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하우스
전지영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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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출판사 서평 이벤트를 통해 받은 도서입니다. -



창비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읽은 소설집. 신춘문예를 휨쓸고 등단한 지 얼마 안 되어 젊은 작가상도 탔다고 해 기대가 됐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전반적으로 불안하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고 불안정하다.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고 거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은 그저 그 상태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럼에도 뒷맛이 찝찝하거나, 다음 편을 읽기가 꺼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운이 남아 읽은 작품을 곱씹으며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됐다. (하루에 1편씩 읽었다.)

개인적으로 소설집에 실린 8편의 작품들이 나름대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학교폭력에 연루된 자녀를 둔 <말의 눈>과 <남은 아이>(각 소설의 아이는 모두 어느 부분에서는 피해자 같기도 어느 부분에서는 가해자 같기도 하다), 끊임없이 불안을 유발하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말의 눈>과 <쥐>(왜 앞부분에 배치했는지 알 것 같다), 사회적 계급간 차이와 차별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말의 눈>(지희)과 <언캐니밸리>, <소리 소문 없이>(청한동), 전반적으로 우울한 소설 속에서 묘한 희망을 남기는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과 <소리 소문 없이>, <남은 아이>,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룬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맹점>과 <뼈와 살>, 가상의 동네 청한동을 배경으로 하는 <언캐니밸리>와 <소리 소문 없이>(연작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예술하는 주인공과 열등감,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나오는 <소리 소문 없이>와 <뼈와 살> 등. 개인적으로 <소리 소문 없이>는 재밌게 읽다가 갑자기 10년 후를 보여주는 드라마처럼 시간이 점프해버리고, 결혼했다는 언급도 없었는데 아이의 등장을 마지막으로 끝나는 게 갑작스러워 아쉬웠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소설이 재미있었다. 이 중 가장 인상깊었던 <언캐니밸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써보고자 한다.



언캐니밸리

-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이라는 타이틀이 서평단 신청에 한몫했다. 신인 작가가 신춘문예 당선되는 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것이므로(물론 2관왕은 정말 대단하다) 그러려니 싶었는데, 정말 이른 시기에 젊은 작가상까지 수상했다는 게 내 흥미를 끌었다.

언캐니밸리라는 낯선 제목은 불쾌한 골짜기라는 익숙한 단어의 영어버전이었다. (막연히 언캐니밸리가 청한동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랜드마크라든가 지형의 특성이라든가...) 소설을 읽으며 내내, 동일하게 청한동이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하는 <소리 소문 없이>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신분과 계급(부유층과 중산층, 빈민층)을 다룬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자본과 외모 등의 사회적 지위를 포함해) 빈민층인 '나', 중산층인 '당신(장신영 혹은 김승민)', 그리고 부유층인 노부부. 빈민층은 중산층을 선망하고, 중산층은 부유층을 선망한다. 그리고 젊음과 건강, 외적인 면으로 한정지었을 때 (여전히) 빈민층인 '나'와 중산층인 노부부는 부유층인 '당신'을 선망한다. '나'는 택시 안에서만 '당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줄 수 있다. '나'의 운전석에서 특수 운전 장치를 본 여자 승객은 '나'가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겁을 먹는다. 심지어 '나'가 담배를 태우러 택시 밖으로 내렸을 때는 남자 승객도 '악' 소리를 내며 놀란다.

반면 '당신'은 예약표시등이 켜져있는데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택시에 승객으로 타 운전사가 앞에 있음에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잣말이어서 굳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당신'을 남들보다 무심한 사람이라 여기지만, 이는 기질이나 성격이라기보다 '당신'이 여태껏 누려온 특권이 몸에 밴 것에 가깝다. '당신'에게 택시는 돈을 내면 청한동 주택까지 데려다주는 이동수단이다. 돈을 지불했기에 이용하는 서비스. 거기에 운전자는 운전을 한다는 기능으로 존재할 뿐, 운전을 하는 '사람'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이는 중세 시대까지 귀족과 노예의 관계에 가깝다. 우연히 생물학적 종(인간)은 같으나 그 외 모든 것은 다른 생명체.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98% 이상 유사하다고 하나 인간과 침팬지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듯이.

그리고 이는 대상을 바꾸어 '당신'과 노부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노부부에게 '당신'은 아마 조각상이나 미술작품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름다워 감상하고 싶은 것. 그러나 역시 인간은 아닌 것. 그래서 '살 수도 해칠 수도, 끝내 간직할 수도 있는' 것.

읽으며 계속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다. (자본주의적) 계급, 운전사라는 공통분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시간이 넘는 영화와 달리 소설은 사건의 전모를 알려주지 않는다. 누가, 왜 그녀에게 염산 테러를 했는가보다는 그저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나'가 서술자여서(정확히는 그런 '나'를 서술자로 설정함으로써 <기생충>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 때문)일 것이다.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이 소설을 전형적인 스릴러 소설로 읽어내는 해설을 보았다. 생각해보면 장르적으로는 스릴러에 가깝긴 한데 읽는 동안은 스릴러 플롯보다는 사회고발적 주제의식이 더 직관적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수술과 별장 음악회로부터 소설을 써내려갔다는 작가노트를 읽었을 때, 플롯보다 주제의식에 더 집중하며 읽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다소 직설적인 제목'이라는 김건형 평론가의 평과 달리 '언캐니밸리'라는 제목이 쉽게 와닿지는 않았는데, 로봇이 인간과 유사해질 때 특정 시점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을 어떤 것의 상징이라고 보아야할지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노부부 입장에서의 '그녀'(약을 가져가는 것을 눈감아줬지만, 특정 시점에서 선을 넘어버리는-<소리 소문 없이>의 장목련 아주머니처럼)인지, 아니면 청한동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계속 강남 생각이 났다) 작금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 자체인지, 아니면 언캐니밸리라는 단어가 주는 기괴함 그 자체를 의도한 건지 등을 떠올려보았다. 아직 소설집의 평론은 아껴두고 안 읽고 있는데, 힌트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서평을 쓰기 전 책 소개 및 작가 소개를 반복해 읽었다. "신중하고도 성숙한 시선이 돋보이며 마지막까지 긴장을 끌고 가는 필력이 남다르다", "신인이라고 믿기 어려운 정연하고도 능란한 필치로 현대사회의 일면을 묘파해나간다"는 평이 인상적이었다. 읽으며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소설가가 이런 느낌 아닌가?'하고 생각했지만 등단한 지 (정말로) 얼마 안된 신인 작가가 '대부분의 소설가'와 비슷한 느낌을 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같다.

앞으로 전지영 작가의 이름을 보게 되면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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