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등고선의 높이에 따라 재산의 등급이 반비례하는 삼벌레고개. 동네 계주인 순분이 사는 우물집에 새댁네가 세를 든다. 새댁네의 딸들인 영과 원은 우물집 아이들인 금철과 은철과 각각 동갑이다. 은철과 원은 스파이 놀이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 관해 조금씩 알아간다. 낯선 남자 다섯과 자주 밀담을 나누는 원의 아버지가 도둑일 거라고 은철과 원은 추리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원의 아버지 안덕규씨는 안바바가 되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의 그 ‘바바’다. 그 과정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전작 [레가토]에서 보았던 아픈 이야기와 마주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은철과 원이 자라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 되겠구나, 하고 자칫 마음을 놓을 뻔했다. 하마터면 권여선 작가가 그저 우리네 정겨운 유년 시절 풀어놓은 이야기라고 착각할 뻔했다. 소설 중반이 지나 우물집에 찾아온 “지나치게 억울하고 가혹”한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는.

 

먼저 은철에게 닥친 일이다. 금철은 호기를 부리면서 동생 은철을 옆구리에 끼고 넓은 폭의 개천을 뛰어넘다 은철을 놓치고 만다. 팽개쳐진 은철은 단단한 바위에 무릎을 세게 부딪치고 만다. 현장에서 도망친 금철은 다음날 저녁 병원에서 돌아온 순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금철의 다리를 분지르기라도 할 듯이 빗자루를 치켜들었던 순복은 금철을 용서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작가의 사려 깊음에 놀란다. 여기에는 혹독한 인생살이를 감싸 안으려는 작가의 속깊은 시선이 깃들어 있다. 숨을 고르며 읽은 이 대목을 인용해 본다.

 

순분은 불구가 될지 모르는 작은아들의 시련과 괴로움, 그리고 그 강도와 길이에 상응하여 큰아들이 지고 가야 할 자책과 죄의식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그렇게 매를 때리기 좋아하던 순분이 이제 아들들에게 내릴 평생의 매는 다 내렸다고 결정한 순간, 빗자루나 막대자 연탄집게같이 매질에 동원되었던 모든 도구는 제 본성을 되찾고 바닥을 쓸거나 눈금을 재거나 연탄을 집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은철이 다친 후로 우물집 안채에서 하루건너 한 번씩 들려오던 매를 맞아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소리가 사라진 대신, 늦은 밤이면 병원에서 돌아와 술을 먹고 소리 죽여 우는 만춘의 울음소리가 하루건너 한 번씩 우물집을 감싸고 돌았다.(p. 205)

 

동네 여인들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순분은 주변 여자들과의 교제를 끊고 은철을 돌보는 데 열중한다. 그리고 순분의 머릿속에는 두어 달 전 앉은뱅이로 비참한 삶을 마감한 새댁네 시누 얘기를 계원들 앞에서 극적으로 들리게끔 장난스럽게 늘어놓던 자신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순분은 잊고 있었던 시렁 위의 유리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은철의 무릎뼈는 아마 그렇게 부서졌을 테고, 새댁네 시누의 골반뼈도 그렇게 부서졌을 거라는 걸 순분은 이제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순분은 탄식한다. “내가 그 죄를…… 어떻게 다……!”(p. 216) 왜 우리는 어려운 일이 닥치고 나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걸까.

 

더 비극적인 것은 새댁네가 맞게 된 일이다. 원이 도둑이라고 상상했던 아버지 안바바는 좀도둑 따위가 아니었다. 독재정권에 반기를 든 괴물국가의 대역죄인이었다. 원의 아버지는 사형을 당하고 새댁은 실성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댁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고, 원은 인형 ‘희’를 제외한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은철과도. 영과 원이 큰아버지네로 이사가는 날, 은철은 원의 고통을 알게 된다. “자기가 병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원도 날카로운 고통이 사방에 철창을 두른 작은 방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을.(p. 329) 원은 이전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작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럴 땐 그저 원의 고통을 나도 껴안으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가능한 책장을 빨리 덮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보는 것이다.

 

 

 

  

착잡하고 안타까운 결말인데도 이 소설은 어둡지 않다. 그것은 수년 간 감방에 웅크려 있다가 갓 출소한 사람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햇빛의 기운이 이 소설에는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테면 닭발을 억지로 원에게 집어넣어 실신하게 만들었던 은철의 죄책감을 어른스럽게 달래주는 원의 마음 씀씀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p. 286-287) 그리고 “교복 치마를 여미고 앉아 빠른 손길로 운동화를 흔들어 행구는 영은 금세라도 날아가버릴 새처럼 아슬아슬하고 아름다웠다.”(p. 290) 같은, 훔쳐 쓰고 싶을 만큼 어여쁜 비유. 자신의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이 다감한 작가 덕분에 고통을 감싸는 온기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억울하고 고단한 이야기가 강퍅한 내 마음에도 얼마간 스며들 수 있었던 것 같다. 권여선 작가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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