앙, 문화를 낮춘다. 정신적인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종속된다. 언제까지? 다 피폐해져서, 물질적쾌락만 남을 때까지? 그는 상징적인 히로뽕 판매자였다!

1988. 10.12 파시즘이란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 강요이다.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엇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파시즘의 본질이다.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라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 나는 옳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뻔뻔함과 나는 옳으니까 내가 틀릴 리가 없다는 오만함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권위 있으니까 권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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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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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1977년 10월 27일, <애도 일기>, 18쪽)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애도'는 우리를 시스템의 부속품에서 벗어나 도덕적 주체로 서게하는 힘이다.

'애도' 는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떤 죽음과 희생은 공동체의 애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애도는 '위험한 기억'으로 급진적 저항을 생산한다. 
(ex 제주 4.3항쟁, 4.19, 부마항쟁 5.18,세월호 그리고 전태일과 수많은 열사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위험한 기억'에 근거한 고백이다.

정치신학자 메츠의 말처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의 억압적 체제에 대해 예언자적으로 항거하는 정치적 죽음이었고 불의한 구조에 도전하는 ‘위험한 기억’이다.
교회야말로 이 ‘위험한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기억의 공동체이고 
이러한 공동체는 ‘위험한 기억’의 이야기에 담긴 억울한 죽음의 희생자들과의 연대 속에서 잘못된 국가와 불의한 정치 구조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정치적 삶을 지향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위험한 기억'과 '애도'를 ‘치유(healing)’라는 명목으로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방애물로 취급한다. .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5쪽

'위험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재현하고 기념할때 비로서 '애도'는 짧은 슬픔의 감정으로 사라지지 않게된다.

이제 '애도'의 행위는 집단의 기억을 다시 재구성하여 도덕적 무감각과 굳어버린 양심을 녹여 공동체에게 회심의 과정을 걷게한다. 
계속되는 '애도'는 단순히 기억하도록 부추기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이 공동체의 이상을 만들어 가도록 만든다.

'위험한 기억'들이 살아있는 기억으로 날마다 예배되고 선포되고 또 교육될때 비로서 우리에게 희망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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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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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외부의 비판에 자극을 받아 변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종교는 역사적 경험속에서 외부의 압력에 대해 강한 면역력을 갖추고 있다.
종교의 변화는 그 안에서 종교의 근간을 이루는 원전과 전통을 다시 읽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찾아온다.

사사키 아타루는 그의 책에서 '읽기'가 '혁명'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6쪽)

저자는 '읽으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그리고 지금도 다른 이들은 옳다고 믿고 있는 세계관이 통째로 박살나는, 그래서 미칠 것만 같은 충격을 맛보는 치열하고 처절한 책읽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책은 사유의 근간이 되고, 그 사유가 바로 혁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직접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새롭게 세웠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무함마드의 혁명 또한 바로 읽기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무함마드에게 가브리엘은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라고 말한다. 
문맹자인 무함마드는 그때부터 천사를 매개로 신의 말을 읽게 된다.
무함마드에게 내린 '읽어라, 붓을 들어라' 라는 명령은 이슬람권에서 화려한 문학과 학문을 꽃피우게 한다.

서방 교회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고민하며 뜰을 거닐다가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라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 성경을 읽었다.
그가 읽었고 읽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삶에 변혁이 일어났다

그들의 읽기는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켰고, 그 영향은 지금도 우리에게 미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읽었다'는 행위다.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닙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텍스트는 넓습니다. 그것은 좀 더 넓습니다. 
자신의 신체라는 종이에 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춤으로 써도 됩니다. 
자신의 혀라는 종이에 신의 말이 스며든 꿀로 써도 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혁명을 불러들이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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