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유방사 - 어떻게 가슴은 여성의 ‘얼굴’이 되었는가?
다케다 마사야 엮음, 김경원 옮김, 이라영 해제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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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에 미국에서 ‘브래지어 태우기’가 여성들에게 하나의 운동이었듯이 유방을 둘러싼 역사만 살펴보아도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놓인 위치를 알 수 있다.

여성의 유방은 어머니로서의 가슴과 유혹하는 가슴으로 나뉘어 있지만 양쪽 모두 남성의 시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책은 서양과 동양의 신화와 예술에서 표현하는 가슴을 문화적 맥락 속에서 탐구한다.
젖 먹이는 성스러운 가슴에서부터 성적으로 유혹하는 가슴, 남성의 가슴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가슴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적고 있다.
가슴에 대한 시선의 주체를 남성이나 아이가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몸을 이야기하고 여성의 가슴이 성적대상화되는 과정을 문화사속에서 찾는다.
일본의 상품·매스컴이 바스트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여성의 신체, 그것도 성적 신체가 상품화되는 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상업주의에 편승하거나 편승당하는 측면이 한 가지 흐름이다.
한편 여성들은 바스트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자기 의지로 바스트와 여성성, 신체를 주체적으로 관리하는 동시에 자신의 바스트에 자긍심과 자신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전후 바스트관의 변천은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주체성을 획득해 나가는 흐름과 일치한다.
바스트는 여성 신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22쪽)
흥미로운 글은 경극을 주제로 한 '여장 배우가 벗을 때: 전족, 나긋한 허리, 환상의 유방' 이다.
경극에는 크게 나누어 ‘남자 역할生’, ‘여자 역할旦’, ‘평범하지 않은 남자 역할淨’, ‘도깨비 역할丑’ 등 네 가지 역할이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극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역할을 남성만이 연기했다.
그러므로 경극의 ‘단’ 연기는 ‘남단男旦’의 연기로만 이뤄졌고, 남성이 여성 신체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기교를 고안해야 했다.
반금련 경극중 여장남자배우는 맨가슴을 드러내며 연기를 한다.
관객들은 마치 여성의 유방을 보는것처럼 반응한다.
극중 유혹하는 가슴은 실재로서 존재하는게 아니라 관객들 머리속에서 상상으로 존재하며 그 역활을 다 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가슴은 정말 본래적으로 성적인가?
책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문화사속에서 그러려내는 수없이 많은 가슴의 상징 속에서 성적인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욕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남성과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편협한 시각이 만들어낸 또다른 환상일 뿐이다.
여성의 가슴은 다양한 형식으로 공격받는다.
위안부 소녀상의 가슴을 성추행한 사건도 있었다.
여성 조각상조차 가슴을 위협받는다.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여성들이 겪은 폭력은 남성에 대한 그것과는 달랐다.
대검으로 가슴을 난자한 폭력에 대한 증언과 증거자료가 있다.
전쟁에서 여성의 신체를 훼손하는 방식과 같다.
순교한 여성 성인의 그림에서 유방을 도려낸 장면을 볼 수 있듯이 여성의 가슴은 학살의 역사에서 더욱 집중적으로 공격받았다.
가슴을 향한 폭력도 기록되어야 한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믿는 건 내 가슴뿐’이라며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인간의 손과 발, 세치 혀 등은 모두 타인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되지만 오직 가슴만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며.
그렇다.
인간의 몸 중에서 타인을 공격하지 않는 건 정말 가슴이다.
상처를 받을지언정 누구를 해치지 않는다.
그 가슴이 가장 편한 상태로 내버려 두자.(이라영 해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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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호크니 리커버 에디션)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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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작은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오랜만에 읽은 SF 소설..일단 정말 잘 읽히고 재미있다.
7편의 단편들은 미래를 배경으로 오늘을 이야기한다.
감성과 감정을 주로 이야기하며 따뜻한 상상력으로 사람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더구나 그 사람들도 노인, 여성, 장애인, 이주민, 비혼모 그리고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1. 조화로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2. 스펙트럼
할머니는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평생 동안 유리를 수집했다.
할머니의 서재를 채우는 유리 수집품은 무척 다양했다.
유리로 만든 공예품에서 프리즘, 렌즈, 거울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는 그 유리들로 책이나 그림을 들여다보기도하고, 손전등을 그 위에 비추기도 했다.
유리를 모으는 이유를 할머니가 직접 말해준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해보곤 했다.
빛을 모으고, 분리하고, 보통의 감각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보게 하는 도구, 할머니가 행성에 머물며 가장 절실히 원했던 것들은 아마 그런 도구들이었을 것이다.
3. 공생 가설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5. 감정의 물성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잠시 머물렀다 사라져버린 향수의 냄새.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
오래된 벽지의 얼룩.
탁자의 뒤틀린 나뭇결.
현관문의 차가운 질감.
바닥을 구르다 멈춰버린 푸른색의 자갈.
그리고 다시, 정적.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나는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떨구었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6. 관내분실
연결을 끊어도 데이터는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삶은 단절된 이후에도 여전히 삶일까.
지민과 엄마는 작은 서재에 있었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가상의 공간이다.
책과 노트, 벽을 채운 그림들,
은하가 지민의 엄마이기 전에 사랑했던 것들,
자신의 삶을 구성했던 것들로 채워진 공간.
…공간 속에서 은하는 어느 때보다도 선명해 보였다.
7.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가윤은 이 우주에 와야만 했다.
이 우주를 보고 싶었다.
가윤은 조망대에 서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까지 천천히 우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언젠가 자신의 우주 영웅을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우주저편의 풍경이 꽤 멋졌다고 말해줄 것이다.
어디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싶다.
앞으로 소설을 계속 써나가며 그 이해의 단편들을, 맞부딪히는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한다.(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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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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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바라건데,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
낯선 나와 마주치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믿는 순간 편견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지고,
믿는 순간 맞은편 차량과 추돌한다.
한 고비 돌 때마다 가능한 길게 클랙슨을 울려야 한다.
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어떤 예의나 존중,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저자는 37개의 칼럼을 통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사는 지 묻는다.
한국 사회는 조직에 대한 예의, 국가에 대한 예의는 차리라고 하면서 사람에 대해선 건너뛰기 일쑤였습니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사람은 고려의 대상에서 빠지곤 했지요.
이제 사람에 대한 예의는 시대를 움직이는 정신입니다.(작가의 말중에서)
자기 자신이 모르게 짓는 악을 외면하는 게으름의 죄악을 넘어서 오롯이 인간으로 살기위해 애써야 하고 정의는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지만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결국 우리가 향해야 하는 건 결과가 아닌 변화를 찾는 과정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는 건 큰 병을 앓았거나 내면이 부서지는 좌절을 경험했을 때다.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졌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은 마주하지 못했던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전제가 있다. 너무 늦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스스 로의 비루함을 깨닫고, 유턴을 해야겠다고 용기 내는 것이다.
그러할 때 부끄러움은 힘이 된다.
온전히 부끄러움의 힘으로 내가 달아났던 그곳으로 돌아올수 있다.
다시 돌아온 나는 이전에 내가 아니다.(69쪽)
힘든 일이라고 중요한 일이라고 꼭 인상을 찌푸리며 할 필요는 없다.
늘 눈앞을 가로막는 적은 자기연민이다.
나중일은 나중에 고민하고 '뒷 담화'는 남들게에 맡기고 성큼성큼 즐거운 마음으로 가면 된다.
내가 가보고 싶은대로 가보면 된다.(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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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예배력에 따른 예수의 의미 마태복음 - 성서 문자주의는 이방인들의 이단
존 쉘비 스퐁 지음, 변영권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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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적으며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적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로 적고 있다.
다윗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으로 밧세바를 강간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남편 우리야를 죽이고 책임을 핑계로 밧세바를 첩으로 데려온다.
예언자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그가 저지른 죄악의 결과를 선포한다.
"너는 이렇게 나를 무시하여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다가 네 아내로 삼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분열과 멸망의 시작은 다윗의 성폭행으로부터 시작된거나 다름없다는 선포이다.
이 사건으로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지만 실패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밧세바도 순순히 고개숙인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후 밧세바는 나단과 함께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 우리야를 살해하는데 공모했던 요압 일파를 숙청한다.
(사실 솔로몬이 나단과 밧세바가 서로 사랑해서 낳은 자식이기를 바라지만 너무근거가 없어서......)
예수의 족보에 나온 네명의 여성들은 시대가 그들에게 요구한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거룩함을 드러낸 존재들이다.
(스퐁의 해석과는 좀 다르지만서도....) 예수의 족보에 나타난 여성들에 대해 스퐁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하느님은 근친상간, 성매매, 유혹, 간음에서도 거룩함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니 예수 운동의 대적자들이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의 출신이 천하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성품을 모욕하게 내버려 두어라.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삶에서 거룩함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간의 어떤 환경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10쪽)
스퐁은 이 책에서 마테복음의 저작의도와 편집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작의도를 알게 된다는 것은 방향성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마태복음의 지향을 이어받아 새로운 해석을 해나가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스퐁은 성서해석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과 방향을 알려주려고 한다.
나는 성서와 성서 연구가 내 삶과 믿음의 깊은 원천임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또한 성서가 수세기 동안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일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이 책은 나에게 생명을 주어왔으며, 나는 이 책이 세속사회에서 점차 무시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대안적인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 착하지만 무지한 “신자들”이 성서에 부여한 문자주의의 해로움으로부터 성서를 해방하기 위해, 내가 성서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었던 이유다.
자신들이 하느님이나 예수와 얼마만큼 깊은 관계라고 말하건 간에, 나는 성서 문자주의자들로부터 성서를 해방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29쪽)
그리스도교의 문자주의나 근본주의는 교회의 “이방인 포로기(Gentile captivity)”라고 부르게 된 기간에 태어난, 유대적 가르침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이방인들의 이단(a Gentile heresy)”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마태복음이 유대력의 안식일과 거룩한 절기(holy days)에 읽기 위한 예수 이야기들을 제공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고 보고 마태복음을 해석해 나간다.
사람들이 예수의 생애의 세부사항을 일종의 전기 양식(biographical pattern)으로 정리할 생각을 하기 훨씬 전부터 예수는 회당에서 “설교” 되고 있었다.
또한 이 양식(회당 설교 양식)은 예수 이야기가 연대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성서와 회당 예배력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유대인들의 구술(story telling)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기본적으로 예수의 유대인 추종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때까지는 복음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유대인 공동체가 아니게 되자 그러한 이해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86쪽)
마태복음의 저자는 목격자로서의 보고가 아니라는 회당예배의 렌즈를 통해서 예수 경험의 힘을 해석하고 있다.
마태의 회중을 구성하고 있는 유대인 예수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예배 언어를 사용해서 예수를 전한다.
히브리성서에 나타난 유대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신년절, 속죄일, 초막절, 수전절 등을 이해하고 이 절기의 근거가 되는 모세의 발자취를 따라 갈때만이 비로서 마태복음의 저작의도와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열린다.
이러한 유대적배경을 인식하지 못한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은 잘못된 교리와 믿음을 만들어 냈다.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복음서의 구절을 보게 되었을 때, 1세기 유대인들은 이것이 티쉬리월 10일에 있는 속죄일(욤 키푸르, [Yom Kippur]) 의식에 관한 언급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 유대인들은 이 익숙한 유대교의 제의적 표현들이 그토록 심각하게 왜곡되어, 그리스도교 왕국의 기초가 되어버린 “대속(substitutionary atonement)”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거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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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주문은 그리스도교라 불리는 모든 것에 결합되었다.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이 된 대리적 속죄는 궁극적으로, 처벌하는 괴물인 하느님, 하느님의 영원한 희생자인 그리스도, 죄책감으로 나약해진 특성을 지닌 인간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믿는 최후의 추종자들을 설득하는 데 또 한 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스도교가 일반적으로 오해되어 온 방식에는 미래가 없다.
나는 매우 헌신적이며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을 공언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유대인들의 속죄일 관습으로부터 잘못 도출해 낸 속죄 교리에 대한 오해를 문자화했을 때 시작된 것이다. (242쪽)
번역해주신 분께 무한한 감사를......
스퐁 본인은 더이상 책을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번역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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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장혜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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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극우 정당을 찍는 유권자는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는 사회를 좀먹는 기생충이라고 생각하는 중년 남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전혀 달라보이는 이들 모두 편견에 기반해 한 사회집단 전체를 멸시한다는 점에서 그들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통점이 있다.
사회 심리학에서는 타인 혹은 대상에 대한 태도를 인지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 즉 명시적 태도와 암묵적 태도로 나누어 설명한다.
명시적 태도란 의식적 수준에서 인간이 타인이나 집단 혹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나 믿음을 뜻하고 암목적 태도란 무의식적 혹은 정서적 수준에서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생각을 의미한다.
편견 또한 이 두가지 영역에서 작동하면서 혐오와 배제, 차별을 낳는다.
2000년 미국 응급의학연보에 실린 논문 <인종과 진통제 처방>은 흑인이 백인에 비해 진통제 처방을 받지 못할 위험이 66%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자신은 인종에 편견을 없다고 믿는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암목적편견을 보여준 것이다.
암목적 편견은 오랫동안 문화와 교육 속에서 길들여진 산물이고 '우리'와 '너희' 를 구분지으며 '우리'에 끊임없이 정당성을 부여한 결과이다.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개방성’과 ‘관용’ 점수를 엄청나게 높게 주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다고 믿기에 더욱 상대와 나를 구분하고 경계 지으려 한다.
이 책은 소속 범주로서의 ‘우리’가 노동, 성별, 이민, 빈곤, 재산, 범죄, 소비, 관심, 정치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피고 있다.
타인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폄하가 경계 짓기와 소속감, 인정 욕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함부로 타인에게 손가락질하지 말고 자신과 타인의 판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저자는 우리가 가진 신념, 철학, 행동이 사회적 구조와 맞물려 차별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재된 독선과 멸시의 실체를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우리’와 ‘남들’을 경계짓고, 남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믿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스로를 높여 긍정적 자아상을 구축하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서론 중에서)
제1부 '일'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해. 그럼 성공할 수 있어"라는 말이 어떻게 폭력이 되고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열정을 강요하는 사회 이면에 복지나 임금이 어떻게 소외되는지 들여다본다.
2부 '성'에서는 '워킹맘' 등 일상적 표현에 담긴 여성 차별적 시선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남성 역할을 살피며 남녀 불평등의 구조와 고정관념 등을 분석한다.
제3부 '이주'에서는 불평등을 부추기는 이민자 담론과 함께 소속·신분에 따른 적대감의 정체를 파악한다.
4부 '빈부 격차'에서는 빈부 격차로 생기는 취업과 실업의 악순환과 그 사이에서 실업자가 사회 기생충이 돼가는 과정을 알아보고 기업가 마인드가 노동 시장의 책임을 어떻게 개인에게 전가하는지 일러준다.
5부 '범죄'에서는 좀도둑만 잡고 큰 도둑은 놓아주는 사법 불평등,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폭력 이면의 부조리를 분석한다.
6부 '소비'에서는 상품을 이용한 다양한 신분 과시 형태와 윤리적 소비가 신분의식이 돼버린 현실을 들춰낸다.
제7부 '관심'에서는 '팔로워'와 '좋아요'에 갇힌 디지털 자아의 문제점과 여기서 생겨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고찰한다.
마지막 8부 '정치'에서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무조건 적으로 돌리는 사회적 병폐와 서로를 깎아내리며 병리화하는 유권자들의 태도를 분석한다.
실제 '우리' 와 ‘너희’를 가르는 기준은 비합리적이다.
사회학자 빌헬름 하이트마이어는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장기 실업자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높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래 놀다가 겨우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이 실업자를 보면 일할 의지가 없다고 분노한다는 것이다.
많은 실업자들은 자신이 다른 실업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상황 탓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남들은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그들을 구분한다.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짓기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은 소비 영역이다.
역사학자 제이슨 테베는 2016년 ‘21세기 빅토리안’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의 논지는 19세기 부르주아지가 계급 지배를 위해 도덕을 이용했는데, 요즘 엘리트들도 똑같은 짓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진짜 ‘플렉스’는 윤리적 소비다.
음식은 유기농이어야 하고, 여행은 친환경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학자 매슈 애덤스(Matthew Adams)와 제인 레이스버러(Jayne Raisborough)는 공정 무역 제품의 소비를 세계화의 수혜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줄이기 위한 중산층의 노력이라고 해석한다.
소위 제3세계 공정 무역 농부들의 사진을 제품 포장지에 싣고 그들은 자기 잘못으로 가난한 것이 아니므로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deserving poor)’이라고 홍보한다.
하지만 정작 자국의 빈민들에게는 ‘도움받을 자격이 없는 빈민(undeserving poor)’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리고 그런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소비자) 집단에 비한다면 자신들은 정말이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라고 자부한다.
경계 짓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자식은 어떻게든 잘되기를 바라는 교육열에서부터 하류층을 멸시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중산층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선을 긋기에 바쁘다.
높은 계층에 속한다는 것은 더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쁜 집단과 거리를 두어야 하고 나쁜 집단의 악영향을 피해 가야 한다.
이런 식의 판단 기준이 과연 옳은지, 그것이 사회 불평등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쉬지 않고 성찰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독선의 게임 방식과 표현 형태는 다양하다. 유행이 지난 것도 있고 여전히 잘 먹히는 것도 있으며, 새롭게 등장한 것도 있다.
변치 말아야 할 것은 도덕적인 우월감과 경멸을 조장하는 세력을 잘 살피고 공개해 널리 알리는 일, 그리고 남을 향하는 엄격한 시선을 자주 자신에게로 돌리는 일이다.
이런 패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적어도 이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평등한 셈이다.
(나오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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