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마리코 타마키 지음, 심혜경 옮김, 질리안 타마키 그림 / 이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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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살 무렵이었던가. 우리 동네는 간간이 밭이 있고, 흙길로 된 골목길들이 구불구불 실핏줄처럼 퍼져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집과 가까운 순서대로,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대로 뭉쳐 놀았다. 동네 슈퍼 앞 전봇대는 말뚝박기, 술래잡이, 고무줄놀이, 구슬치기 등 노는 데 정신 팔린 아이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민둥산이 있었는데,  어느 여름인가 아이들끼리 모여 모험을 떠난 적이 있었다. 누가 먼저 가자고 한 기억도 없는데, 동네 아이들 열대여섯 명이 모였다. 가장 나이가 많은, 열세 살 세탁소집 쌍둥이 오빠들은 "오늘 밤, 아무도 집에 들어가지 말자." 고 외쳤다. 우리는 왠지 신이 났다. 책속에서나 보던 캠프파이어를 하자고 했다. 주변으로 흩어진 우리는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았다. 조금 있자 밤새도록 피워도 충분할 만큼 쌓였고, 쌍둥이 오빠들 중 하나가 마른 풀에 불을 붙여 나무 더미에 던져 넣었다. 조금 있자 불길이 솟았고, 우리는 빙 둘러서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곧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고, 우리 중 누군가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 배고파." 다들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우리는 아무도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서둘러 불을 끈 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불장난을 했다는 건 동네 아이들끼리의 공유된 비밀이었으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나를 보고 혼을 냈다. 알고 보니 앞머리가 불길에 그을려 꼬불꼬불 타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탄내도 솔솔 풍겼겠다, 싶지만.
일본계 아버지와 유대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는 마리코 타마키가 글을 쓰고, 그의 사촌 질리안 타마키가 그림을 그린 그래픽 노블 <그해 여름>을 보다 보니, 그 여름이 생각났다. 학교를 가지 않는 심심한 방학에, 동네 친구들과 민둥산을 헤매며 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열다섯 살 쯤된 주인공 로즈는 여름방학 때마다 부모님과 아와고비치 오두막으로 간다. 그곳에는 매년 여름마다 만나는 친구 윈디가 있다. 두 소녀는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숲을 헤매기도 하고, 밤마다 공포영화를 보며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로즈는 부모님 사이가 안 좋아지는 걸 눈치채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신을 둘러싼 견고한 세계가 금이 가는 걸 목격하는 소녀의 불안정한 마음은 요동치는 파도같다. 그런 파도를 헤치고 나와 잠시 숨을 쉬게 해주는 건 이곳의 유일한 친구 윈디이다. 힙합 댄스를 배우고 있다며 로즈를 웃기고, 가슴이 충분히 크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낯선 어른 세계를 손 꼭 잡고 머리를 맞대고 같이 의논할 수 있는 그런 친구. 매년 같은 곳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그런 친구.
열살 무렵의 그 여름에 마주한 세상은 한없이 넓었다. 시간은 그저 넘쳐 흐르는 것이어서, 친구와 가만히 누워 하늘 위 구름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는 게 취미였다. 가끔 마음에 드는 남자아이 이야기를 속닥속닥 나누기도 했고, 친구 집에 새로 들인 강아지 이야기도 했고, 때로는 엄마 아빠의 싸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가장 믿고 있는 부모님 사이의 갈등은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면서도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마음껏 웃으며 뛰어놀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면 누구 편에 서야 할지,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비밀을 지켜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그때보다 세 배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해 여름>을 읽으며, 그 친구를 떠올린다. 지금은 사라진 그 동네를, 골목길을, 아이들을 추억한다. 그립고도 아련한 시간들이 몰려왔다 새하얀 거품으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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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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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숨에 이 책을 읽었고,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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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용접공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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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꽤 재미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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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이고 여성적이고 가족적인 소설.
이런 소설을 이토록 강렬하게 세세하게 썼던 작가가 있었던가.
모처럼 즐거웠던 책 읽기.
한국판 제목인 <그저 좋은 사람>보다 <길들지 않은 땅unaccustomed earth>이 나는 제일 좋았다.
줌파 라히리의 다른 작품들도 차근차근 읽어볼 생각이다.

아내가 죽고 나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자기도 언제 그렇게 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죽음을 그렇게 가까이서 경험한 일이 없었다. 부모와 친척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항상 멀리 있었기에 죽음이 수반하는 끔찍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내의 죽음조차 지키지 못했다. 아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 그는 병원 카페테리아에서 차를 마시며 잡지를 읽고 있었다. 그렇다고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보단 모든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수술이 잘될 거라고, 아내가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집에 돌아올 거라고, 2주가 지나면 친구들이 집에 찾아와 저녁을 먹을 거라고, 또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면 아내가 프랑스 여행을 갈 수 있을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아내의 수술이 인생에서 겪는 대단치 않은 시련이라 생각했지, 그게 마지막이라곤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날 루마는 어릴 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거나 벌에 쏘였을 때처럼 자기 팔에 안겨 울었다. 그때처럼 아빠 노릇을 하느라 정작 자신은 아내의 죽음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길들지 않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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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 벽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다 읽고 깨달았다. 마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하루키는 이 책을 1985년에 출간했으니, 30년 된 이야기이다. 본인 나이 서른여섯에 책이 나왔으니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같은 나이 서른다섯에 썼겠구나 짐작한다.

˝나는 확실히 어느 시점부터 내 자신의 인생과 삶의 방식들을 비틀듯이 하며 살아왔다. 그런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중략)
내 소멸이 아무도 슬프게 하지 않는다 해도, 또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공허함을 안겨주지 않는다 해도, 아니면 거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확실히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은 나 자신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내 안에는 잃어버린 것들의 앙금이 일몰 뒤의 빛처럼 남아 있어 나를 지금까지 살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351쪽(2권)

일상을 잘 지키며 살아왔는데, 최소한의 관계만을 맺고 나름의 규칙대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세계가 끝이 난다고 가정해보자. 겁이 덜컥 나지 않을까. 살아오면서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 화분의 달팽이가 눈에 들어오고 친절하게 대해준 점원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래 줄은 스포 주의)
그래서 하루키는 주인공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한다. 슬프게도 현실은 아니다. 주인공의 머릿속 `세계의 끝`. 그 세계에서 주인공은 `마음`을 잃고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각자의 마음을 찾아주겠지.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모든 것이 없는 그 세계에서. 그것이 더 행복하다면 옳은 선택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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