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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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어떤가? 만 28살 남자는 결혼을 했고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라는 별명의 친구와 이런저런 강연을 들으러 다니고 곤충 채집과 모래 연구가 흥미를 가진 인물이다. 정신적인 성병을 앓고 있었지만, 그것도 특별한 질환은 아니었다. 8월 어느 날, 곤충 채집을 위해 모래 마을을 향했던 이 남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7년이 지나, 민법 제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모래 마을’은 어떤가? 그곳에서 남자는 모래의 여자와 어느 구덩이에 감금당했다. 처음은 도망가고자 하는 원초적 욕구로 가득했다. 이곳에 갇혀 있는 것 자체가 벌이었다. 그러나 지금 남자는 유수장치에 관해 느끼는 흥분에 도취했다.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무인도를 문명화하려고 분투했던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남자는 모래 환경의 생리를 발견-탐구하는 유희를 즐긴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모래를 파헤치는 사이 7년이 넘는다. 남자는 실종선고를 받는다. 니키 준페이, 1927년 3월 7일생. 만 35세 때다.


‘사회’와 ‘모래 마을’은 어떤가? 결말에 도착한 남자에게는 더 이상 ‘사회’와 ‘모래 마을’을 서로 다른 두 공간으로 나눌 이유가 없다. 이 점은 탈출할 동기가 사라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회’와 ‘모래 마을’을 분절된 두 공간으로 인식하기를 멈춘다. 남자는 이전까지 사회와 모래 마을의 관계를 중심과 주변, 안과 밖처럼 인식했고 자신이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기대했다. 그러나 남자가 놓인 이 초현실적인 공간의 구조가 뫼비우스의 띠와 닮았다면 어떨까? 더 이상 어디로 이동해도 탈출할 수 없다. 더욱이 이 공간에서는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을 통한 탈출이라는 개념의 의미 자체가 부재한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밖’이라는 다른 영역에 도달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구덩이에 갇힌 남자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의 기억 속 두 명의 인물과의 에피소드가 전해지는 게 전부이다. 그는 모래 마을 이전에도 인생이 만족스러웠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있고, 두 번째로 뫼비우스의 띠라는 별명을 가진 동료교사 친구가 있다. 남자는 단출한 인간관계만을 자랑하지만 특이한 에피소드를 전달한다. 남자는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콘돔을 사용하는 규칙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아내에게 ‘상품 견본을 교환하는’ 그런 거나 다름없는 관계를 갖는다는 섹스에 대한 불평을 듣는다. 그가 콘돔 없이는 발기부전에 빠지는 불능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으나… 직장에서 만난 친구와는 활발한 교사노조 활동을 하고 있다. 사복 경찰이 감시하는 강연에도 참석했던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뫼비우스의 띠이다. 이유는 친구의 ‘직장과 사생활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모래의 여자>의 공간에서는 “곤충 : 모래 = 인간 : 사회”라는 유비의 비례식이 성립한다. 곤충 포획을 위해 모래 마을을 찾은 남자는 포획당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신원을 묻더니 관청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란 것을 확인했다. 그는 모래의 여자가 사는 구덩이에 갇혔다. 이곳에 온 까닭은 Cicinaledela Japana Motschulsky라는 학명을 지닌 곤충을 찾고자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래에 갇혔다. 모래: 암석의 파편의 집합체. 때로 자철광, 주석, 그리고 간혹 사금을 포함하고 있다. 직경 1/16~2mm. 채집하고자 하는 곤충의 생태를 연구하면서 모래라는 물질에 대해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다.


남자는 며칠이 지나도 구조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절규해도 들을 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완전히 붙잡혔다. 인간이 모래 구덩이에 갇혀 살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주하였으나 실패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살려달라” 애원하여 구조되어 다시 모래의 여자의 구덩이로 돌아왔다. 모래의 여자는 라디오를 살 수 있을 돈을 모으고자 구슬을 꿰는 부업에 열심이다. 남자는 희망을 갖고 새를 잡기 위한 장치를 만들었다가 우연히 “유수장치”를 개발한다. 모래 구덩이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고, 왜 이 모래가 나무집을 부패하게 하고 무너뜨리는지도 납득하였다.


남자는 모래의 여자가 마치 곤충의 개체처럼 모래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실에 경악한다. 강제로 제압하고 마을 사람들을 유인해서 탈출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나서 남자는 모래의 여자와 강압적인 섹스를 한다. 모래의 여자는 순응하고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밝힌다. 전 남편과 아이의 뼈가 이곳 모래 어딘가에 묻혀 있으며, 폐허의 시대 끊임없이 걷다가 겨우 도착한 이 모래 마을을 떠나서 어딘가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 모래의 여자는 돈을 벌어서 라디오를 사고 싶다는 욕망을 거듭 말하고 결국 산다. 마을 사람들은 모래를 퍼내서 도시의 건축업자들에게 팔고 있다고 한다. 남자는 소금기 많은 이 모래를 사용하면 부실공사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하지만, 여자가 말한다. “무슨 상관이에요. 그건 남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탈출하고자 했던 남자가 모래 마을을 더 이상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끝난다.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수 장치”를 통한 실험에만 관심이 사로잡혀 있다. 왜 그의 태도가 바뀌었을까? 정신질환적인 해석도 가능할 테지만 나는 지양한다. 그가 지내면서 모래의 여자와 쌓은 관계 때문에 떠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모래의 여자와의 섹스에서는 콘돔이 없이도 원만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그 무엇보다 그가 모래에 대한 탐구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구덩이에 감금된 이후 모래의 여자와의 관계에서 노동과 섹스를 충족했으나 그가 이 모래 마을에 처음 찾아온 까닭인 관찰과 탐구의 유희는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점은 결말에서 충족된다. 그리고 남자는 탐구를 계속해 나간다. 마치 곤충이 자신에게 주어진 생태환경에 맞춰서 다른 독특한 형태로 자신의 종을 진화시켜 나가듯이 남자는 모래 마을에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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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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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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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 최신개정판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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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는 순례자다. 우리는 그를 폐교회에서 처음 만난다. 사제가 되어야 할 재목이었다. 여행을 꿈꾸기에 소명을 거부했다. 사제는 교회를 위해 살아간다. 마치 양치기가 양을 위해 살아야 하듯 메여 있다. 아버지는 허락한다. 아들에게 재물을 주고, 아들의 바램대로 양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아버지의 눈에 산티아고는 그다지 다른 삶을 살지 않는다. 안달루시아를 떠나지도 않았고, 선한 목자가 되었다. 금새 마을 소녀와 눈이 맞아 정착할테지.


그러나 신은 다시 산티아고를 부른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날 것을 허락했던 아버지에게 산티아고의 여흥은 기다릴만 했지만, 양들에게 메여 음식과 물만을 찾아 다니는 산티아고는 가여웠는지, 꿈을 보낸다. 소년은 지상의 기적을 꿈꾼다. 사막과 피라미드가 보이는 꿈. 그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집시 여인은 그곳에 보물이 있다고 한다. 살렘의 왕을 만나게 된다. 아불싸, 정착하긴 틀렸군. 이때 양 10분의 1을 내놓는다.


해협을 건너 탕헤르 항구에서 남은 양을 모두 잃는다. 사막을 건너긴 틀렸다고 생각이 들었을쯤 살렘의 왕의 조언과 두 돌맹이가 아직 남아 있단걸 상기한다. 크리스탈잔을 팔고 돈을 모아서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아랍어도 배운다. 이때, 전재산을 지불한 대가로 얻은 것은 다른 장소에서 사는 경험, 여행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익힘, 메카로 떠나는 것이 꿈이지만 결코 떠나지 못하는 중년의 인생과 마주함이다. 양치기를 버리니 사막을 건널 준비가 조금은 되었다.


산티아고는 되돌아가서 다시 양치기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상의 기적과 보물에 이끌려 사막을 건넌다. 책에 파묻힌 영국인을 만나다. 그는 연금술을 공부한다고 한다. 산티아고도 연금술을 배워보려 하지만, 그에겐 사막이 더 유혹적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정과 밤의 휴식과 모닥붉. 부족간의 전쟁이 이어지는 두려운 땅. 양들마저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땅. 광야이다. 아랍어를 배웠듯 사막에서 사막을 배운다. 살렘(오아시스)에 도착한다.


왜 피라미드일까? 예루살렘은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함께 한다면 어째서 로마에게 무너졌겠는가. 피라미드를 향해 떠나는 여정은 오아시스 마을에서 잠시 멈춘다. 파티마를 만난다. 소년과 소녀는 사랑한다. 매의 오멘(표지)을 읽는다. 습격이다. 사랑하는 소녀와 살렘을 지키기 위해 소년은 목숨을 건다. 마크툽. 낙타잡이에게 배운 아랍의 아멘. 산티아고는 쓰여진 것을 바꾸었을까? 그가 쓰여진대로 지켜낸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연금술사가 나타나고 그에게 말한다.


너는 누구이길래. 감히 오멘을 읽는가. 어째서 이곳에 있고 어디로 향하는가 말한다. 파티마를 두고 떠난다. 재회를 꿈꾸며 더 깊은 사랑을 느낀다. 파티마는 무하마드의 넷째, 막내 딸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의 위상은 그리스도교의 성모에 비견될 만하다. 오아시스에 다다른 소년은 자신이 이미 지상의 기적들을 마주하고 있다는걸 여렴풋하게 느낀다. 파티마의 가호였을까? 산티아고는 예언을 행했다. 연금술사는 어린 예언자에게 길을 인도하기 위해 사막을 건넌다.


사막에 갇힌다. 부족 전쟁에 휘말렸고, 모든 재산을 내놓았고 간신히 사흘을 벌었다. 연금술사는 담담하게 말한다. 충분한 시간이다. 바람이 되어여라. 나는 이미 바람이 될 줄 안다. 소년은 기적을 행하여야 살아남는다. 오랜 성서의 숱한 예언자들처럼. 다행하게도 바람이 되기만 하면 된다. 불도 물도 대지도 아닌 바람이다.  연금술사는 물질만이 아니라 영혼을 꿰뚫어보고 연성하는 대가인듯 하다. 산티아고는 그는 본디 순례자이고 그는 살아 숨쉬는 이상 여행하고자 한다.


숨을 쉬는 것과 바람이 되는 것은 산티아고에게 있어서 같다. 모두 여행이란 자아 신화를 향한다. 납이 금이 되는 연금술의 변환처럼 둘은 서로 뒤바뀔 수 있다. 사막의 인간은 사막을 통해 이 진리를 느끼지만, 이것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죽는다. 인간은 진리의 문을 오직 죽음 다음에서야 마주하게 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며 잊는다. 그러나 그 진리가 어딘가 쓰여져 있단 것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창조를 보고 싶고, 완성을 보고 싶고,  연금술을 보고 싶어한다.


바위 산에 오른 소년은 모르는 사막을 부르고, 사막은 바람을 부르고, 바람은 태양을 부른다. 이들에게 소년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자연은 진리를 안다. 그러나 사랑을 모른다. 소년은 자신의 목숨과 사랑을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산티아고의 여러 여정 중 하나의 여정이 이곳에서 끝난다. 신을 향한 여정이 완성된다. 기적이 완성되고 바람이 된다. 소명을 거부했던 이유는 교회가 아닌 신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파티마가 인도해줬던 걸까.


이후 여정은 피라미드를 향한다. 연금술사가 납으로 금을 만드는 연금술을 보여주지만, 소년은 배우지 못한다. 산티아고는 숨쉬는 생명으로부터 바람이 되어, 원소가 되어 자신의 연금술을 보여줬다. 굳이 더 배워야 할 이유도 가르쳐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연금술사 자신이 금을 연성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둘은 헤어진다. 소년을 아들이라 부른다. 연금술사에게 천사가 깃들 것일까? 알 수 없다.


이때, 소년에게 연금술사는 그리스도를 만난 로마의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어째서 이 기도가 널리퍼졌는가. 연금술사는 그때 평범한 사람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다. 신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기적이다. 소년이 바람이 되는 것 또한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가 될 것이라 말한다. 소년의 일생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기도할 때 마음 속에 그리는 이야기로.


마지막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꿈을 꾸었지만 안달루시아 교회로 떠나지 않은 청년은 아무 것도 겪지 않았다. 그는 보물이 그곳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악한지 선한지 알수 없을 유혹에 따르지 않았다. 나 같은 놈들이 세상에 널렸는데, 그곳까지 간다고?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산티아고는 바람보다 빠르게 재회하고 싶은 사막의 여인을 만났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보물은 거기에 있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추측이다.

1. 파티마는 성모 마리아다. 산티아고는 그 소녀를 다시 만나진 못한다. 이 소설의 모든 인물들은 산티아고를 제외하고는 보통명사로 이름붙여져 있다. 파티마 예외일까? 아닐 것이다. 그녀는 사랑을 가르친다. 기적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널리 여행하게 한다. 파티마는 포르투칼의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코엘료는 포르투칼어로 글을 썼다. 아래는 위키피디아 파티마 항목이다: “파티마의 유명한 성지인 대성당은 1917년 세 어린이가 파티마의 성모를 목격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름이 무엇이냐는 어린이들의 물음에 대해, 여인은 “나는 로사리오의 성모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린이들은 코바 다 이리아라고 불리는 목초 지대에서 성모 발현을 경험한 것이었다.”


2. 보물은 폐교회에 있거나 없거나 알 수 없다. 신은 결코 부를 약속하진 않는다. 스스로 일궈내는 것이다. 건강과 생명의 은총만을 내려주지 부를 내려주진 않는다. 낙태잡이 아저씨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첫 장면의 폐교회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째서 산티아고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까. 나는 그곳에서 산티아고가 파티마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를 지나서 파티마를 데리고 교회로 가도 되는 것인데, 어째서 먼저 보물을 얻고 파티마와 재회할 것을 꿈꿨을까?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물은 파티마다. 소녀로 발현했던 성모가 이번엔 진정한 모습으로 산티아고를 기다린다. 내가 생각하는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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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 최신개정판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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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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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뜻을 밝히고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프로이트가 남긴 많은 개념 중에 '가족 로맨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이쯤된다고 해둘 수 있겠습니다.


'가족은 자신들의 기원을 사실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들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나에게도 가족사에 얽힌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스님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의심쩍은 이야기다. 큰 아버지가 세 번 장가를 들거라는 것이 하나고, 내 아버지가 단명할 거란 것이 둘째다. 마지막으로는 이 집안에 큰 인물이 날 거라는 말이다. 나는 도시화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부모세대에서 이촌향도하여 도시에 적창했다. 내게 시골 산골은 부모의 고향으로서만 기억에 있다. 저 전설도 마찬가지다. 체감할 수 있는 증거물이 아무 것도 내겐 없어 말뿐인 미신이다. 향토에 대한 기억이 없다시피 하지만, 이런 나 또한 가족사를 거슬러 근대사를 접하고 체감한다. 먼 귀경길을 밟아 내려간 땅의 기억이 내게도 남아있다. 나의 외가, 친가 두 할아버지 모두 대한민국의 남한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오사카와 원산에서 태어났고, 어떤 경위를 거쳐 벌교와 해남에 정착했다. 나는 인천 만수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암의 실공장에서 만났다고 한다. 가리봉동에서부터 인천 동구의 항만 근처까지 영세한 작은 공장들이 수없이 자리잡았었다. 이 경공업 지대에서 근로했던 것이다. 각각 부산과 서울을 거쳐 이곳 인천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이런 토양으로부터 성장하여 사회로 나가야 했다.


마쓰사부로 집안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앞서 더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집안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그의 집안은 테베의 왕가이지만, 일찍이 신탁에 의해 버려져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간통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는 이 사실을 깨달고 자신을 두 눈을 찔러 눈이 먼다. 마쓰사부로 집안의 두 형제도 눈이 멀쩡치 않다. 다카시는 엽총탄에 두 눈을 잃고 즉사했다. 오이디푸스보다 과격한 신체파괴를 자행하고 자살했다. 만엔 원년의 풋볼의 이야기는 다카시의 이야기다. 그도 근친상간자였으나, 술에 취해 정신박약의 여동생과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여동생은 이후 자살했다. 그는 오이디푸스처럼 기개에 넘치는 삶을 살아보지 못 하였고, 언제나 수치심에 시달리며 왜소한 삶을 산다.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치부를 괴로워하다 봉기를 일으키고 죽었다. 다카시의 남은 형인 마쓰라부로(이하 소설의 화자 ‘나’)는 한 쪽 눈을 아이들의 돌팔매 놀음에 잃었다. 망막이 손상되서 눈의 형체는 남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마쓰사부로는 자신의 한쪽 눈이 내면을 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런 심안은 그에게 어떤 위안을 주는 평화로운 내면세계를 관조하지 못한다. 망가진 눈은 망자와 장애인, 퇴형적인 자신과 중독에 빠진 삶에 고정된채 감기지 않는 물고기의 눈처럼 항상 떠있다.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으나 먼저 죽었다. 고향 시골마을처럼 집안도 쇠락했고, 패전한 일본을 살아내야 할 짐에 마쓰사부로와 다카시도 신음한다. 근대화가 실패한 것이다. 1860년 만엔 원년, 일본이 막 개국과 근대화의 격류로 들어서던 시기에 고향 마을에서는 징세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있었다. 중간관리층을 맡은 마쓰사부로의 집안은 증조부와 증조부 동생으로 분열했다. 동생은 농민을 조직하고, 죽창으로 무장시켜 영주에게 맞섰고, 형은 그런 동생을 단칼에 베어 진압했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남았다. 마쓰사부로가 생각하는 진실은 마을사람들이 믿는 그런 무사 이야기 같은 것과는 다르다. 정황을 통해 볼때, 동생은 도망쳤을 것이다. 봉기가 답보 상태에 빠지고 진압군에 쫓긴 상황에서 증조부 동생이 곶간채에서 화승총을 들고 항전하다 죽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이 이야기 또한 신빙성이 낮다. 만엔 원년의 봉기는 이 마을 절에 지옥도란 불화와 마을 축제의 염불춤이라는 행위로, 즉 민속유산으로 남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만엔 원년으로부터 100년(1860년부터 1960년), 이 100년은 개화가 들이닥치고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지는 긴박한 격량의 시기였다. 역사가 멈출지 모르고 전진했다. 그러나 이 마을은 관으로부터 도망쳐 산골에 정착하였고, 다시 그곳에서 다시 징세에 저항하여 봉기하길 반복해왔을 따름이다(마을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초조카베 모토치카에게 쫓겨 산골로 들어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창립 신화가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에게 만엔 원년의 봉기는 오래된 전설과 민속으로 남아 있다. 반면 다카시는 그 실패한 봉기에서 인간 해방의 좌절과 가능성을 읽어내고, 현재에 다시 되살리려 한다. 자신들의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선조들의 봉기로부터 찾는 것이다. 분명 시작은 자유, 해방,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자 했던 근대화였다. 그러나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던 메이지 유신마저도 비참한 결말로 끝났다. 세계사에서 작은 산골의 봉기의 실패는 머나먼 고립된 사건이고, 비록 이 마을이 내의 고향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만엔 원년의 봉기는 마쓰사부로가 인식하는 세계, 또는 "지금 여기"를 규정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는 원폭을 맞은 나라, 패전한 나라, 나아갈 길을 찾지 못 하는 나라만이 있다. 안보투쟁으로 좌절한 인민이 있다. 항문에 오이를 박고, 얼굴을 붉게 칠한 채 목을 메달고 죽은 친구가 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퇴형적인 인텔리에게 어울리는 결말일지, 정신병자의 마조히스트적인 발악일지. 나는 사태를 감당하기 앞서 사태를 규정할 도리가 없다. 그런 나는 정화조 구덩이에 파묻혀 죽으려 했던 실패이다. 아내도 나도 죽지도 못하고 있다. 새출발을 하지 못한 채 그래도 썩어가듯 살아있다. 나의 첫째 아이는 정신박약아로 태어났고 보호시설에 위탁하였다. "나" 마쓰사부로는 도대체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실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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