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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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의 문장을 읽을 때 내가 짐작한 대로 다음 문장이 전개되지 않을 때 희열을 느낀다. 내게 그런 희열을 안겨주는 작가가 바로 전경린이다. 전경린 작가의 문장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아득해진다. 예컨대 이런 문장. “간혹 옆구리가 열리며 타인의 세상이 흘러들어올 때가 있었다. 타인이 헛것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양의 실체를 가지고 나란히 살아가며, 자신이 살아가는 것을 나에게 느끼라고 요구한다.”(p. 129) 단지 문장이 아름답고 반짝여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전경린 작가는 이야기에 맞는 문체를 꼭 맞게 입힐 줄 아는 작가다. 이번 [해변빌라]를 읽으면서 내 믿음도 굳건해졌다. 전경린 작가의 문장과 이야기는 점점 깊어져간다.

 

가령 이런 진술이 가능할까? “그 일 이후로 이린은 내게 친척이고 생모인 데다 한 명의 여자가 된 것이다.”  전경린 소설에서라면 가능하다. 아니, 가능할 뿐 아니라 말이 된다. 유지라는 소녀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유지는 그동안 아빠로 알고 있는 남자가 실은 고모부이며, 작은 고모가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이 소설에는 이렇게 표현된다. “내가 살아온 작은 세상은 뒤틀리며 산산이 붕괴되어버렸다.”(p. 20) 이후로 소녀는 끊임없이 아빠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유지는 중학교 생물 교사 이사경을 만나고, 이사경이 자신의 아빠이길 바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고모이자 엄마도 되는 손이린에게는 직접 물어보지 못한다. 그렇게 유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괄호 속에 묶어놓은 채 살아간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유지에게는 피아노가 있었고, 그 피아노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연인이 있었다. 그러나 부잣집 도련님 오휘는 유지의 곁을 떠나고, 그나마 함께 지내고 있던 작은 고모 겸 엄마 손이린도 떠난다. 유지 옆에는 피아노만 남는다. 그리고 괄호 속에 묶어 놓은 것들은 여전하다. 유지는 이린과 이사경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리 오래도록 괄호 속에 묶어놓았던 것일까. 그렇지만 계속 괄호 속에 묶어둘 수는 없는 노릇. 정작 이사경과 이린에게 묻지 않았던, 아니 묻지 못했던 것을 이사경의 아내 백주희에게 유지는 묻는다. 그러나 백주희가 확인해 준 건 이사경이 유지의 아버지일리 없다는 사실. 유지는 아마 그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 십 수 년 간 질문을 가슴에 묻어두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알고 난 유지의 반응이 가슴 아프다.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늘 아버지를 찾고 있었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p. 207) 이사경을 아버지로 믿고 싶어 했던 유지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해변빌라]의 인물들은 서두르지 않고, 감정을 쉽게 발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설에는 어떤 복받치는 감정의 나열이 없다. 그들은 “간혹 옆구리가 열리며 타인의 세상이 흘러들어올 때”(p. 129)를 기다릴 뿐이다. 인물들은 단지 이 소설의 제목이 된 ‘해변빌라’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본다. 그런데 이 소설의 그 덤덤함이 내 가슴을 친다. 사실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경험한 삶은 여느 소설 속 이야기처럼 극적 사건이 일어나 굴러가는 게 아니다. 그렇고 그런 일상들이 반복되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삶이다. 세상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사실 많지 않다. 묵묵히 바라볼밖에 없는 것들이 더 많다. 타인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저 흘러들어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스물일곱 살 유지는 그걸 벌써 깨달던 게다.

 

이 소설에서 단 한 장면만 내게 기억하는 게 허락된다면, 이사경과 백주희의 아들 연조가 병원에 입원한 유지를 병문안하는 장면을 꼽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유지와 연조 사이에 속 깊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 대화가 주는 묘미가 만만치 않다. 연조가 유지에게 말한다. “너는 10년쯤 어두운 물 위에 떠 있었던 사람 같아. 수련도 아니면서” 유지가 이 말을 이렇게 받는다. “알아. 오랫동안 물에 젖어 지낸 거 같아. 연조 너는 고층건물에 매달려 한 10년 유리창을 닦은 사람 같아.”(p. 141-142) 긴 시간 텅 빈 마음으로 지냈을 두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사랑했던 첫사랑도 떠나고 어디에도 마음 둘 데 없이 살았던 유지를 그대로 바라봐줄 수 있는 연조가 있어서, 나는 유지를 편안히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유지의 이야기가 내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시간만이 내 앞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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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 전쟁 - 슈퍼 달러의 대반격
레이쓰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부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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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무기화’란 말이 낯설지 않은 시대다. 특히 외환위기의 고통을 전 국민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한국으로서는 국제 금융의 동향에 특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올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겪은 어닝쇼크는 경쟁력 저하라는 측면도 있지만, 환율 변동의 부정적 요인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더구나 경기 안정을 되찾은 미국이 내년 금리 인상을 준비 중이라는 뉴스는 당장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나온 [G2 전쟁]은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에 대항하자는 중국 경제정책 전문가의 혜안이 담긴 책이다.

 

저자 레이쓰하이는 금융 전쟁의 역사를 더듬으며 미국이 금융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에 관해 말한다. 미국이 최근 양적완화를 통해 경제가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경제에는 불안요소가 많다. 현재의 정책은 금융 자산의 가격 상승에 의존한 경기 부양에 지나지 않으며 실물 경제는 회복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대책으로 내세운 제조업 부흥 정책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관적이다. 이미 공장들은 해외로 이전한 지 오래고, 고임금 하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거기다 신성장 동력으로 기대되는 신재생 에너지 산업은 달러 패권의 기반인 오일 달러를 무력화시킬 수 있고, 설령 크게 성공해 널리 보급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중국의 자원 안보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은 아직은 단단한 달러 패권을 이용해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저자가 미국이 화폐전쟁을 일으키리라고 예측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과 유로존의 위상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이 세계 최대 무역 대국으로 성장했고, 유로화의 위상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달러는 이전만큼의 지위를 누릴 수 없다. 달러 자본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자 달러의 일부는 미국 내에 쌓이게 되었고 이것은 서브프라임 사태로 이어졌다. 미국은 유로존이 붕괴되기를 원하지만, 이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달러 가치를 높여 여러 국가들이 유로화를 버리게 만들고 달러 자산에 투자하게 만들면 된다. 저자는 만약 유로화 퇴출이 실현된다고 해도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근 몇 년간 유로화의 비중이 감소했지만, 그렇다고 달러화 비중이 그만큼 증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칼끝의 향방은? 당연히 중국을 겨냥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지니고 있는 중국 공격에 대비한 무기는 금리 인상이다. 금리 인상을 통해 국제 자본을 달러로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달러가 강세로 반전된다면 신흥성장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의 양적완화 기간 동안 자산 가격에 낀 거품이, 달러 강세로 붕괴될 것이며 무역 수지 적자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중국도 이런 폭풍을 피할 수 없다. 중국이 보유하는 유로화, 엔화의 비중이 적지 않은 만큼 해당 통화 가치 하락으로 외환보유고가 줄어들 것이며, 결국 주식, 채권, 부동산 자산 가격도 하락할 것이다. 한국은 어떨까? 경기가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한국이 받게 될 고통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어떤 분들은 미국을 든든한 우방이라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이 책에서 저자가 논증하듯이 미국의 달러 패권주의는 동맹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한국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 책이 전적으로 중국의 입장에서 쓰인 만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대목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달러만이 득세하는 시대는 저물고 있고, 위안화와 유로화가 달러의 패권을 저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상황이 달러 패권주의 시대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더 멀리 보아서 만약에 슈퍼 위안화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어쩔 것인가. 위안화가 달러와 같은 패권을 행사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달러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은 합당하며 수긍할 만하지만, 저자의 논조에는 중국 경제 성장에 대한 자부심과 중국 금융 산업의 잠재력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달러 패권주의를 비판한다면 위안화 패권주의에 관해서도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책이 우리가 곧 맞이하게 될 국제금융의 지형도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위안화와 유로화가 달러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지, 아니면 거의 대등한 위상을 점유하게 될는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저자의 주장대로 위안화 국제화는 가까운 미래에 가속화될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원화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더 초라해질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외환위기와 글로벌금융위기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화 국제화에 여전히 소극적이다. 원화 국제화를 미루면 미룰수록 우리는 미국과 중국, 유로존, 일본의 통화정책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가 보여주듯 중국은 무서울 정도로 세밀하게 시나리오를 짜나가며 위안화 국제화를 준비하고 있다. 답답할 정도로 신중한 우리 정부 당국자들 손에 이 책을 한 권씩 쥐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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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눈물 - 개정증보판 아시아 문학선 9
수아드 아마리 외 지음, 자카리아 모하메드.오수연 엮음, 오수연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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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책을 집어 들고 본문 아무데나 펼쳐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난민 소설이라고. 이 책을 읽어가면서 맞부딪혀야 하는 어려움이 바로 이 점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소설이 아니라 사실을 진술한 책이라는 사실 말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나는 크리스천이다. 비록 '선데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기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이스라엘이 겪었던 고통의 역사를 들어왔다. 더불어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는 설교도 들었다.(지금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그런 식의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호의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잘못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당했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팔레스타인인들이었다. 책의 부록에서 홍미정 교수가 잘 정리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불과 3개월 전에도 인종청소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금속관 두 개를 내 뒤에 선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가 마치 북을 두드리듯 내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손으로 머리를 감싸려 하자 그는 손까지 후려쳤다."(120쪽) 이 문장의 화자는 놀랍게도 여자다. 이스라엘군의 잔인한 고문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 책이 고발하는 이스라엘의 추악한 행위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스라엘군에게는 남녀만이 아니라 노소의 구별도 없다. 1988년 이스라엘 총리 라빈은 이스라엘군에게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팔을 부러뜨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은 그대로 수행되었다.(166쪽)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인은 개, 돼지보다 못하며 죽어도 무관한 대상일 따름이다. 언론인 오마르 그라옙은 절규한다. "언제쯤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람으로 여겨질까? 인간으로? 민간인으로?"(19쪽)

 

차별은 일상생활에서도 엄연하다. 이 땅에서는 신분증을 갖는 일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예컨대 이스라엘 남성과 팔레스타인 여성이 결혼해서 낳은 딸은 신분증을 얻지 못한다.(86쪽) 특히 <먼지>라는 글에서 쉬블리라는 팔레스타인 소설가의 이야기가 인상 깊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쉬블리는 예루살렘 우체국에서 같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히브리어를 알아 듣지 못해 곤란을 겪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 혹여나 자신이 아랍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자신이 보내는 소포의 배송이 지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소포를 보내기 위해 내가 아랍인임을 감추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프리카 사람이었다면, 나는 내 살갗을 어디에 감췄을까?"(99쪽) 아!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하나? 아랍인의 피부색이 이스라엘인과 같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땅은 인간적 유대를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다. 아이샤 오디의 글에 따르면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데리야씬 주민들은 이웃한 유대인들과 커피를 마시고 기쁨과 슬픔도 나누던 사이었지만, 그 유대인들이 총을 들고와 살육을 저질렀다는 것이다.(142쪽) 도대체 이 땅에서 생활을 정상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까? 시인이자 소설가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25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귀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서글픔을 느낀다.   

 

아, 내가 이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마음 속에서 줄곧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 이것이다. 어차피 나는 "자기 억양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제 억양을 숨기고 남의 억양을 흉내 내야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것이 아닌 억양에 통달하는 능력을 길러야만 하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253쪽)일 뿐인데... 그래, 나는 죽어도 이들의 아픔에 온전히 다가설 수는 없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내가 흘리는, 어쩌면 알량한 눈물이 같지는 않겠지만, 그나마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이 책이 더욱 고맙다. 좋은 책을 판단하는 내 기준은 간단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머뭇거리지 않고 권해줄 수 있는 책이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책이 내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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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생각하며 살 것인가 판미동 영성 클래식 시리즈
제임스 앨런 지음, 장순용 옮김 / 판미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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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나이를 먹으면 살아가는 일이 좀 쉬워질 줄 알았다. 그런데 살면 살수록 사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계속 달리고 있는 건 같은데, 삶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 허전하다. 잠시 멈춰 서서 도대체 내 삶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듣고 싶었고, 문제를 교정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그저 그런 인생지침서만 가득하다. ‘심리학’으로 둔갑한 자기계발서적들이 난무한다. 이번에 손에 잡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 것인가]은 ‘백 년의 고전’이라는 카피를 단 인생지침서다. 이 책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기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기계발서들을 제치고 백 년이란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제임스 앨런은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구약성경의 선지자가 죄인들을 향해 외치는 것처럼 말한다. 처음에는 이런 확신에 찬 어조가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책장을 넘긴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문장을 읽으며 자꾸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특히 이런 대목. “만약 우리를 축복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게도 하는 파워가 환경에 있다면 그 환경은 우리 모두를 똑같이 축복하거나 고통스럽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겐 고통을 주는 환경이 다른 사람에겐 축복의 손길을 내밀 수도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선이나 악이 환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맞닥뜨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p. 47) 똑같이 고되고 어려운 환경에서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한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좋은 환경이 갖춰져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 아니냐고. 악조건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분명 시궁창에서도 성공한 이들은 존재한다는 거다. 왜 그 성공의 가능성이 내게 와서 실현되리라 믿지 않고 지레 낙담했는가. 이것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는 나중이란 결코 없다고 말한다.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하라는 것이다. 제임스 앨런은 좁아터진 아파트에 살고 있을지 모르는 이들에게 말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사는 좁은 아파트를 가능한 한 작은 낙원으로 변모시켜 당신 스스로 훌륭한 저택에 살 수 있게 맞추는 것”(p. 74)이다. 이 구절을 읽는데, 쑥대밭처럼 어지러운 내 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처해 있는 환경에 나 자신을 맞추지 못한다면 내게 행복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든다. “진정으로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돈이 모일 때까지 선행을 연기하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p. 87) 이 말은 금전적 차원을 넘어 시간의 차원으로도 확장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남들을 돕는 일을 유예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본다.

 

결국 관건은 마음이다. 모든 선과 악이 마음에서 시작되고 마음에서 끝난다. 마음을 다스리느냐의 문제가 그래서 중요하다. 저자는 일이란 본질적으로 고통이 아니라 생산적이고 유익한 것이며 건강에 공헌하기까지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하며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가. 에너지를 어리석게 낭비하기 때문이다. “만약 건강을 굳게 지키고 싶다면 당신은 ‘마찰’ 없이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p. 143) 그러고 보니 흔히들 일을 하다가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 스트레스는 일의 고됨 때문이 아니라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저자가 말한 대로 마음을 지킬 수만 있다면 ‘스트레스’라는 낱말도 잊고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을 읽는 내 마음을 따갑게 찔렀던 대목이 있다. “당신이 베풀고 난 뒤 상대가 감사를 표하지 않거나 기뻐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치자. 만약 그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준다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허영심에 불과하다. 당신은 단순히 얻기 위해 주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실제로는 준 것이 아니라 빼앗는 행위나 다름없다.”(p. 190) 누군가를 호의적으로 대하고는 그 사람이 내게 그만큼의 호의를 보여주지 않을 때마다 나는 얼마나 마음 상해했는지. 이제 보니 그건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그저 내 만족을 위해 애써 호의를 베푸는 척한 것이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내 지긋지긋한 셈법을 내다버리고 싶다. 그런 내게 저자는 말한다. “‘경쟁’이라는 낱말이 ‘지고한 정의’에 대한 당신의 신념을 흔들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p. 197)

 

이 책은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처음에는 한 챕터를 읽고 잠시 머뭇거렸는데, 점차 한 문단, 한 문장 앞에서 멈추게 된다. 이 책은 무엇보다 인생을 살아가며 놓치고 있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내게 소중하다. 그동안 나는 늘 생각하며 산다고 나름 자부했는데, 이 책에 비추어보니 그것은 대개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이거나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었다. 무언가 안 풀린다고 실망하고, 자괴감에 빠져 시간을 허비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현명한 저자의 말을 되뇌고 그 기운을 내 발걸음 하나하나에 불어넣는 수밖에는 이 어리석은 자에겐 다른 길이 없을 것 같다. “어리석은 자는 소원이나 불평을 말한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활동하면서 기다린다.”(p.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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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 -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여는 법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문진희 옮김 / 판미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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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영적 세계에 대해 관심이 있어 이런저런 책을 들추어 보았으나, 내가 찾으려 했던 것을 찾지 못했다. 이번에 읽게 된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나의 눈]은 이전의 책과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특히 저자가 정신과 의사로 오랫동안 일해 왔다는 사실이 신뢰감을 주었다. 적어도 호킨스 박사라면 모호한 말로 변죽만 올리다 끝나는 책의 저자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내게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1부는 ‘신의 현존’이란 주제로 시작한다. 어떤 것도 고요한 상태를 어지럽히지 않고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다. 움직임이 일어나기는 해도 그 움직임은, 움직임 너머에 있지만 움직임마저 포괄하는 움직임 없는 고요함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아직 나는 이런 상태를 맛보지 못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나간다. 읽어 나가는 데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생각할 거리다. “신에게 내맡기는 것을 제외한 모든 동기를 버리고자 하는 자발성은 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부터 일어난다. 깨달음이 아니라 신의 종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신의 사랑의 완벽한 통로가 되려면 완벽하게 내맡겨야 하고 영적인 자아의 목표 추구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기쁨 그 자체가 영적인 노력의 기폭제가 된다.” 책을 읽으면서도 자꾸만 무엇을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신의 종이 되는 것’과 ‘기쁨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직 내게는 쉽지 않다. 그래도 잠잠히 호흡을 내쉬며 따라가 본다.

 

신의 현존을 체험하려면 에고 즉 자아를 해소해야 한다. 우리는 에고에 “너무나 많은 것을 투자한 탓에 버리기에는 몹시 아까운 것으로 보인다.” 가끔은 경제적 효율성을 삶의 영역에까지 끌어다 놓는 나 자신, 사소한 것들이 아까워서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것을 놓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데, 이런 내 실상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말이다. 저자는 이런 삶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빵 부스러기를 얻기 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저자가 말한 대로 “후회할 과거도 두려워할 미래도 없”는 평화가 내게도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빌어본다. 그래도 여전히 이기적인 나를 어찌할 것인가. 저자는 마음에 관해 “생각들이 사적인 것이자 소중한 것이고, 자아에 속한 것이거나 자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을 따라 나도 내 생각 속에서 아주 오래된 ‘내 것’이라는 인식을 깨버리고 싶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피해 어디 산속이라도 들어가야 하나.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덫이 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집착이나 진리에 대한 참구(參究)를 가리는 자신의 관찰들”이라는 것이다. 하기야 이 세상에서 세상 아닌 것들이 있겠는가. 그래서 내게는 이 책이 더 각별한 것 같다.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참고하며 영적 세계를 알아갈 수 있으니. 저자는 신의 본성에 관해 설명하면서 “현존 속에서 모든 시간관념은 사라지며,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평화의 핵심적인 측면이다.”고 강조한다. 이 대목을 읽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궁리해 본다. 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인데,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시간 감각’이 사라지는 상태를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 고질병 그러니까 조급함을 다스려야만 한다.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냐는 물음에 저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엇 무엇에 관해 알려고’ 하지 말고 ‘앎’을 구하십시오.” 이 대목을 읽는데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실상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있었어도 그 관심은 늘 ‘무엇 무엇에 관해 알려’는 데에만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우리의 내면에서 ‘나는 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바로 그 진술에 의해 그것이 거짓임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읽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중요한 지침이다. 나는 무엇을 읽고 나서는 그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저자의 지침에 따르면 그것은 교만이다. 마음을 항상 낮은 자리에 두어야겠다. 저자는 교육의 가치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에 따르면 “교육은 생각의 흐름에 신뢰할 만한 요소를 부여해 주고 따라서 행동의 흐름에도 신뢰성을 부여해” 준다. 그러나 교육을 받는다고 모두 다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교육을 통해 나 자신을 바꿔보려 했던 내 노력의 결과가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책은 두께가 만만하지 않은 만큼 내게는 저자의 말 전체가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영적인 것들에 관해 “흥미를 갖는 사람들은 결국 깨닫게 될 공산이 크다”는 저자의 말이다. 저자가 영적으로 성숙해진 사람들에 관해 통계적으로도 보여주고 있어서 더욱 미덥기도 하다. 정말이지 영적 세계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에서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며 후회하게 될 것만 같다. 급한 마음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 얻으려다가 실패하지 말고 “나날의 삶 속에서 그저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 정도도 수행의 좋은 출발점이 된다”는 저자의 말처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오늘부터 해봐야겠다. 그러면 나도 언젠가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영적 세계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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