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예배력에 따른 예수의 의미 마태복음 - 성서 문자주의는 이방인들의 이단
존 쉘비 스퐁 지음, 변영권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적으며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적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로 적고 있다.
다윗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으로 밧세바를 강간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남편 우리야를 죽이고 책임을 핑계로 밧세바를 첩으로 데려온다.
예언자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그가 저지른 죄악의 결과를 선포한다.
"너는 이렇게 나를 무시하여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다가 네 아내로 삼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분열과 멸망의 시작은 다윗의 성폭행으로부터 시작된거나 다름없다는 선포이다.
이 사건으로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지만 실패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밧세바도 순순히 고개숙인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후 밧세바는 나단과 함께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 우리야를 살해하는데 공모했던 요압 일파를 숙청한다.
(사실 솔로몬이 나단과 밧세바가 서로 사랑해서 낳은 자식이기를 바라지만 너무근거가 없어서......)
예수의 족보에 나온 네명의 여성들은 시대가 그들에게 요구한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거룩함을 드러낸 존재들이다.
(스퐁의 해석과는 좀 다르지만서도....) 예수의 족보에 나타난 여성들에 대해 스퐁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하느님은 근친상간, 성매매, 유혹, 간음에서도 거룩함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니 예수 운동의 대적자들이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의 출신이 천하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성품을 모욕하게 내버려 두어라.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삶에서 거룩함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간의 어떤 환경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10쪽)
스퐁은 이 책에서 마테복음의 저작의도와 편집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작의도를 알게 된다는 것은 방향성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마태복음의 지향을 이어받아 새로운 해석을 해나가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스퐁은 성서해석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과 방향을 알려주려고 한다.
나는 성서와 성서 연구가 내 삶과 믿음의 깊은 원천임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또한 성서가 수세기 동안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일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이 책은 나에게 생명을 주어왔으며, 나는 이 책이 세속사회에서 점차 무시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대안적인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 착하지만 무지한 “신자들”이 성서에 부여한 문자주의의 해로움으로부터 성서를 해방하기 위해, 내가 성서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었던 이유다.
자신들이 하느님이나 예수와 얼마만큼 깊은 관계라고 말하건 간에, 나는 성서 문자주의자들로부터 성서를 해방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29쪽)
그리스도교의 문자주의나 근본주의는 교회의 “이방인 포로기(Gentile captivity)”라고 부르게 된 기간에 태어난, 유대적 가르침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이방인들의 이단(a Gentile heresy)”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마태복음이 유대력의 안식일과 거룩한 절기(holy days)에 읽기 위한 예수 이야기들을 제공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고 보고 마태복음을 해석해 나간다.
사람들이 예수의 생애의 세부사항을 일종의 전기 양식(biographical pattern)으로 정리할 생각을 하기 훨씬 전부터 예수는 회당에서 “설교” 되고 있었다.
또한 이 양식(회당 설교 양식)은 예수 이야기가 연대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성서와 회당 예배력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유대인들의 구술(story telling)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기본적으로 예수의 유대인 추종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때까지는 복음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유대인 공동체가 아니게 되자 그러한 이해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86쪽)
마태복음의 저자는 목격자로서의 보고가 아니라는 회당예배의 렌즈를 통해서 예수 경험의 힘을 해석하고 있다.
마태의 회중을 구성하고 있는 유대인 예수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예배 언어를 사용해서 예수를 전한다.
히브리성서에 나타난 유대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신년절, 속죄일, 초막절, 수전절 등을 이해하고 이 절기의 근거가 되는 모세의 발자취를 따라 갈때만이 비로서 마태복음의 저작의도와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열린다.
이러한 유대적배경을 인식하지 못한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은 잘못된 교리와 믿음을 만들어 냈다.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복음서의 구절을 보게 되었을 때, 1세기 유대인들은 이것이 티쉬리월 10일에 있는 속죄일(욤 키푸르, [Yom Kippur]) 의식에 관한 언급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 유대인들은 이 익숙한 유대교의 제의적 표현들이 그토록 심각하게 왜곡되어, 그리스도교 왕국의 기초가 되어버린 “대속(substitutionary atonement)”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거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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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주문은 그리스도교라 불리는 모든 것에 결합되었다.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이 된 대리적 속죄는 궁극적으로, 처벌하는 괴물인 하느님, 하느님의 영원한 희생자인 그리스도, 죄책감으로 나약해진 특성을 지닌 인간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믿는 최후의 추종자들을 설득하는 데 또 한 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스도교가 일반적으로 오해되어 온 방식에는 미래가 없다.
나는 매우 헌신적이며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을 공언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유대인들의 속죄일 관습으로부터 잘못 도출해 낸 속죄 교리에 대한 오해를 문자화했을 때 시작된 것이다. (242쪽)
번역해주신 분께 무한한 감사를......
스퐁 본인은 더이상 책을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번역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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