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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문장강화 - 이 시대 대표 지성들의 글과 삶에 관한 성찰
한정원 지음 / 나무의철학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영원히 잊히지 않는 불멸의 문장을 쓰고야 말겠다.”는 따위의 포부가 내게는 없다. 그저 쓰고 나서 부끄럽지 않은 문장만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도대체 문장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 내 손에 들어온 [명사들의 문장 강화]가 좀 더 나은 문장을 쓰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책을 펼쳐 들었다. 한정원이라는 저자 이름은 낯설다. 책 뒷날개의 지은이 소개를 읽어 내려가 본다. <지식인의 서재>의 인터뷰어? 그렇다면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네이버에서 건져낸 가장 큰 수확은 <지식인의 서재>였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서재>를 통해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박찬욱 감독, 황현산 선생의 서재를 훔쳐볼 수 있던 건 큰 유익이었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분은 남경태 번역가였다. 나는 남경태 선생의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를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는데, 단정하면서도 유쾌한 문체로 서술한 역사에 관한 세심한 통찰에 놀랐다. 보통 자기 글을 쓰는 작가의 번역서를 읽고 실망할 때가 많은데, 남경태 선생의 번역은 달랐다. 남경태 선생의 번역을 통해 좋은 역사서와 철학서를 헤메지 않고 읽을 수 있었으니, 나는 선생께 많은 빚을 진 셈이다. 선생의 문장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선생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것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선생은 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고 한다. 선생은 문장 하나를 쓸 때도 “길게도 쓰고 짧게도 쓰며 독자가 지루하지 않도록 표현 방식을 철저하게 계획한다.”(p. 196) 내가 잘 읽힌다고 생각했던 선생의 문장이 그냥 쉽게 쓴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경태 선생이 요즘도 반복해서 읽는다는 [부분과 전체], [인간의 대지], [말테의 수기]를 독서예정목록에 적어두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큰 도전을 주는 이는 장석주 시인이다. 장석주 시인은 우리 시대의 독학자라 할 만한 분이다. “아마추어들은 퇴고의 중요성을 몰라요. 어마어마하게 퇴고해야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명한 작가들이 일필휘지로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p. 227) 퇴고라는 걸 거의 하지 않는 나 같은 아마추어는 이 대목에서 뜨끔하다. “시인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모든 구절을 정확하게 외울 정도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소화시켜버렸다.”(p. 239) 시인은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은 정기적으로 되풀이해 읽는다. [도덕경]과 [그리스인 조르바]는 멀리서만 봐도 읽는 사람이 어느 부분을 펼치고 있는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글 짓는 일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장석주 시인도 이렇게 책과 자신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힘썼는데, 내가 그동안 해온 것들을 돌아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시를 쓸 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안도현 시인의 지침 중 다음과 같은 항목이었다.
-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혹시 생각나는 시인 없으신지...? 나는 김경주 시인을 바로 떠올렸다. 최근에 발표하는 시들은 그렇지 않지만, 철학을 눅여낸 시와 거기에 딸린 거침없는 각주는 한때 김경주 시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김경주 시인의 그 시들을 좋아하고 또 지지한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 지지하고 말 것도 없이 김경주 시인은 이미 인정받은 시인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 나오는 명사들의 지침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정형화되어 있는 틀에 자신을 맞추지 말라”(p. 43)는 고은 시인의 말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좋은 문장가들은 모두 좋은 독서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시 쓰는 일이 말하기와 진배없을 것 같은 고은 시인도 단테의 [신곡]을 늘 새롭게 읽는다고 한다. 안도현 시인도 같은 생각을 말한다. “자신이 읽은 독서량이 글쓰기 실력이에요. 이건 진리죠.”(p. 295) 내 머리를 강하게 때린 것은 이지성 작가의 글쓰기에 관한 대목이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아니었다면 상대성 이론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 그는 나흘간이나 매달렸다고 한다. 더 잘 쓰고 싶어서 아인슈타인 관련 서적 여섯 권을 읽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명사들에게 “쓰다”와 “읽다”는 같은 말이었다. 나는 늘 글을 쓸 때마다 좌절하곤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너무 조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문장이 부족한 것은 아직 내가 독서로 덜 채워졌기 때문이라는 위로도 해본다. 황소걸음으로 읽고 쓰기를 되풀이 하다보면 부끄럽지 않은 문장을 쓸 날이 언젠가 오게 될 것이라고, 기약 없는 희망을 품으며 이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