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우리 사람 열린책들 세계문학 29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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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아바나. 세계 2차 대전 이후 냉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혼란의 시대, 그 속에서 영국인 제임스 워몰드는 진공청소기를 판매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내와는 이미 이혼했고, 아름답지만 사치를 즐기는 17살 딸 밀리를 혼자 키우는 그의 삶은 고단하다. 절친한 친구는 은퇴한 독일인 의사 하셀바허. 하지만 쿠바는 고문을 당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뉠 만큼 어지러운 곳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진공청소기를 파는 일조차 버거운 와중, 뜻밖의 제안이 그에게 날아든다. 영국 정부의 첩보조직 카리브해 지부에서 그를 스파이로 영입한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워몰드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고, 정보원이 되지만 곧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요원을 만들어내고, 진공청소기의 설계도를 무기 도면으로 위조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야말로 거짓의 연속.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허위 정보는 본국 정보부에서 철저히 믿어버린다.

돈이 밀리의 생활과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워몰드는 점점 더 많은 거짓말을 쌓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자신이 만든 허구 속의 요원이 실제로 죽고, 정보부는 진지하게 그 내용을 분석하며 심지어 비서 비어트리스를 현지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상황은 더 이상 농담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딸을 노리는 쿠바 경찰 세구라 대령의 위협, 하셀바허의 죽음, 그리고 자신을 겨냥한 독살 시도까지. 이제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진실을 고백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위선을 유지할 것인가?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한 개인의 거짓말이 어떻게 조직과 국가를 휘두를 수 있는지, 그리고 냉전 시대의 정보전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영국 정보부는 워몰드가 보낸 진공청소기의 도면을 거대한 무기 음모로 착각하고, 존재하지 않는 요원에게 거액을 지급하며, 자신들의 정보 판단 능력을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이 작품은 단순한 스파이 소설이 아니다. 어리숙한 첩보전의 이면에 숨어 있는 사회 풍자, 냉전의 불안, 인간의 나약함이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려진다. 읽는 내내 웃음과 긴장감이 교차하며, ‘정말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진실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오래된 고전 같지만, 지금도 유효한 통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정보와 진실, 거짓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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