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시 삼백수 : 5언절구 편 우리 한시 삼백수
정민 엮음 / 김영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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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며 정민 교수의 [우리 한시 삼백수] 5언 절구 편을 펼쳐들었다. 얼마 전 읽은 [잠시라도 내려놓아라]에서 멋진 당시(唐詩)들을 맛보아서 더 그랬겠지만, 좀 더 본격적으로 우리 한시를 읽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던 차에 만난 책이다. 사실 몇 년 전 그런 열망이 나를 찾아오긴 했다. 길을 걷는데 갑자기 <송인>이라는 한시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정지상의 <송인>을 찾아 읽는데,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라는 시구가 어찌나 아름답게 느껴지던지... 고등학교 국어시간이나 한문시간에 접했을 때는 별 느낌이 없던 그 한시가 말이다. 그때부터 한시에 관심을 지니고 두루 읽어보고 싶었으나 시중에 나온 책들은 한문을 잘 모르는 내게는 너무도 버거웠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정민 교수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 한시를 만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삼백수가 담겨있어 제법 묵직한 책 두께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책을 넘기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의 이름이 눈에 띄어 반갑다. 정도전, 성삼문, 서경덕, 정철, 황진이, 김상헌, 송시열, 박지원, 정약용 등 꽤 된다. 언뜻 보기엔 짧고 단순해 보이는 이 시들에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담아냈겠지,라고 생각하니 책의 무게가 더해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김수향이라는 분의 한시 <눈 오는 밤에 홀로 앉아(雪夜獨坐)>에 붙은 정민 교수의 설명을 보면, 우리 선조들의 삶에서 한시가 차지하는 자리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수향은 진도 유배지에서 사약을 기다리면서 이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는 상황에서도 한시를 지을 정도로, 한시는 삶과 분리될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을 넘기다보면 우선 발상이 기발한 시들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띤다. 먼저 황진이의 <반달을 노래함(詠半月)>이다. “곤륜산 옥 누가 깎아 / 직녀의 빗 만들었노. / 견우와 이별한 뒤 / 속상해서 던졌다네.” 이토록 사랑스러운 위트를 한시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껏 살면서 나는 수없이 반달을 보아왔지만, 반달을 빗으로, 그것도 직녀의 빗으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뒤에 이어진 “견우와 이별한 뒤 속상해서 던졌다네”라는 말은 또 어떤가. 애절한 사랑의 표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비틀면서 새로운 자극을 준다.

 

좀 더 화끈한 시를 볼까. “꽁꽁 언 시월 얼음 위 / 댓잎 자리 한기 엉겼네. / 설령 님과 얼어 죽어도 / 새벽닭아 울지 말아라.” 15세기 김수온이라는 사람이 고려가요 <만전춘별사> 첫 연을 번역한 것이라 한다. 수백 년 전에는 10월에도 얼음이 얼었나보다. 그 얼음 위 대나무 잎만 깔아놓더라도 님과 함께라면 얼어 죽어도 좋으니 새벽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시를 읽노라면, 이 겨울 조금 추운 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다음에 볼 송익필의 <산을 내려오며(下山)>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 시다. “새벽 풍경 맑게 울 제 / 단장 짚고 내려왔지. / 꽃도 이별 아쉬운지 / 물을 따라 나왔다네.” 시인은 새벽 풍경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팡이를 짚고 산을 내려오고 있다. 시인의 눈에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꽃이 보인다. 누구나 보았을 이 풍경을 두고 시인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꽃을 연상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한시가 형식에 얽매여 있는 낡은 문학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을수록 내가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3어절 구문으로 이루어진 5언시 형식은 시를 마주하는 내 상상력에 그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는다.

 

처음엔 번역문에만 눈이 갔는데, 조금씩 한문 구절에도 눈을 주게 된다. 나는 한자를 잘 모르지만, 음이 달려 있고 본문 아래에 주요 한문 표현에 대한 풀이가 있어서 크게 어렵지는 않다. 강백년의 <산길(山行)>이란 시에서 “十里無人香”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인향(人香)”은 사람의 말소리를 뜻한다고 한다. 사람의 말소리를 두고 ‘향기’라고 표현하다니. 사람의 말을 이보다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만 같다. ‘인향’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검색해보니, 그와 같은 뜻으로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어여쁜 말이라면 널리 알릴 만한데 이상한 일이다. 이 책이 널리 읽히게 된다면 우리 한시에 등장하는 좋은 표현들도 우리 삶에서 되살아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재기발랄하고 우아하고 기상천외한 한시들을 왜 모르고 살았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밖으로 나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이를 적절하게 표현해낸 시를 골라 소리 내어 읽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 책에 실린 5언시들 앞에서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을 경험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얼마 전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로쟈 이현우 선생의 글에서 봤던 멋진 말을 빌려 이렇게 쓸 수밖에 없겠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인생을 저렴하게 만드는, 최소한 마흔 일곱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한시를 읽지 않는 건 그 가운데 하나다.” 저렴한 인생을 면하게 된 기념으로, 이 책에서 특별히 아끼게 된 한시 한 편을 적으며 글을 닫는다.

 

언제나 짹짹짹 우는 새
어이해 언제나 족한가?
사람들 족함을 모르니
그래서 언제나 부족타.

 

-송익필, <새 울음소리에 느낌이 있어(鳥鳴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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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개 1~3 세트 - 전3권
강형규 지음 / 네오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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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책으로 세상을 배워온 남자. 세상의 어떤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방 안에서 살아온 남자. 무적자(無敵者)가 아닌 무적자(無籍者). 그 남자의 이름은 쓸개다. 아기는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덩이니, 신체 기관이나 신체 부위로 이름을 지어야 건강하고, 효도한다는 미신을 따라 지은 이름. 그런데 하필이면 있으나 마나 한 장기, 쓸개.

 

 

 

쓸개는 양아버지가 운영하던 쓰러져가는 식당 방구석에서 20년간 살아왔다. 자신을 낳은 엄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조선족이었다는 엄마 김혜정은 쓸개가 아기였을 때, 쓸개의 안전을 위해 어딘가로 사라진 후 소식이 없다. 양아버지가 죽고, 쓸개는 식당 밖 세상으로 나와 이복동생 희재와 엄마의 과거 행적을 추적한다. 금괴 하나를 엄마가 쓰던 가방에 넣어 등에 매고 서울로 올라온 쓸개와 희재. 그 둘 앞에 아빠라고 주장하는 길학수라는 인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두터운 먼지에 쌓여 숨겨져 있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금괴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쓸개의 생부 길학수는 한때 건실했던 청년이었다. 그렇지만 중국 연길로 어떤 물건을 옮기러 떠났던 길학수는 그 물건이 금괴라는 것을 알고, 아니 그 금괴를 ‘보고’는 눈이 뒤집힌다. 그리고 악마가 돼 버린다. 그 금괴를 손에 넣기 위해 장애물이 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 한다. 길학수의 아이를 낳은 김혜정은 길학수의 손에서 금괴를 낚아채 가지고 한국으로 도망쳐온다. 엄마의 행적을 따라서, 그리고 금괴의 행적을 따라서 중국 연길에 온 쓸개는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되고 생부 길학수와 맞서게 된다.

 

금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그렇듯 이 만화도 금을 향해 질주하려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금을 향한 길학수의 멈출 수 없는 탐욕이 묘사되는 부분이다. 길학수는 금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는 쓸개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리고 함정이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수십 년 전, “오늘도 그거 찾으러 가니…? 오늘은… 에미와 함께 있으면 안 되니…?”라는 자신의 양어머니가 병석에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길학수는 금을 포기할 수 없다. 금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엔 금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비늘은 금을 보고 나서야 벗겨질 수 있다. 그래서 “금이 지금… 거기 있습니다. … 사실입니다.”라는 쓸개의 말에 결국 길학수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한다. 금을 버리는 것만이 지옥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이 만화에서는 오직 쓸깨만이 알고 있다. 그래서 쓸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날 낳고, 엄마를 떠나게 했고, 여린 마오수 씨를 쓸쓸하게 했고, 아주머니를 꼬이게 했고, 희재를 울렸구나. 이 금이… 시작이었구나.” 그래서 쓸개는 금을 포기했고, 최후 승리자가 되었다.

 

 

강형규 작가 만화는 [쓸개]가 처음이었는데,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윤태호 작가의 [이끼]를 읽고 인간의 지독한 탐욕의 실체를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쓸개]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이 그와 비슷했다. 만화를 두고 소설에 견줘 인간의 내면을 심도 있게 묘사하기가 어렵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만화야 말로 그런 선입견을 부숴주는 것 같다. 강형규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왈퐈]도 꼭 책으로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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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라도 내려놓아라 - 몸과 마음이 분주한 현대인에게 전하는 일상의 소중함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5
뤄위밍 지음, 나진희 옮김, 김준연 감수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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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라도 내려놓아라]는 ‘선(禪)’과 한시를 함께 다루고 있는 책이다. ‘선’은 종교의 영역이고, ‘한시’는 문학의 영역인데, 종교와 문학이라... 함께 놓고 보니 그 어울림이 궁금해진다. 그런데 사실 내게 ‘선’이라는 개념은 아리송하다. 오래 전 윤리 시간에 배웠던 것 같긴 한데, 지금은 기억나는 게 없다. ‘선’에 관한 지식이 없다시피 한 나는 이 책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또 무언가를 읽었다는 느낌은 엄연한데, 그 느낌을 풀어 글을 써내려가는 일은 막연했다. 그 느낌을 붙잡으려고 이미 읽었던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만 했다.


이 책에서 저자 뤄위밍은 ‘선’이라는 개념을 포근한 문체로 친절하게 풀어내준다. 한시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다정다감한 문학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든다. 중국 푸단대학 중문과의 저명한 교수이기도 한 저자의 관심은 중국의 시인들에만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상건의 시 <파산사후선원>에 나타나는 사람과 자연의 융합을 랭보의 시 <새벽>에서도 찾는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인간의 신성’에 대한 이론을 불교의 ‘불성’과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선’은 종교나 철학이라기보다는 생활의 방식이자 삶의 태도에 가깝다. 이 책에서 말하는 선종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손색이 없을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법회장에 바람이 불어 깃발이 흔들리자 두 스님이 논쟁을 벌였다. 한 명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다. 선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일컬어지는 육조 혜능은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이 아리송한 말은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생각이 좁아지면 사물의 연관관계를 융통성 있게 살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언젠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일까? 선종은 모든 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 깨달음이 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지난한 깨달음의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있는 힘을 다해 ‘어리석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고집을 버려야 하며 물아일치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심지어는 암담한 상황에서 궁지에 몰려 몸부림칠 수도 있고, 죽다 살아날 수도 있다.” 죽다 살아날 수도 있다니! 어휴...! 여기서 속된 질문 하나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선’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깨달음을 얻을 필요가 있을까?


사실 이 책을 통해 ‘선’에 관해 이해하느냐 마느냐는 그리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선’이란 개념을 얼마만큼 이해했느냐를 따지는 것이 선종의 가르침에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운거 효순 선사라는 분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나는 선이 무언지 몰라 / 발 씻고 침상에 올라 잠을 자네. / 겨울 오이는 그저 곧을 뿐이고 / 표주박은 울퉁불퉁하네.” 결국 ‘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경지는 ‘선’이라는 생각과 의식 자체가 사라진 상태라는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선’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바로 한시를 가지고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적어본다.

 

봄 산에는 좋은 일도 많아
느끼고 즐김에 밤늦도록 돌아가길 잊었네.
손으로 물을 뜨니 달이 손에 있고
꽃과 같이 노니 꽃향기 옷에 가득하네.
흥에 겨워 먼 곳 가까운 곳 마구 다니다
떠나려니 향기로운 풀 아쉬워라.
남쪽으로 종소리 울려오는 곳 바라보니
누대가 짙은 푸른 산속에 희미하게 보이네.

 

우량사, <춘산야월(春山夜月)>

 

내 시선은 “손으로 물을 뜨니 달이 손에 있고”에서 멈춘다. 읽는 순간 시인이 느꼈을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을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 이것이 ‘선’의 진경이라면, 나는 계속 여기에 머물고 싶어진다. 사람의 품속으로 자연이 들어오는 순간을 이처럼 아름답게 포착할 수 있다니... 나도 그런 눈을 갖고 싶다. 이런 내게 “대자연의 움직임과 긴밀히 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 절묘한 순간을 느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해준다. 저자가 한시를 통해 독자들을 ‘선’에 가까이 인도하려는 것은 ‘선’을 구하는 마음이 시인의 마음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니 아름답게 빛나는 달을 바라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올해가 가기 전에 달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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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문장강화 - 이 시대 대표 지성들의 글과 삶에 관한 성찰
한정원 지음 / 나무의철학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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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잊히지 않는 불멸의 문장을 쓰고야 말겠다.”는 따위의 포부가 내게는 없다. 그저 쓰고 나서 부끄럽지 않은 문장만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도대체 문장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 내 손에 들어온 [명사들의 문장 강화]가 좀 더 나은 문장을 쓰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책을 펼쳐 들었다. 한정원이라는 저자 이름은 낯설다. 책 뒷날개의 지은이 소개를 읽어 내려가 본다. <지식인의 서재>의 인터뷰어? 그렇다면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네이버에서 건져낸 가장 큰 수확은 <지식인의 서재>였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서재>를 통해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박찬욱 감독, 황현산 선생의 서재를 훔쳐볼 수 있던 건 큰 유익이었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분은 남경태 번역가였다. 나는 남경태 선생의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를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는데, 단정하면서도 유쾌한 문체로 서술한 역사에 관한 세심한 통찰에 놀랐다. 보통 자기 글을 쓰는 작가의 번역서를 읽고 실망할 때가 많은데, 남경태 선생의 번역은 달랐다. 남경태 선생의 번역을 통해 좋은 역사서와 철학서를 헤메지 않고 읽을 수 있었으니, 나는 선생께 많은 빚을 진 셈이다. 선생의 문장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선생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것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선생은 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고 한다. 선생은 문장 하나를 쓸 때도 “길게도 쓰고 짧게도 쓰며 독자가 지루하지 않도록 표현 방식을 철저하게 계획한다.”(p. 196) 내가 잘 읽힌다고 생각했던 선생의 문장이 그냥 쉽게 쓴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경태 선생이 요즘도 반복해서 읽는다는 [부분과 전체], [인간의 대지], [말테의 수기]를 독서예정목록에 적어두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큰 도전을 주는 이는 장석주 시인이다. 장석주 시인은 우리 시대의 독학자라 할 만한 분이다. “아마추어들은 퇴고의 중요성을 몰라요. 어마어마하게 퇴고해야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명한 작가들이 일필휘지로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p. 227) 퇴고라는 걸 거의 하지 않는 나 같은 아마추어는 이 대목에서 뜨끔하다. “시인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모든 구절을 정확하게 외울 정도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소화시켜버렸다.”(p. 239) 시인은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은 정기적으로 되풀이해 읽는다. [도덕경]과 [그리스인 조르바]는 멀리서만 봐도 읽는 사람이 어느 부분을 펼치고 있는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글 짓는 일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장석주 시인도 이렇게 책과 자신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힘썼는데, 내가 그동안 해온 것들을 돌아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시를 쓸 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안도현 시인의 지침 중 다음과 같은 항목이었다.

 

-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혹시 생각나는 시인 없으신지...? 나는 김경주 시인을 바로 떠올렸다. 최근에 발표하는 시들은 그렇지 않지만, 철학을 눅여낸 시와 거기에 딸린 거침없는 각주는 한때 김경주 시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김경주 시인의 그 시들을 좋아하고 또 지지한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 지지하고 말 것도 없이 김경주 시인은 이미 인정받은 시인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 나오는 명사들의 지침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정형화되어 있는 틀에 자신을 맞추지 말라”(p. 43)는 고은 시인의 말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좋은 문장가들은 모두 좋은 독서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시 쓰는 일이 말하기와 진배없을 것 같은 고은 시인도 단테의 [신곡]을 늘 새롭게 읽는다고 한다. 안도현 시인도 같은 생각을 말한다. “자신이 읽은 독서량이 글쓰기 실력이에요. 이건 진리죠.”(p. 295) 내 머리를 강하게 때린 것은 이지성 작가의 글쓰기에 관한 대목이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아니었다면 상대성 이론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 그는 나흘간이나 매달렸다고 한다. 더 잘 쓰고 싶어서 아인슈타인 관련 서적 여섯 권을 읽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명사들에게 “쓰다”와 “읽다”는 같은 말이었다. 나는 늘 글을 쓸 때마다 좌절하곤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너무 조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문장이 부족한 것은 아직 내가 독서로 덜 채워졌기 때문이라는 위로도 해본다. 황소걸음으로 읽고 쓰기를 되풀이 하다보면 부끄럽지 않은 문장을 쓸 날이 언젠가 오게 될 것이라고, 기약 없는 희망을 품으며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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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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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선의 높이에 따라 재산의 등급이 반비례하는 삼벌레고개. 동네 계주인 순분이 사는 우물집에 새댁네가 세를 든다. 새댁네의 딸들인 영과 원은 우물집 아이들인 금철과 은철과 각각 동갑이다. 은철과 원은 스파이 놀이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 관해 조금씩 알아간다. 낯선 남자 다섯과 자주 밀담을 나누는 원의 아버지가 도둑일 거라고 은철과 원은 추리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원의 아버지 안덕규씨는 안바바가 되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의 그 ‘바바’다. 그 과정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전작 [레가토]에서 보았던 아픈 이야기와 마주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은철과 원이 자라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 되겠구나, 하고 자칫 마음을 놓을 뻔했다. 하마터면 권여선 작가가 그저 우리네 정겨운 유년 시절 풀어놓은 이야기라고 착각할 뻔했다. 소설 중반이 지나 우물집에 찾아온 “지나치게 억울하고 가혹”한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는.

 

먼저 은철에게 닥친 일이다. 금철은 호기를 부리면서 동생 은철을 옆구리에 끼고 넓은 폭의 개천을 뛰어넘다 은철을 놓치고 만다. 팽개쳐진 은철은 단단한 바위에 무릎을 세게 부딪치고 만다. 현장에서 도망친 금철은 다음날 저녁 병원에서 돌아온 순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금철의 다리를 분지르기라도 할 듯이 빗자루를 치켜들었던 순복은 금철을 용서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작가의 사려 깊음에 놀란다. 여기에는 혹독한 인생살이를 감싸 안으려는 작가의 속깊은 시선이 깃들어 있다. 숨을 고르며 읽은 이 대목을 인용해 본다.

 

순분은 불구가 될지 모르는 작은아들의 시련과 괴로움, 그리고 그 강도와 길이에 상응하여 큰아들이 지고 가야 할 자책과 죄의식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그렇게 매를 때리기 좋아하던 순분이 이제 아들들에게 내릴 평생의 매는 다 내렸다고 결정한 순간, 빗자루나 막대자 연탄집게같이 매질에 동원되었던 모든 도구는 제 본성을 되찾고 바닥을 쓸거나 눈금을 재거나 연탄을 집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은철이 다친 후로 우물집 안채에서 하루건너 한 번씩 들려오던 매를 맞아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소리가 사라진 대신, 늦은 밤이면 병원에서 돌아와 술을 먹고 소리 죽여 우는 만춘의 울음소리가 하루건너 한 번씩 우물집을 감싸고 돌았다.(p. 205)

 

동네 여인들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순분은 주변 여자들과의 교제를 끊고 은철을 돌보는 데 열중한다. 그리고 순분의 머릿속에는 두어 달 전 앉은뱅이로 비참한 삶을 마감한 새댁네 시누 얘기를 계원들 앞에서 극적으로 들리게끔 장난스럽게 늘어놓던 자신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순분은 잊고 있었던 시렁 위의 유리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은철의 무릎뼈는 아마 그렇게 부서졌을 테고, 새댁네 시누의 골반뼈도 그렇게 부서졌을 거라는 걸 순분은 이제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순분은 탄식한다. “내가 그 죄를…… 어떻게 다……!”(p. 216) 왜 우리는 어려운 일이 닥치고 나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걸까.

 

더 비극적인 것은 새댁네가 맞게 된 일이다. 원이 도둑이라고 상상했던 아버지 안바바는 좀도둑 따위가 아니었다. 독재정권에 반기를 든 괴물국가의 대역죄인이었다. 원의 아버지는 사형을 당하고 새댁은 실성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댁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고, 원은 인형 ‘희’를 제외한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은철과도. 영과 원이 큰아버지네로 이사가는 날, 은철은 원의 고통을 알게 된다. “자기가 병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원도 날카로운 고통이 사방에 철창을 두른 작은 방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을.(p. 329) 원은 이전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작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럴 땐 그저 원의 고통을 나도 껴안으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가능한 책장을 빨리 덮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보는 것이다.

 

 

 

  

착잡하고 안타까운 결말인데도 이 소설은 어둡지 않다. 그것은 수년 간 감방에 웅크려 있다가 갓 출소한 사람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햇빛의 기운이 이 소설에는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테면 닭발을 억지로 원에게 집어넣어 실신하게 만들었던 은철의 죄책감을 어른스럽게 달래주는 원의 마음 씀씀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p. 286-287) 그리고 “교복 치마를 여미고 앉아 빠른 손길로 운동화를 흔들어 행구는 영은 금세라도 날아가버릴 새처럼 아슬아슬하고 아름다웠다.”(p. 290) 같은, 훔쳐 쓰고 싶을 만큼 어여쁜 비유. 자신의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이 다감한 작가 덕분에 고통을 감싸는 온기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억울하고 고단한 이야기가 강퍅한 내 마음에도 얼마간 스며들 수 있었던 것 같다. 권여선 작가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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