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소설의 문장을 읽을 때 내가 짐작한 대로 다음 문장이 전개되지 않을 때 희열을 느낀다. 내게 그런 희열을 안겨주는 작가가 바로 전경린이다. 전경린 작가의 문장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아득해진다. 예컨대 이런 문장. “간혹 옆구리가 열리며 타인의 세상이 흘러들어올 때가 있었다. 타인이 헛것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양의 실체를 가지고 나란히 살아가며, 자신이 살아가는 것을 나에게 느끼라고 요구한다.”(p. 129) 단지 문장이 아름답고 반짝여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전경린 작가는 이야기에 맞는 문체를 꼭 맞게 입힐 줄 아는 작가다. 이번 [해변빌라]를 읽으면서 내 믿음도 굳건해졌다. 전경린 작가의 문장과 이야기는 점점 깊어져간다.

 

가령 이런 진술이 가능할까? “그 일 이후로 이린은 내게 친척이고 생모인 데다 한 명의 여자가 된 것이다.”  전경린 소설에서라면 가능하다. 아니, 가능할 뿐 아니라 말이 된다. 유지라는 소녀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유지는 그동안 아빠로 알고 있는 남자가 실은 고모부이며, 작은 고모가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이 소설에는 이렇게 표현된다. “내가 살아온 작은 세상은 뒤틀리며 산산이 붕괴되어버렸다.”(p. 20) 이후로 소녀는 끊임없이 아빠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유지는 중학교 생물 교사 이사경을 만나고, 이사경이 자신의 아빠이길 바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고모이자 엄마도 되는 손이린에게는 직접 물어보지 못한다. 그렇게 유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괄호 속에 묶어놓은 채 살아간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유지에게는 피아노가 있었고, 그 피아노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연인이 있었다. 그러나 부잣집 도련님 오휘는 유지의 곁을 떠나고, 그나마 함께 지내고 있던 작은 고모 겸 엄마 손이린도 떠난다. 유지 옆에는 피아노만 남는다. 그리고 괄호 속에 묶어 놓은 것들은 여전하다. 유지는 이린과 이사경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리 오래도록 괄호 속에 묶어놓았던 것일까. 그렇지만 계속 괄호 속에 묶어둘 수는 없는 노릇. 정작 이사경과 이린에게 묻지 않았던, 아니 묻지 못했던 것을 이사경의 아내 백주희에게 유지는 묻는다. 그러나 백주희가 확인해 준 건 이사경이 유지의 아버지일리 없다는 사실. 유지는 아마 그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 십 수 년 간 질문을 가슴에 묻어두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알고 난 유지의 반응이 가슴 아프다.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늘 아버지를 찾고 있었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p. 207) 이사경을 아버지로 믿고 싶어 했던 유지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해변빌라]의 인물들은 서두르지 않고, 감정을 쉽게 발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설에는 어떤 복받치는 감정의 나열이 없다. 그들은 “간혹 옆구리가 열리며 타인의 세상이 흘러들어올 때”(p. 129)를 기다릴 뿐이다. 인물들은 단지 이 소설의 제목이 된 ‘해변빌라’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본다. 그런데 이 소설의 그 덤덤함이 내 가슴을 친다. 사실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경험한 삶은 여느 소설 속 이야기처럼 극적 사건이 일어나 굴러가는 게 아니다. 그렇고 그런 일상들이 반복되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삶이다. 세상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사실 많지 않다. 묵묵히 바라볼밖에 없는 것들이 더 많다. 타인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저 흘러들어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스물일곱 살 유지는 그걸 벌써 깨달던 게다.

 

이 소설에서 단 한 장면만 내게 기억하는 게 허락된다면, 이사경과 백주희의 아들 연조가 병원에 입원한 유지를 병문안하는 장면을 꼽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유지와 연조 사이에 속 깊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 대화가 주는 묘미가 만만치 않다. 연조가 유지에게 말한다. “너는 10년쯤 어두운 물 위에 떠 있었던 사람 같아. 수련도 아니면서” 유지가 이 말을 이렇게 받는다. “알아. 오랫동안 물에 젖어 지낸 거 같아. 연조 너는 고층건물에 매달려 한 10년 유리창을 닦은 사람 같아.”(p. 141-142) 긴 시간 텅 빈 마음으로 지냈을 두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사랑했던 첫사랑도 떠나고 어디에도 마음 둘 데 없이 살았던 유지를 그대로 바라봐줄 수 있는 연조가 있어서, 나는 유지를 편안히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유지의 이야기가 내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시간만이 내 앞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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