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1
R. F. 쿠앙 지음, 이재경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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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 쿠앙의 소설 『바벨』 1권은 처음부터 독자를 낯선 세계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단순히 판타지 소설일 거라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언어와 번역, 그리고 제국주의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생각보다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야기는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로빈은 중국 출신 소년으로, 어린 시절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고 영국 학자에게 발견되어 런던으로 오게 된다. 이후 그는 옥스퍼드를 본뜬 ‘바벨 연구소’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언어와 번역을 배우게 된다. 바벨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꼭 필요한 지식을 다루는 곳이다. 언어와 번역을 통해 힘을 얻고, 그것이 실제 마법처럼 세상에 영향을 준다는 설정이 독특하고 신선했다.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번역의 힘이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보통 번역을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 정도로 생각하지만, 작가는 그 작은 차이와 간극 속에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고 보여준다. 이 힘은 은판과 결합해 실제로 현실을 바꾸는 마법으로 나타난다. 언어 하나, 단어 하나가 가진 무게를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니, 평소에 가볍게 쓰던 말들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바벨은 단순히 매혹적인 학문의 장이 아니었다. 로빈이 배우고 있는 그 지식이 결국은 영국 제국의 이익을 위해 쓰이고, 식민지를 억압하고 약탈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무거워진다. 로빈은 학문에 대한 사랑과 제국주의 현실 사이에서 점점 혼란을 겪는다. 그의 갈등을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배움은 과연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위한 수단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1권이 무겁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바벨 연구소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교류는 따뜻하고 재미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와 언어,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작은 농담이나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장면들이 있어 읽는 동안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도 늘 묘한 긴장감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결국 제국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다가온 건 ‘언어는 힘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였다. 평소에는 그냥 당연하게 쓰는 말과 글이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책장을 덮고도 언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바벨』 1권은 판타지 소설로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 있는 메시지 덕분에 여운이 오래 남는다. 언어와 번역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풀어낸 책은 처음이었다. 무겁지만 동시에 매혹적이고, 어렵지만 쉽게 읽히는 부분도 있어서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에서 로빈이 어떤 선택을 하고, 바벨 연구소가 어떻게 변해갈지 무척 궁금하다. 나 자신도 언어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바벨』 1권은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언어와 그것이 가진 힘을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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