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장혜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20년 7월
평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극우 정당을 찍는 유권자는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는 사회를 좀먹는 기생충이라고 생각하는 중년 남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전혀 달라보이는 이들 모두 편견에 기반해 한 사회집단 전체를 멸시한다는 점에서 그들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통점이 있다.
사회 심리학에서는 타인 혹은 대상에 대한 태도를 인지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 즉 명시적 태도와 암묵적 태도로 나누어 설명한다.
명시적 태도란 의식적 수준에서 인간이 타인이나 집단 혹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나 믿음을 뜻하고 암목적 태도란 무의식적 혹은 정서적 수준에서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생각을 의미한다.
편견 또한 이 두가지 영역에서 작동하면서 혐오와 배제, 차별을 낳는다.
2000년 미국 응급의학연보에 실린 논문 <인종과 진통제 처방>은 흑인이 백인에 비해 진통제 처방을 받지 못할 위험이 66%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자신은 인종에 편견을 없다고 믿는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암목적편견을 보여준 것이다.
암목적 편견은 오랫동안 문화와 교육 속에서 길들여진 산물이고 '우리'와 '너희' 를 구분지으며 '우리'에 끊임없이 정당성을 부여한 결과이다.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개방성’과 ‘관용’ 점수를 엄청나게 높게 주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다고 믿기에 더욱 상대와 나를 구분하고 경계 지으려 한다.
이 책은 소속 범주로서의 ‘우리’가 노동, 성별, 이민, 빈곤, 재산, 범죄, 소비, 관심, 정치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피고 있다.
타인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폄하가 경계 짓기와 소속감, 인정 욕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함부로 타인에게 손가락질하지 말고 자신과 타인의 판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저자는 우리가 가진 신념, 철학, 행동이 사회적 구조와 맞물려 차별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재된 독선과 멸시의 실체를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우리’와 ‘남들’을 경계짓고, 남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믿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스로를 높여 긍정적 자아상을 구축하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서론 중에서)
제1부 '일'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해. 그럼 성공할 수 있어"라는 말이 어떻게 폭력이 되고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열정을 강요하는 사회 이면에 복지나 임금이 어떻게 소외되는지 들여다본다.
2부 '성'에서는 '워킹맘' 등 일상적 표현에 담긴 여성 차별적 시선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남성 역할을 살피며 남녀 불평등의 구조와 고정관념 등을 분석한다.
제3부 '이주'에서는 불평등을 부추기는 이민자 담론과 함께 소속·신분에 따른 적대감의 정체를 파악한다.
4부 '빈부 격차'에서는 빈부 격차로 생기는 취업과 실업의 악순환과 그 사이에서 실업자가 사회 기생충이 돼가는 과정을 알아보고 기업가 마인드가 노동 시장의 책임을 어떻게 개인에게 전가하는지 일러준다.
5부 '범죄'에서는 좀도둑만 잡고 큰 도둑은 놓아주는 사법 불평등,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폭력 이면의 부조리를 분석한다.
6부 '소비'에서는 상품을 이용한 다양한 신분 과시 형태와 윤리적 소비가 신분의식이 돼버린 현실을 들춰낸다.
제7부 '관심'에서는 '팔로워'와 '좋아요'에 갇힌 디지털 자아의 문제점과 여기서 생겨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고찰한다.
마지막 8부 '정치'에서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무조건 적으로 돌리는 사회적 병폐와 서로를 깎아내리며 병리화하는 유권자들의 태도를 분석한다.
실제 '우리' 와 ‘너희’를 가르는 기준은 비합리적이다.
사회학자 빌헬름 하이트마이어는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장기 실업자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높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래 놀다가 겨우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이 실업자를 보면 일할 의지가 없다고 분노한다는 것이다.
많은 실업자들은 자신이 다른 실업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상황 탓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남들은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그들을 구분한다.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짓기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은 소비 영역이다.
역사학자 제이슨 테베는 2016년 ‘21세기 빅토리안’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의 논지는 19세기 부르주아지가 계급 지배를 위해 도덕을 이용했는데, 요즘 엘리트들도 똑같은 짓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진짜 ‘플렉스’는 윤리적 소비다.
음식은 유기농이어야 하고, 여행은 친환경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학자 매슈 애덤스(Matthew Adams)와 제인 레이스버러(Jayne Raisborough)는 공정 무역 제품의 소비를 세계화의 수혜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줄이기 위한 중산층의 노력이라고 해석한다.
소위 제3세계 공정 무역 농부들의 사진을 제품 포장지에 싣고 그들은 자기 잘못으로 가난한 것이 아니므로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deserving poor)’이라고 홍보한다.
하지만 정작 자국의 빈민들에게는 ‘도움받을 자격이 없는 빈민(undeserving poor)’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리고 그런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소비자) 집단에 비한다면 자신들은 정말이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라고 자부한다.
경계 짓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자식은 어떻게든 잘되기를 바라는 교육열에서부터 하류층을 멸시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중산층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선을 긋기에 바쁘다.
높은 계층에 속한다는 것은 더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쁜 집단과 거리를 두어야 하고 나쁜 집단의 악영향을 피해 가야 한다.
이런 식의 판단 기준이 과연 옳은지, 그것이 사회 불평등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쉬지 않고 성찰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독선의 게임 방식과 표현 형태는 다양하다. 유행이 지난 것도 있고 여전히 잘 먹히는 것도 있으며, 새롭게 등장한 것도 있다.
변치 말아야 할 것은 도덕적인 우월감과 경멸을 조장하는 세력을 잘 살피고 공개해 널리 알리는 일, 그리고 남을 향하는 엄격한 시선을 자주 자신에게로 돌리는 일이다.
이런 패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적어도 이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평등한 셈이다.
(나오는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