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하우스
전지영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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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출판사 서평 이벤트를 통해 받은 도서입니다. -



창비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읽은 소설집. 신춘문예를 휨쓸고 등단한 지 얼마 안 되어 젊은 작가상도 탔다고 해 기대가 됐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전반적으로 불안하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고 불안정하다.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고 거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은 그저 그 상태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럼에도 뒷맛이 찝찝하거나, 다음 편을 읽기가 꺼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운이 남아 읽은 작품을 곱씹으며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됐다. (하루에 1편씩 읽었다.)

개인적으로 소설집에 실린 8편의 작품들이 나름대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학교폭력에 연루된 자녀를 둔 <말의 눈>과 <남은 아이>(각 소설의 아이는 모두 어느 부분에서는 피해자 같기도 어느 부분에서는 가해자 같기도 하다), 끊임없이 불안을 유발하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말의 눈>과 <쥐>(왜 앞부분에 배치했는지 알 것 같다), 사회적 계급간 차이와 차별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말의 눈>(지희)과 <언캐니밸리>, <소리 소문 없이>(청한동), 전반적으로 우울한 소설 속에서 묘한 희망을 남기는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과 <소리 소문 없이>, <남은 아이>,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룬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맹점>과 <뼈와 살>, 가상의 동네 청한동을 배경으로 하는 <언캐니밸리>와 <소리 소문 없이>(연작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예술하는 주인공과 열등감,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나오는 <소리 소문 없이>와 <뼈와 살> 등. 개인적으로 <소리 소문 없이>는 재밌게 읽다가 갑자기 10년 후를 보여주는 드라마처럼 시간이 점프해버리고, 결혼했다는 언급도 없었는데 아이의 등장을 마지막으로 끝나는 게 갑작스러워 아쉬웠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소설이 재미있었다. 이 중 가장 인상깊었던 <언캐니밸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써보고자 한다.



언캐니밸리

-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이라는 타이틀이 서평단 신청에 한몫했다. 신인 작가가 신춘문예 당선되는 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것이므로(물론 2관왕은 정말 대단하다) 그러려니 싶었는데, 정말 이른 시기에 젊은 작가상까지 수상했다는 게 내 흥미를 끌었다.

언캐니밸리라는 낯선 제목은 불쾌한 골짜기라는 익숙한 단어의 영어버전이었다. (막연히 언캐니밸리가 청한동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랜드마크라든가 지형의 특성이라든가...) 소설을 읽으며 내내, 동일하게 청한동이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하는 <소리 소문 없이>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신분과 계급(부유층과 중산층, 빈민층)을 다룬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자본과 외모 등의 사회적 지위를 포함해) 빈민층인 '나', 중산층인 '당신(장신영 혹은 김승민)', 그리고 부유층인 노부부. 빈민층은 중산층을 선망하고, 중산층은 부유층을 선망한다. 그리고 젊음과 건강, 외적인 면으로 한정지었을 때 (여전히) 빈민층인 '나'와 중산층인 노부부는 부유층인 '당신'을 선망한다. '나'는 택시 안에서만 '당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줄 수 있다. '나'의 운전석에서 특수 운전 장치를 본 여자 승객은 '나'가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겁을 먹는다. 심지어 '나'가 담배를 태우러 택시 밖으로 내렸을 때는 남자 승객도 '악' 소리를 내며 놀란다.

반면 '당신'은 예약표시등이 켜져있는데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택시에 승객으로 타 운전사가 앞에 있음에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잣말이어서 굳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당신'을 남들보다 무심한 사람이라 여기지만, 이는 기질이나 성격이라기보다 '당신'이 여태껏 누려온 특권이 몸에 밴 것에 가깝다. '당신'에게 택시는 돈을 내면 청한동 주택까지 데려다주는 이동수단이다. 돈을 지불했기에 이용하는 서비스. 거기에 운전자는 운전을 한다는 기능으로 존재할 뿐, 운전을 하는 '사람'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이는 중세 시대까지 귀족과 노예의 관계에 가깝다. 우연히 생물학적 종(인간)은 같으나 그 외 모든 것은 다른 생명체.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98% 이상 유사하다고 하나 인간과 침팬지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듯이.

그리고 이는 대상을 바꾸어 '당신'과 노부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노부부에게 '당신'은 아마 조각상이나 미술작품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름다워 감상하고 싶은 것. 그러나 역시 인간은 아닌 것. 그래서 '살 수도 해칠 수도, 끝내 간직할 수도 있는' 것.

읽으며 계속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다. (자본주의적) 계급, 운전사라는 공통분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시간이 넘는 영화와 달리 소설은 사건의 전모를 알려주지 않는다. 누가, 왜 그녀에게 염산 테러를 했는가보다는 그저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나'가 서술자여서(정확히는 그런 '나'를 서술자로 설정함으로써 <기생충>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 때문)일 것이다.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이 소설을 전형적인 스릴러 소설로 읽어내는 해설을 보았다. 생각해보면 장르적으로는 스릴러에 가깝긴 한데 읽는 동안은 스릴러 플롯보다는 사회고발적 주제의식이 더 직관적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수술과 별장 음악회로부터 소설을 써내려갔다는 작가노트를 읽었을 때, 플롯보다 주제의식에 더 집중하며 읽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다소 직설적인 제목'이라는 김건형 평론가의 평과 달리 '언캐니밸리'라는 제목이 쉽게 와닿지는 않았는데, 로봇이 인간과 유사해질 때 특정 시점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을 어떤 것의 상징이라고 보아야할지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노부부 입장에서의 '그녀'(약을 가져가는 것을 눈감아줬지만, 특정 시점에서 선을 넘어버리는-<소리 소문 없이>의 장목련 아주머니처럼)인지, 아니면 청한동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계속 강남 생각이 났다) 작금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 자체인지, 아니면 언캐니밸리라는 단어가 주는 기괴함 그 자체를 의도한 건지 등을 떠올려보았다. 아직 소설집의 평론은 아껴두고 안 읽고 있는데, 힌트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서평을 쓰기 전 책 소개 및 작가 소개를 반복해 읽었다. "신중하고도 성숙한 시선이 돋보이며 마지막까지 긴장을 끌고 가는 필력이 남다르다", "신인이라고 믿기 어려운 정연하고도 능란한 필치로 현대사회의 일면을 묘파해나간다"는 평이 인상적이었다. 읽으며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소설가가 이런 느낌 아닌가?'하고 생각했지만 등단한 지 (정말로) 얼마 안된 신인 작가가 '대부분의 소설가'와 비슷한 느낌을 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같다.

앞으로 전지영 작가의 이름을 보게 되면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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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당신 편 - 마음의 힘을 기르는 ‘외상 후 성장’의 심리학
한창수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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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이벤트 당첨으로 받은 책...!

제목과 미리보기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신청했는데, 아쉽게도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출판사 소개에서는 제목인 '무조건 당신 편', 그리고 '외상 후 성장'이라는 문구에 초점을 맞췄기에 나는 이 책이 외상 후 성장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저자가 그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내 편을 들어주는 거라 생각했다. ㅋㅋㅋㅋ 하지만 읽어 보니 익숙한, 에세이 느낌의 심리서였다.

심리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접할 대로 접한 사람이라서... 저자별 말투와 출판사별 표지만 조금 다른, 비슷비슷한 책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다... ㅜㅜ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구...

'무조건 당신 편'이라는 말도 매 에피소드마다 나오면서 해당 내담자를 이해하는 형식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고, (맨 처음과 맨 끝에만 나옴)

'외상 후 성장'도 새로운 개념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저 상처를 성장의 계기로 삼는 거였다... 최근 내가 꽂힌 책들이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해주는 것들이라, 그게 없어서 아쉬웠다. 그저 좋은 얘기만 늘어놓는 느낌... ㅜㅜ

개인적인 기대가 너무 컸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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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 - 상대의 말이 듣기 힘들 때 후회되는 말을 했을 때, 꼬인 관계를 풀어주는 연결의 대화 수업
박재연 지음 / 한빛라이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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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

 

몇 년 전, 날이 더운 여름이었다. 책을 읽으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더위에 예민한 아빠는 에어컨을 틀었는데, 내가 방문을 닫고 에어컨 바람을 안 쐬는 게 이해가 안 가셨나 보다. 부엌에서 특유의 구시렁이 시작됐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방문은 꽉 닫고 틀어박혀서... 참나...”

가만히 듣고 있다가 화가 나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제가 방문을 닫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거예요, 아니면 걱정되시는 거예요?”

걱정돼서 그런다, 걱정돼서! 날이 더운데 쪄죽을까봐!”

그럼 민주야, 네가 더운데 방문을 닫고 있으니까 건강이 상할까 걱정된다하면 되지, 왜 화를 내세요?”

 

딸을 걱정하는 마음을 비난하듯 구시렁대고 화내듯이 소리지르는 아빠를, 나는 싫어하면서도 이해한다.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표현을 제대로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걱정을 짜증이나 화로 표현하기도 했고, 서운하고 슬픈 마음을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해소하기도 했다. 내 본심은 그게 아닌데, 솔직하게 표현하면 괜히 분위기 어색해질 것 같고(오글) 혹은 내가 지는 것 같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본심과 다른 부정적 표현은 결국 상대와 나를 멀어지게 했다. 떠나는 상대 앞에서도 나는 애써 쿨한 척하며 속으로만 감정을 삭였다.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는 그래서 읽게 된 책이었다. 이제는 좀 제대로 표현하고 싶어서. 솔직하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서. 그리고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싶어서. 내가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상대 또한 그런 경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다르게 말했다면, 혹은 다르게 듣고 다르게 반응했다면…… 아프게 남은 관계들이 남긴 숙제를 이제는 풀고 싶었다.

 

저자는 심리상담가이자 대화훈련가이다. 저자의 이력에 걸맞게 책은 심리학적 내용과 대화 연습 워크북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동적 생각, 인지오류, 핵심 신념을 다루고(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데 부정적 내용일 경우 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자동적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핵심욕구를 올바르게 표현하는 대화 연습을 한다. 뿐만 아니라 유난히 불편한 상대의 말에 대해, 그 말에 담긴 욕구는 무엇이며 나는 그것이 왜 불편한지 들여다보는 챕터도 있다. 마지막으로 화가 날 때, 부탁할 때, 미안할 때, 거절할 때, 갈등을 중재할 때, 감사할 때 등 각각의 상황에 적절한 말하기 표현법을 배운다.

 

책이 소개하는 다양한 사례들 또한 인상깊었다. 때로는 저자의 경험이, 때로는 대화훈련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험이 공감을 사게도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내가 하고 싶던 말이 각각의 사례에 녹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사례가 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엄마가 치유캠프에서 딸에게 편지로 전한 미안하다는 말.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엄마가 되어 수없이 미안한 게 많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미안한 마음을 전했지만 처음 입 밖으로 꺼낸다는 말. 우리 엄마도 자존심이 강한 편이라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잘 못하시는데, 꼭 우리 엄마가 쓴 편지 같았다. 엄마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강아지 산책에 대한 모자의 대화였다. 강아지 산책을 시켰을 때 아들의 엄마 귀찮지? 엄마는 귀찮으면 꼭 다른 사람 시키더라. 나도 귀찮아.”라는 말에, 평소(“, 이놈아. 그것도 못 하냐? 그럼 저 개 다른 집 갖다줘!”)와 달리 본인도 모르게 , 귀찮아? 너도 엄마랑 똑같은 마음인 것 같다. 지금 쉬고 싶어?”라고 말했고, 그에 아들이 빤히 쳐다보다가 엄마 왜 그래?”라고 했다는 사례. ㅋㅋㅋㅋㅋㅋ 부끄러웠지만 계속해서 욕구에 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는 어머니는 욕구를 이해받고 순순히 강아지 산책을 나간 아들에게, 이렇게 착한 아들에게 그동안 무슨 말들을 퍼부어댔는지를 반성하며 우셨다고 한다. 학원강사로 일할 때 아이들을 대하며 수없이 했던 생각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착한데,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주면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아이들인데, 내가 너무 성적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에만 연연해 모질게 굴지 않았나... 반성을 한다고 행동이 고쳐지는 건 아니어서 원래 말 심하게 하시잖아라는 말로 학원생활을 마무리한 나에게 더 와닿은 에피소드였다.

 

이 책이 가장 좋았던 점은 “~라고 말하면 상대의 호감을 살 수 있습니다라는 식의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말을 하거나 들을 때 거기에 담긴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했으며, 거기에 더해 실제로 대화 훈련을 할 수 있게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혼자 책을 읽어나갔지만, 실제로 파트너와 함께 대화 훈련을 하기에 무척 유용하다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관계가 어려운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참고하면 좋은 책일 것 같다. 또한 모임에서 활용하기에도 적합할 것이다. 앞부분의 심리상담적 설명이 내가 실제로 상담을 받으며 혹은 심리학 서적을 읽으며 접했던 내용들이어서, 책을 읽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치유 효과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불편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대화로 관계를 풀어나갈지 항상 옆에 두고 참고할 만한 책이다.

 

똑같은 말도 누군가는 웃으며 넘기고 누군가는 며칠, 길게는 몇 달 혹은 몇 년을 앓는다. 똑같은 행동도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축하한다. 본인의 말이나 행동에서 문제의식을 느낀 적이 있다면, 이제는 그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본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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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없는 성적표
류태호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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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말한다. 지금의 교육으로는 대비가 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창의성과 사고력을 키우는 교육으로 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면 당장 입시를 없애야 하나? 그럴 순 없다. 그러면 어떻게? 모두들 입을 다문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튼 그래도 교육을 바꿔야 한다고 다시 떠들 뿐이다.

이 책은 출세와 입시, 교육이 맞물려 있어 쉽게 손대기 힘든 우리나라 교육에 시사점을 던져 준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성적 없는 성적표'를 통해서 말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성적 없는 성적표'에 대해 이야기하면 '성적 없이 성적표가 어떻게 존재해?' '대학은 어떻게 가?' 등등의 논란이 일 것이다. 저자는 성적 없는 성적표란 무엇인지, 성적 없는 성적표를 통해 입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성적 없는 성적표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지금의 객관식 시험이 얼마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그렇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는 오늘날에 부합하지 않는 시스템인지를 교육의 역사를 짚어보며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거에 그런 교육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 역량 중심(강화?)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지 또한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3차 산업혁명시기에는 '숙련된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숙련된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암기력과 문해력, 계산 능력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강조된 것이 3R(reading, writing, arithmetic)이다. 또한 학생수가 많아 효율적인 성적(혹은 노동 능력) 매기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객관식 시험을 도입해,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운 후 1등부터 채용해갔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문해, 암기, (단순)계산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계가 할 수 있다. 사람은 보다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통해 일해야 한다. 학생 수 또한 점차 줄고 고령화가 일어나고 있다. 더 이상 3R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한 객관식 시험의 문제점 또한 발견되었다. 객관식 시험이 진정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가? 찍어서 맞히는 것도 진정한 실력인가? 그래서 도입된 것이 정성적 평가를 하는 입학사정관제였고, 각종 논란이 있지만... 성적 없는 성적표, 역량 중심 성적표는 (일단 지금 보기에) 이를 보완한다. 스마트 시대에 걸맞게, 평가에 대한 근거 자료를 스마트한 방식으로 제공해준다. 학생이 썼던 에세이들, 참여한 토론 동영상, 교사의 구술 평가 등등... 입학사정관이 학생에 대해 관심이 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학생의 실제 교육내용을 참고해 평가할 수 있다. 생기부에 기록이 되느냐 마느냐로 입학결과가 갈리고, 객관적이고 공정하지 못하다고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우리나라의 입학사정관제에도 통찰을 줄 듯하다.

그리고 역량 중심 성적표는 입시보다 더 중요한, 학생의 능력 강화에 목적이 있다. 학생이 시험을 보고 70점을 받았다면 70점 받음 끝. 이 아니다. 100점 만점에서 70점을 받았는데 30점은 왜 깎였는지, 해당 교과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역량 중심에서는 어떤 역량이 부족한지, 즉 계발해야 하는지)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성적표는 공부의 끝이 아닌 시작이다. 단순히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들어 졸업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을 계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해당 역량이 계발되지 않았다면 졸업할 수 없다. 다시 수준에 맞는 교육으로 역량을 계발하는 과정을 거친다. 기존 수업에서 20점을 받고 앞으로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계속 20점을, 혹은 그 이하의 점수를(운이 좋으면 가끔 찍어 더 맞겠지만) 받았을 학생이, 이제는 20점을 받았다면 점차 50점, 80점, 결국은 100점까지 향해 가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학생 중심 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역량 중심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교육의 목적, 학생을 위한 교육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지 않아도 그렇다. 더 이상 암기식/주입식 교육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사실 이전부터 말이 많았지만). 그건 인공지능이 다 알아서 할 거고, 학생들은 수많은 정보 내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고 그 정보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 필요하다면 꾸준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어야 한다. 바야흐로 평생학습시대, 그리고 학습에 있어 점수가 아닌 '역량'에 주목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수업을 들었고 시험도 잘 봤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몇 번이고 맞닥뜨렸던 나는(대표적으로 영어 회화... 100점이지만 외국인과 의사소통할 수 없다...) 아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역량중심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 물론 성적 없는 성적표에도 문제가 있을 것이고 각종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교육의 근본적인 방향이 하루라도 빨리, 노동자 양산에서 고차원적 사고능력 배양+협업능력 강화로 가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들 이견이 없을 것이다. 왜 미국에서 성적없는 성적표를 도입했는가? 우리나라 교육에 많은 참고점이 될 책이다.

- 별점을 뺀 이유는, 논문 읽는 느낌이 들었고(동어반복이 많음), 미국식 성적표가 그대로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식이라면 어땠을지가 나왔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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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공계다 - 이공계를 지망하는 대한민국 학생과 학부모에게
조영호 지음 / 해나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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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공계다'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이것이 이공계인의 모범답안이다'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공계 종사자로서 기계공학, 마이크로머신, 나노바이오, 의료를 넘나드는 융합공학자로서 조영호 교수 본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오해하기 쉬운데, 융합이 대세니까 다양한 학문을 공부한 게 아니라, 융합이 대세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필요에 의해 공부하다보니 저절로 융합공학자가 된 것이다. 단순히 취업이 잘 돼서, 수학과학이 재밌으니까 이공계를 꿈꾸는 대다수의 고등학생들에게, 이공계인으로서 살아가는 현실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교수이며 학부모이기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나 학부모에게도 통찰을 주는 구절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교사와 학부모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가? 워낙 열정적으로 살면서도 또 교육자로서(그리고 아마도 부모로서) 모범이 될 만한 내용들이 적혀 있기에, 아이들을 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공계의 '이'자도 몰랐던 나에게는 이공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어 유익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이공계를 지망하는 학생, 그리고 그런 학생을 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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