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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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행복한 책 읽기가 다시 나왔다. 
김현의 글을 정말 좋아한다 
그의 글을 통해 책 읽기를 배웠고 조금이라도 비슷한 글을 써보려고 아둥거리던 대학시절도 있었다.지금도 그러하다 
생각해보니 페북에 책 이야기를 긁적이고 있는것도 김현탓이다.
토론토 대학 로버츠 도서관에서 김현전집을 발견하고 얼마나 가슴 뛰었던지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 
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 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도 최인훈의 회색인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책 읽기의 괴로움 중에서

1986. 6.16 자기가 쓴 글들을 읽을 때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문장들 사이의 침묵이 점점 무서워진다.

1986. 6.19 낭만적 지식인은 조직력의 결여를 그 약점으로 갖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조직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싸움의 변두리로 밀려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수가 있다. 토마스 쿠오의 [진독수 평전]을 읽고 느낀 점.

1986. 11.21 우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가끔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 작가는 꼬집듯 말하고 있다.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란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같이 있는 것은 불편해서, 괜히 담배를 피우거나, 해도 괜챦고 안 해도 괜챦은 말을 계속해야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 편안해져서 구태여 의례적인 말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 같이 아무 말 않고 오래 앉아 있으면 불편해지는 사람을 친구라 부르기는 거북하다. 친구란 아내 비슷하게 서로 곁에 있는 것을 확인만 해도 편해지는 사람이다. 같이 있을 만하다는 것은 어려운 삶 속에서 같이 살아갈만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런 친구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것 같다.

1987.2.3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는 문학이 어떻게 전체계를 싸잡아 비판할 수 있나를 가르쳐주었다. 그들에게선 자본주의는 이러이러한 결점이 있다는 생각보다는 체계 자체가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1987.2.10 사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은 욕망이다. 욕망은 인간을 관계 속에 집어 넣으며, 그 관계의 의미들 속에 집어 넣는다. 그 관계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로 나눌 수 있겠는데, 사르트르는 앞의 것을 실존적 정신분석이라 부르고, 뒤의 것을 사물과 그것의 질의 정신분석이라고 부른다.

1987. 2.11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토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 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누구처럼 되겠다가 아니면, 내가 왜 그렇게 돼가 된다. 그 마음가짐은 그의 이름붙이기 힘든 욕망을 달래고, 거기에 일시적인 이름을 붙이게 된다. 왜 일시적인가 하면, 전범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구조는 그렇게 많지 않겠지만.

1987.3.19 지라르의 욕망이론은 지식인들에겐 일정한 매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이야말로 책에서 읽은 대로 살려고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애를 쓰고 있으며, 자기가 전범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경쟁자로 변하는 것을 거의 매일 눈앞에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은 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중개의 집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스승이 어느 날 갑자기 경쟁자로 등장하는 날의 절망과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식인으로서는 그 두 체험이 다 같이 고통스러운 체험이며, 피하고 싶은 체험이지만,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제자로서 나는 스승을 모방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안 그러면 그에게 증오심을 느낄 테니까-스승으로서의 나는 제자들의 모방이 불가능한 곳에 가 있으려고 애를 쓴다-안 그러면 그에게 경쟁심을 느낄 테니까! 끔찍한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식 계층의 삶이다.

1988.8.2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이후부터, 단 하나의 담론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었다: 우리는 잘 살아야 하고, 잘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물질적으로 잘 산다는 것을, 그는 그냥 잘 산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조금 부유해졌다고, 과연 잘사는 것일까? 그는 물질을 올리고, 정신, 신앙, 문화를 낮춘다. 정신적인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종속된다. 언제까지? 다 피폐해져서, 물질적쾌락만 남을 때까지? 그는 상징적인 히로뽕 판매자였다!

1988. 10.12 파시즘이란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 강요이다.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엇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파시즘의 본질이다.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라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 나는 옳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뻔뻔함과 나는 옳으니까 내가 틀릴 리가 없다는 오만함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권위 있으니까 권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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