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호크니 리커버 에디션)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작은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오랜만에 읽은 SF 소설..일단 정말 잘 읽히고 재미있다.
7편의 단편들은 미래를 배경으로 오늘을 이야기한다.
감성과 감정을 주로 이야기하며 따뜻한 상상력으로 사람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더구나 그 사람들도 노인, 여성, 장애인, 이주민, 비혼모 그리고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왜 지구에 남을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
보호와 평화를 벗어나,
그렇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보고도 왜 여기가 아닌 그 세계를 선택할까?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할머니는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평생 동안 유리를 수집했다.
할머니의 서재를 채우는 유리 수집품은 무척 다양했다.
유리로 만든 공예품에서 프리즘, 렌즈, 거울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는 그 유리들로 책이나 그림을 들여다보기도하고, 손전등을 그 위에 비추기도 했다.
유리를 모으는 이유를 할머니가 직접 말해준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해보곤 했다.
빛을 모으고, 분리하고, 보통의 감각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보게 하는 도구, 할머니가 행성에 머물며 가장 절실히 원했던 것들은 아마 그런 도구들이었을 것이다.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잠시 머물렀다 사라져버린 향수의 냄새.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
오래된 벽지의 얼룩.
탁자의 뒤틀린 나뭇결.
현관문의 차가운 질감.
바닥을 구르다 멈춰버린 푸른색의 자갈.
그리고 다시, 정적.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나는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떨구었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연결을 끊어도 데이터는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삶은 단절된 이후에도 여전히 삶일까.
지민과 엄마는 작은 서재에 있었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가상의 공간이다.
책과 노트, 벽을 채운 그림들,
은하가 지민의 엄마이기 전에 사랑했던 것들,
자신의 삶을 구성했던 것들로 채워진 공간.
…공간 속에서 은하는 어느 때보다도 선명해 보였다.
가윤은 이 우주에 와야만 했다.
이 우주를 보고 싶었다.
가윤은 조망대에 서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까지 천천히 우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언젠가 자신의 우주 영웅을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우주저편의 풍경이 꽤 멋졌다고 말해줄 것이다.
어디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싶다.
앞으로 소설을 계속 써나가며 그 이해의 단편들을, 맞부딪히는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한다.(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