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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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체코에서 태어난 작가의 소설이다. 최초에는 1977년 체코에서 지하 출판됐다. 경악스러운 글이다. 분명 정치적인 검열과 제노사이드에 폭로가 담긴 이야기고, 주인공 한탸의 자살로 끝을 맺는 불편한 글이다. 오락적인 면모는 어느 한 구석 찾아보기 어려운 이 글을 어떤 점부터 쫓아가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일단 왜 이렇게 오물과 똥에 대해 많이 얘기할까? 보후밀 흐라발 말고 내가 알고 있는 유이한 체코 작가인 밀란 쿤데라와 프란츠 카프카 중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는 키치에 대한 논의가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부 대장정”에서는 똥에 대한 부정을 놓고 벌어진 신학 논쟁을 소개한다. 기독교 인류학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2세기 그노시스파의 대스승 발랑텡은 예수는 “먹고 마시지만 절대 똥을 싸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성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로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사비나는 키치를 싫어한다. 사비나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키치는 공산주의였다. 공산당은 자본주의와의 변증법적 대립에서 결국 도래할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사유재산과 이에 대한 동기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며 연쇄 혁명 아래 국가들의 주권을 박탈한다. 이는 개인이 지닌 사물에 대한 소유욕을 본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그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를 빼앗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동의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 2차 대전 동안 나치의 제3제국과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이중 점령하였던 동유럽 지역의 역사이다. 너무나 넓은 지역을 도망쳐야만 했기에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한탸의 이야기는 다시 체코로 돌아온다.


프라하는 이 넓은 땅에서도 중심이 되는 도시였다. 30년 전쟁의 격전지였던 도시이고 독일어가 유사 국제어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자신만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히틀러에게는 독일인을 위한 생존 공간일 뿐이었고, 이를 얻기 위해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2022년부터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격전지들은 2차 대전에서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그때 전쟁이 일어났던 곳에서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지역을 서유럽을 향한 교두보로서 확보하고자 하고, 독일은 자신의 해외 식민지를 대신할 유럽의 식민지로서 관리하려고 한다. EU 체제 이후로 독일은 동서 유럽의 교통로 역할로 경제적인 이점을 누리고 있다.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경계를 넘어 있는 이 넓은 땅에는 체코, 우크라이나, 헝가리 외에도 여러 나라가 있고 제노사이드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인한 유대인 피해자도 독일과 그 이웃인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서유럽 지역에서보다 동유럽 지역에서 많았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보다 그 너머 펼쳐진 광활한 숲과 들판에서 죽은 유대인과 집시가 많다. 공을 들여서 가스실을 짓고 그곳으로 포로를 이송해서 살인하는 학살 공장이라는 정책은 충격적이지만, 실제로 이뤄진 학살의 일부일 뿐이었다. 더 많은 인구가 들판과 숲에서 구덩이에 묻혀 죽었다. 2차 대전 동안 이 지역에는 이중 점령이 벌어졌다.


이중 점령은 한 지역을 두 정권이 번갈아가며 점령했던 것을 말한다. 마치 6.25 전쟁 때 서울을 인민군이 한 번 장악하고 이후 국군이 수복하고 다시 인민군이 장악했던 일이 벌어진 것처럼 주요 거점을 놓고 독일 국방군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쟁탈했다. 두 군대는 현지에서 가능한 모든 식량과 연료를 징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서는 굶어 죽었다. 나치 독일은 이를 '굶주림 계획(Der Hungerplan)'이라고 불렀다. 410만 명에 이르는 인구가 단 몇 해 만에 사라졌다. 이는 붉은 군대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티모시 스나이더의 <블랙 어스>는 이러한 소련의 전쟁범죄 성격을 밝히는 역사서고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냉전 기간 동안에도 소련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서방 세계의 지식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로 들었던 근거는 동유럽에서의 독일군의 좌절은 소련의 기여라는 점이었다.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 국방군의 정예들이 동유럽에서 소련의 제파 공격에 의해 녹아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지금 유럽의 자유에는 소련의 기여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과 함께 단 5개뿐인 UN의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유럽의 국가들의 민족주의자들은 이후 소련 시기의 정치적 박해나 수탈과 별개로 2차 대전 과정에서의 이중 점령으로 인해 자신들이 겪은 학살의 책임을 소련에게 제기한다.


한탸에게 거대한 산업적 압착기라는 것이 등장하고, 사회주의 노동자인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일터에 고용되었다. 한탸는 대체되고 지워질 오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한다. 압착기에 들어가서 스스로 죽어버리는 이 장면은 몹시 충격적인데, 마치 가축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순순히 걸어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도 닮았다. 아직 최신 압착기 공장이 들어서기 이전에 자신에게 익숙한 조건에서 죽는 것이 그나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전쟁 기계가 휩쓸었던 땅을 이제는 산업 기계가 지배한다. 조판기에서 태어난 책들은 압착기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 더미를 이루고 야적장에 쌓여가고 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한탸의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망신살을 타고난 만챠의 꿈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위안을 얻는다. 죽어서 일론카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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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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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시대가 몽테뉴의 시대와 닮은 만큼 나의 시대도 그들의 시대와 닮았다. 나의 시대는 전 세계적 재블록화와 정체성 정치로 인해 분열하고 있다. 내가 처한 시대로부터 물러나는 ‘체념과 물러섬’을 몽테뉴로부터 얻었다. 역사의 광기는 반복되고 있지만 휘말리지 않기를 선택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 이것이 주는 위로가 깊다.

생애 말년 슈테판 츠바이크는 16세기 인문주의자 중 한 명인 몽테뉴의 삶을 담은 책을 유고로 남겼다. 이 유고 덕분에 몽테뉴가 겪은 종교전쟁의 시기와 슈테판 츠바이크가 겪은 파시즘의 시기라는 유럽사의 두 극단의 시대를 두 인물 사이의 대화로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의 승기가 꺾이지 않던 1942년 망명지 브라질에서 자살을 선택했다.

유고로 남은 미완성 원고를 읽는 것은 생전에 출간된 저서를 읽는 것과는 다른 친밀함이 있다. 때문에 내게 이 책은 두꺼운 편지로 여겨진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의 선생님이 화자 ‘나’에게 책 한 권 분량의 편지를 유서로 남긴 것과 같은 비감함과 내밀함이 있다.

그의 유고는 위로하는 정신의 공간으로 남았다. 그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나는 이 지면에 남긴다. 몽테뉴처럼 어느 나이에 성벽 속의 성채로 물러나지 않더라도, 잠시 내 시대로부터 ‘체념하고 물러서는’ 용기를 지닌다면 나의 치타델레에 머물 수 있다. 나의 치타델레를 갖기 위해서 재력도, 타인의 성채를 빼앗는 일도 필요하지 않다.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 뒤에 우편을 주고받는다면, 우편의 그 지면이 치타델레이겠다. 우정이란 자신의 치타델레에서 타인의 치타델레로의 편지 교환이다.


“나는 어떤 믿음과 이상을 따라서 격하고 부조리한 망상을 쫓아서 지혜와 멀어졌는가?”


나의 치타델레를 갖고 싶었다. 나는 고전과 역사에서부터 해법을 얻고 싶어서 책을 사 모았다. 골동품 수집가의 창고처럼 내 방이 어지러워졌다. 골동품과 고서를 모아두는 일에 내 정력을 소진했다. 나의 서재가 작아 보였다. 박물관을 꾸려놓지 않으면 탐구를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더 좋은 박물관은 어디에 있는가를 검색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할 작품이 갖고 싶었다. 나만이 내 공간에서 관람한다면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은 모르는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나는 학교를 찾아서 그곳의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지식에 대한 탐욕은 인문주의자들의 길이 아니다. 지난 시대의 형이상학적 욕망을 나의 시대의 이해의 대체품으로 삼을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월한 텍스트란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자기 자신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라면 족하다. 치타델레는 성벽 속의 성채도, 사원들의 사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축재로부터 치타델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기만이고, 이것은 마술적인 사고에 가깝다고 하겠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고전을 열심히 많이 읽었다. 저절로 글을 잘 쓸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다. 주문을 암송하는 것과 같았다. 몽테뉴의 길과는 다른 길이었다. 나와 닮아 보이는 대가를 서둘러 찾고 그를 닮으려고 들었다. 그와 나와의 동일시 아래서 읽은 텍스트는 모두 내 것이 된 것으로 보였다. 도스토옙스키가 내게는 그런 작가였다. 서재를 더 채워서 만족감을 누렸지만, 이 길 또한 살아가며 우정을 쌓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을 만들어 그에게 의탁하기였다. 그가 나를 가르칠 수 없는 것까지 나는 그에게 바랐다.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은 내가 그를 통해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내 감정만큼 컸다. 몽테뉴는 내게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일깨워준다. 그는 내게 다정한 우정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나를 위해 쓰는 기쁨을 느껴라.

몽테뉴는 누구도 그가 “유명하다”, “다들 좋아한다”,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되도록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그는 내게 너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라고 한다. 기억력을 괴롭히고, 좁은 방을 더 좁게 만들고자 책을 사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과 대화하는 때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 생각의 흐름을 느낄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내 마음이 흐르는 곳에서부터 내게 편지를 쓰듯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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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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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를 읽는 특별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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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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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독서모임을 위한 모임자료를 게시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의 원문 발췌는 박스처리 하였고 페이지만 표기하였습니다.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온 본서 1판 8쇄를 사용하였습니다. 



1.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은 발전한 일본의 미래가 세계의 미래라는 희망적인 전망이 저물고 잃어버린 10년이 1991년부터 진행되어 10년이 흐른 200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때로부터 다시 25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우리는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일본인 독자들과는 다른 사회현실과 문화산업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왜 이 책을 읽는지에 대해서 대답해야겠습니다. 제가 처음 이 책을 찾아 읽은 이유는 아래 질문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의 인간은 서사를 엄청나게 많이 소비하는데, 왜 ‘문학’이라는 제도화된 서사는 상대적으로 적게 소비하고, 웹소설·웹툰·드라마 같은 서사물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제가 처음 갖고 있던 질문이었고 아직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굳이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처럼 복잡한 설명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론에서 텍스트의 소비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가 주목한 2000년대 초반의 웹과 PC 환경은 텍스트뿐 아니라 이미지·캐릭터·음성·분기 등 서로 다른 기호를 데이터베이스에서 호출하고 조합하는 소비 방식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오타쿠 현상을 만화나 애니메이션, 동인지와 같은 기성문화 생산/소비의 틀을 넘어서 2000년대 초반의 웹과 PC환경에서 비롯된 콘텐츠의 첨단성과 연결지어 접근해 들어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1990년대의 애니메이션을 넘어 "미소녀 게임"이라는 콘텐츠 양식에 툭히 주목합니다. 이 이형(異形)이고 이질적인, 그러나 동시에 최-첨단인 문화현상에 대한 젊은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은 동물화 하는 오타쿠들에 대한 절망과 함께 그들이 품은 희망의 감정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YU-NO를 집중 비평하는 "3장의 초超평면성과 다중인격"에서 엿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지난 선정도서인 <지의 관객 만들기>를 통해 "겐론"의 창립과 경영 과정을 알고 있습니다. 겐론의 여명기는 2010년부터입니다. 제게 있어서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은 늦어도 2013년도 정도부터 알고 있던 책이었고, 그 이전부터 오타쿠론을 다른 서적을 통해 접해왔기에 "잘 분석했고 흥미롭지만 대단치 않은 책"이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이후 아즈마 히로키의 경영실천 과정인 겐론에 대해 알게 되고부터는 조금 더 의미 있는 책이라고 평가해 봅니다.



   

왜 “데이터베이스적 동물”로 적응했을까?


우선은 아즈마 히로키의 논지와는 다를 수 있지만, 제가 정리한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의 사회적인 기원에 대해서 제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패턴에서 주목하는 주변성은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적 획득 경쟁에서 물러나 새로운 욕망 충족 체계에 접속하게 되는 하나의 중요한 경로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주변부에 머물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고독을 즐긴다. Nobody가 아닌 Somebody가 되고 싶다면 획득한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체념하고 물러서야 한다.   

무엇이 내게 만족과 위안을 주는가?

분노하지 않고 후퇴할 수 있는 이유는 만족, 또는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성실한 자에게 분배될 복을 기대하고 다음 기회를 추구하는 것과 같은 오래된 태도가 있겠다. 그렇지 못하다면 기존의 세계관, 가치관을 다른 것으로 변경,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체념과 물러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쁨의 박탈'보다 '고통의 억제'가 마음의 우선순위로 자리잡는다. 행복했던 시절의 회상, 더 안 좋은 삶을 짊어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 명백한 환상임을 알지만 몰두하여 즐김 등의 접근이 있겠다.   

그 중에서도 어떤 콘텐츠가 싸고 빠르게 작용하는가?

내가 속한 집단에서 전염성이 있는 것, 내가 오랜 시간 접해와서 익숙한 것, 호모소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현실의 도피로 오독될 수 있지만 오히려 현실의 강한 순응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도태론이 나온다. 이 지점으로부터 이형(異形)의 서브컬처를 단지 여가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접속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욕망체계가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로 소비하는 인간형이 있는 것은 아닐지 추정해 볼 수 있다.


모임 질문 1. 오타쿠 문화는 어떻게 서브컬쳐로 형성되었으며,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이후에도 왜 주변부적 성격이나 혐오의 대상이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가?


저는 이번에 재독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통해 처음의 질문, 즉 사람들이 왜 ‘문학’보다 웹소설·웹툰·드라마와 같은 서사물을 훨씬 많이 소비하는가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아즈마가 말하는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이 일본의 잃어버린 수십 년 동안 어떠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적응해 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2. 아즈마 히로키의 두 질문


2010년대 정도부터 급격히 발달한 SNS로부터 인공지능 대한 논의가 이 저작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는 2010년대부터는 겐론을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원래 전문분야라고 할 수 있는 영역으로부터 점차 벗어나는 경향을 보입니다. 미소녀 게임과 오타쿠론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보이지만, 점차 첨단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데에서 ‘어떻게 시민사회를 만드는가’로 문제의식이 되돌아가고, 경영실천에 분투합니다.

지금 2026년에는 그의 아래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매우 바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AGI가 완성되기 이전까지는 인공지능이 어디까지나 도구에 머물겠지만, 지금의 인공지능은 데이터베이스를 연결하는 핵심 실체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포털에 직접 검색하는 경험이 사라져가는 현상이 주된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대학의 기능과 위상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의 스타트업 신화는 기성 교육의 후진성을 중퇴자 출신 창업가라는 신화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피터 틸과 같은 투자자가 직업 개설하는 창업 시스템에 ‘진학’하는 현상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1. 포스트모던에서는 오리지널과 복제의 구별이 소멸하고 시뮬라르크가 증가한다. 그렇다면 그 시뮬라르크는 어떻게 증가하는 것일까? 근대에서 오리지널을 창출하는 것이 ‘작가’였다면, 포스트모던에서 시뮬라르크를 창출하는 것은 무엇일까?


2. 포스트모던에서는 커다란 이야기가 실조되고 ‘신’이나 ‘사회’도 쓰레기junk 같은 서브컬쳐에서 날조될 수 밖에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근대에서는 신이나 사회가 인간성을 보장하며 구체적으로는 종교나 교육기관이 그 실현을 맡고 있었다면, 그 양자의 우위가 실추된 후에 인간의 인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임질문2. 질문 (1)은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실생활에서 작동하는 이상 미국 빅테크의 사업이 창출한다고 대답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어 보입니다. 그에 비해서 두 번째 질문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봅시다.




3.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에서 해리적 인격까지


코제브는 전후 미국에서 대두한 소비자의 모습을 ‘동물’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강한 표현이 쓰인 것은 코제브의 독특한 인간 규정과 관계가 있다. 헤겔에 의하면(더욱 정확하게는 코제브가 해석한 헤겔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그 자체로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는 행동이 있어야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과의 투쟁이 있어야만 한다. 

이에 비해 동물은 항상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싸여, 또 미디어가 요구하는 대로 모드(mode)가 바뀌어 가는 전후의 미국의 소비사회는 코제브의 용어로는 인간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동물적이라고 불리게 된다. 거기에는 군주도 투쟁도 없는 대신 철학도 없다. “역사의 종언 이후 인간이 그들의 기념비나 대성당이나 터널을 건설한다 해도 그것은 새가 집을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개구리나 매미처럼 콘서트를 열고 새끼 동물이 노는 것처럼 놀며 다 자란 짐승이 하는 것처럼 성욕을 발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코제브는 초조하게 기술하고 있다. 

다른 한편, 스노비즘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 양식이다. 스놉은 환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거기에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스놉은 그것을 굳이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할복자살이다. 할복에는 실질적으로는 죽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명예나 규율이라는 형식적인 가치에 입각하여 자살이 행해진다. 이것이 궁극의 스노비즘이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부정의 계기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동물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또 역사시대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르다. 스놉들은 자연과의 대립(예를 들면 할복할 때 본능과의 대립)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의식적으로 수행되는 할복은 아무리 그 희생자의 시체가 쌓여도 결코 혁명의 원동력이 되지 않는 것이다. 119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라는 냉소주의

지젝은 그 긴 이행기의 정신을 훌륭하게 반영해 그 구조를 가장 알기 쉽게 이론화한 사상가일 것이다. 20세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초월적인 커다란 이야기는 이미 없어졌으며 또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것의 가짜를 날조하고 커다란 이야기의 겉모습을, 즉 사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겉모습을 믿어야 했던 시대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저쩡하게 포스트모던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하기 때문에 산다는 역설은, 지금이야 이미 그 무게를 잃어버렸지만 지난 냉전시대에는 지극히 절박한 사고방식이었음에 틀림없다. 127


스노비즘이란 생물학적 욕구나 생존의 필요를 넘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위해 행동하는 태도이다. 코제브에게서 스노비즘은 인간이 자연적·동물적 욕구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해리적 마음의 움직임은 어쩌면 독자에 따라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작은 이야기는 반드시 그 배우의 커다란 이야기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소설은 하나의 결말밖에 갖지 못했고, 또 그 결말은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포스트모던의 노벨 게임에서는 주인공의 작은 이야기에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된 유한한 요소가 우연의 선택에 의해 조합된 시뮬라르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재현 가능하지만, 시각을 바꾸면 한번 던진 주사위의 결과는 우연인 동시에 필연이라는 의미에서 역시 필연이며 재현 불가능하가도 말할 수도 있다. 커다란 이야기에 의한 의미 부여를 운명으로 생각할 것인가, 유한한 간으성의 다발에서 선택된 조합의 희소성을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여기에는 소설과 노벨 게임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 근대적인 삶의 기법과 포스트모던적인 삶의 기법의 차이가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는 지면 관계상 오타쿠계 문화밖에 검토할 수 없지만, 보다 넓게 시뮬라르크 수준에서 생겨나는 작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의 수준에서 생겨나는 커다란 비이야기에 대한 욕망의 이 해리적인 공존이야말로 포스트모던을 사는 주체를 일반적으로 특징짓는 구조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147


예를 들어 한 인물의 사랑이나 실패, 성장과 몰락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계급사회, 근대화, 가족제도, 인간의 자유와 같은 더 큰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경우겠습니다. 이때 인물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동시에 더 큰 문제를 이해하게 하고, 반대로 그 사회적·역사적 맥락은 인물의 운명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준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까요?


저의 경우 주로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웹을 접하지 않은 19세기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저작들을 소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근대의 책읽기>(천정환)의 일제시대 독자의 독서를 연구한 책을 읽으면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2005~2009년도에 ‘읽는’ 것을 즐기는 학생은 거의 웹소설과 NT노벨과 노벨게임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특징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1)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읽거나 <레 미제라블>을 읽더라도 이들이 그런 서사물을 소비하는 까닭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원작으로 삼거나 래퍼런스하고 있는 작품을 소비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잦았습니다. 단적인 사례는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하겠습니다. 나스 키노코의 어반 판타지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영령 길가메시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나온 기사도 있으므로 공유드립니다(막내 편집자-게임 유저가 합작해 만든 ‘15년 만의 역주행’). (2) SF, 판타지, 스릴러 장르의 고전 서사물들이 웹에서도, 제 또래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독서 정전의 위치 취급을 받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유년기의 끝>,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말 할 것도 없고, 톨킨을 넘어서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가 유행을 하고, 본격적인 의미에 미스테리물이 유통됩니다. (3) 마지막으로 NT노벨 원자의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공전의 히트,  타입문, 리프, 키와 같은 회사들으 노벨 게임이 불법다운로드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즈마 히로키가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은 저의 경험에서 의문점 하나를 해소해주었습니다. “왜 텍스트를 그토록 많이 읽는 친구들이 19세기의 저작물들을 읽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려워서라거나 장르가 달라서라고 보지 않습니다. 난해하고 어려운 서사를 갖기로는 오히려 노벨 게임이 더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보다는 애당초 다른 텍스트였다고 봐야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범주를 나누어서 다른 텍스트 상품이라고 생각하곤 있었습니다. 그치만 이러한 분류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나누는 기준에 따른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었습니다. 근본적인 설명을 원헀습니다.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말을 신뢰한다면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은 그다지 과격한 이론은 아닐 수 있다고 봅니다. PC게임과 그 시대의 캐릭터 노벨은 다른 인간형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임질문 3. 아즈마 히로키가 강조하는 지점은 여기로부터 이탈해 있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오타쿠는 시큘라르크 레벨의 작은 이야기를 욕구하고, 데이터베이스적인 욕망을 갖고 커다란 비야야기를 욕망하는 인간입니다. 그는 이러한 인간을 해리적 인간이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의 의미가 이해가 되시나요?




4. 

아즈마 히로키는 2010년 정도부터 겐론(ゲンロン) 경영을 시작합니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겐론은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오프라인의 중요성(‘사람이 모이는 곳’)과 오배송이 있는 공간이 하나로 묶이고, 

(2) 다른 하나로는 좋은 관객이 좋은 문화를 만든다, 계몽의 강조이 하나로 묶인다고 보겠습니다.

아즈마 히로키 본인의 내적 성장으로는 호모소셜과의 결별을 고백하고, ‘나와 같은 사람’을 모으는 내부지향적인 공간을 만들기를 포기합니다.

그는 <존재론적, 우편적>을 통해 1999년 제21회 산토리 학예상(사상·역사 부문)을 수상하고 데뷔한 28살의 비평가였습니다. 그 후 2년 뒤인 2001년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을 간행하며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 사회론을 제시합니다. 그의 일본 사회론은 오타쿠라는 특정 집단의 문화를 바탕하기 때문에 비약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고, 미소녀 게임의 소비와 제작과 같은 소재 자체의 성격과 지나친 미사적 분석인 점은 그의 사회론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후 꾸준한 활동으로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흥미로운 일관성을 보여주는 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단순한 인포테이먼트 성격의 인물로 자리매김하지 않은 점, 본래 그의 강점인 최첨단의 논제와 그의 팬층인 맹우들에 대한 서비스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층의 사람과의 교류를 통한 사회관계를 만들고자하는 시도가 주목됩니다.


모임 질문4. 나의 생활에서 어떤 경험을 선택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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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
펄 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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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이에 닥친 기근은 왕룽이 가족과 대지를 떠나 남쪽 도시로 이주하게 한다. 노인인 아버지, 어린 첫째와 둘째 아들, 갓난쟁이 딸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화차를 탔고, 도시의 성곽 아래 구호소에 의존한 채 난민으로 기약 없이 입에 풀칠을 하며 버틴다. 왕룽은 오란과 결혼하고부터 재산을 쌓는 재미로 왕성하게 노동했다. 그 결과 황 대감으로부터 비옥한 논마지기를 사들였고, 풍족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나 이곳 대지는 짧게는 5년, 길게는 7년 사이로 극심한 기근과 홍수가 번갈아 들었다. 이번 가뭄에 왕룽 가족은 모든 걸 버리고 오직 땅만을 말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남쪽 도시 성곽 아래 거렁뱅이로 전락했다.


2년의 극빈 생활을 아내 오란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오란은 굶주림이 극에 달했을 때조차 단호하게 땅을 팔지 않는다. 미련없이 가구와 집안 물품을 모조리 팔아치워 여비로 삼았다. 남쪽 도시에 도착한 직후 여자인 자신과 아이들은 구걸로 먹고 살 수 있으니 남편은 돈을 모아 집으로 돌아갈 대책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만약 필요하다면 딸아이를 팔아서라도 모두 살아남아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고 말한다. 왕룽은 오란이 마찬가지로 굶주린 처지의 부모가 노예로 팔아넘겨 황 대감댁 계집종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너무 부유해진 부자들이 혁명으로 몰락할 때 기회가 생겼다. 피난한 도시 부자의 집에서 왕룽은 금화를, 오란은 보석주머니를 노략질했다. 이를 밑천 삼아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지는 펄 S. 벅의 대표작으로 <아들들>, <분열된 집안>으로 이어지는 3부작의 첫 소설이다. 이야기는 왕룽이 오란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시작한다. 왕룽을 중심으로 그의 집안 가족들의 생애를 따라가고 있다. 안후이 농촌의 전근대적인 중국 가족의 삶과 풍습이 생생하다. 딸을 노예로 팔아치우는 부모, 전족을 강요받는 여성의 삶, 지주의 축첩과 축재라는 사회 문제를 놓치지 않고 다루지만, 이야기는 농부 왕룽이 대지와 맺은 “풍요의 약속”을 신화의 이야기처럼 전한다. <대지>는 도시화 이전의 삶, 농촌과 농사, 땅과 인간의 풍요와 생명력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농촌문명의 풍습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성장하고 변모하는 인물인 왕룽의 시야를 따라서 모험하듯 체험해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개성적이고 특출나다기보다는 관습적이고 전형적이지만 생생하고 강렬하다.


오란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왕룽의 인생의 챕터가 나뉜다. 1부는 고난과 축재, 2부는 풍요와 병폐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 황 대감 댁에 들렀던 가난한 농부 왕룽은 2부에 들어 대감 댁의 땅뿐 아니라 집까지 모조리 자기 것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이제 자신도 대감의 입장에 선 것이다. 왕룽은 고민을 겪지만 평온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아들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왕룽은 계집종 출신이었던 오란을 소중한 아내로 맞았고 땅에서 노동하며 스스로 일어선 인물이다. 그의 첫째와 둘째 두 아들은 어린 시절 남쪽 도시에서의 극빈을 경험했으나 이후 왕룽이 재산을 쌓으면서 노동이 면제되고 간단한 글공부를 배우며 땅으로부터 멀어졌다. 터울이 있는 막내 아들은

글공부를 시키지 않고 농부로 키웠다. 막내 아들은 형들과 다른 처우에 피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모습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어머니 오란을 닮았고 말수가 적은 점까지 물려받았다.


맏아들의 혼례를 보고 오란은 죽었다. 왕룽에게 오란은 몹시 가난하고 어려울 때 고생을 함께 겪은 아내로 말 그대로 조강지처(糟糠之妻)이다. 이어서 늙은 왕룽의 아버지가 죽었다. 옆집 남자였고 자신을 잘 따르며 집사 역할을 했던 칭도 죽었다. 이 집에서 이제 과거 가난한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졌다. 둘째 딸은 시집 보냈고, 백치 딸을 돌볼 사람이 없어 자신이 돌본다. 집안에서 오란이 묵묵하게 맡았던 조화는 사라졌다. 첫째와 둘째 아들의 며느리가 싸우고,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로 인해 골치를 썩지만 아편을 제공해서 무마시켜나간다. 위협이 되던 종제가 전쟁터를 찾아 떠났기 때문에 왕룽은 한시름을 덜었다. 이런 그에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친다. 막내 아들이다. 막내 아들은 배움을 원했다. 왕룽은 농사일을 맡겨 막내 아들만은 농부로 키우려던 생각을 접었고, 가정교사를 붙여줬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왕룽의 말년은 조용히 흘러갔다. 종제의 위협마저도 지니고 있는 재산이라 할 수 있는 계집종을 한 명 내주면서 파국을 피했다. 늙은 롄화 대신 몸종이던 어린 리화를 취했다.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고 체면이 조금 상하지만 원하는 건 모두 가졌고 표면적으로는 두 아들도 자신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막내 아들만은 달랐다. 자신에게 대드는 막내 아들에게 원한다면 계집종을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농엔과 눙웬에게는 어린 리화를 애첩으로 삼은 것을 보이는 것이 껄끄럽지 않았다. 막내 아들에게는 달랐고 두려움을 느꼈다. 

“전 이제 군대에 가겠어요. 이제 전 떠나야겠어요.”

막내 아들은 리화를 애첩으로 삼은 것을 문제 삼고 대들지는 않았지만 “왕룽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 아들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대지>의 후속편 <아들들>로 이어지는 30장의 이 부분은 이야기의 경첩이 되는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1) 왕룽과 막내 아들의 관계가 어떻게 끝났지, (2) 막내아들이 두 형 농엔과 농웬과 어떤 다른 감정과 동기를 지니고 살아갈 것인가를 어렴풋하게 가늠해보게 한다. 오란은 26챕터에서 죽었고, 30챕터에서 막내 아들이 농부 역할을 면제받았다. 왕룽은 가부장으로서 자식들의 인생을 자신 뜻대로 결정해 왔으나 자식들은 대체로 따라주지 않았다. 장남은 위신을 위해서 가르치고 재물을 대주었고, 차남은 잇속을 챙기기 위해 곡물상으로 밀어줬다. 그 결과 장남 농엔은 허례허식과 허영으로 가득한 놈팽이가 되어갔고, 차남 농웬은 자기 결혼식 하객에게도 고기와 음식을 아끼는 재산만 쫓는 자로 성장했다. 왕룽이 베풀어준 도움이 좋게 작용한 적이 별로 없고 아들들의 본성의 나쁜 면이 더 무성하게 자라나게 했다. 그에 비해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막내 아들은 하인이나 일꾼처럼 농사일만 하고 컸다. 오란과 막내 아들이 닮은 지점들이 연결된다. 참고 견디는 이들에게 왕룽은 무심했고 이들은 굳은 결심을 가진 채로 세월을 견뎠다.


<대지>의 풍요는 정의로움과 관련이 얕다. 자연이 주는 벌과 선물은 짧은 인생사를 예측불허하게끔 만든다. 누가 부를 쌓을지, 누가 번성할지에 있어서 대지가 요구하는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 아무튼, 왕룽은 대지의 풍요를 누렸다. 재산과 처첩, 자손과 수명에 있어서 은혜를 입었고, 그렇기에 그는 두 아들이 땅을 팔아치울 생각임에 분노한다. 대지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펄 S. 벅의 필체는 다음 시대를 예고했다. 막내 아들은 천하를 주유하는 삶으로 나아간다. 중국 역사의 최대 혼돈기이기도 했던 이 시대 왕룽의 자손들은 무엇을 마주할 것인가? 왕룽과 오란에게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찾았던 남쪽 도시였고, 맏아들에게는 향락과 도피의 장소였던 남쪽 도시였다. 작가의 펜은 막내 아들의 발걸음을 따라 남쪽 도시를 향해 천천히 옮겨가고, 수많은 도시와 전장의 사람들이 쏟아내는 젊고 빠른 말 속으로 뒤섞이며, 그들이 말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현대의 태동을 향해 약진할 것이다.




추기

  1. <대지>의 배경은 어림잡아 1900~1910년대 초반이다. 이때 중국의 도시화율은 10%에 미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UN이 추정한 2025년 기준 세계 인구의 45%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1. 막내 아들이 친모 오란에 대해서 더 깊은 정을 느낀다는 것이 소설에 표현된 부분은 없다. 부자가 된 이후 왕룽은 아이들에 관심을 잃고, ‘롄화’라는 첩을 들이고 재산의 즐거움을 느끼는 데 몰두한다. 막내 아들은 이 시기 사춘기를 겪으며 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롄화 사건이 정점을 치고 수그러들즘에 오란은 병으로 수명이 다하고 재산을 누려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가부장질서에 따라서 글공부를 했던 농엔과 농웬에 대해서 어머니 오란은 자신이 모셨던 황 대감댁의 도련님들처럼 엇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왕룽에게 돈을 받아 서당에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째와 둘째 아들은 어른대우를 받으며 오란의 품을 벗어난다. 오란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세번째인 백치 딸과 그 아래 막내 아들, 막내 딸이 많았을 것이다. 백치인 딸과 시집으로 떠난 막내 딸의 이야기를 알 수 없고, 막내 아들만이 가부장 왕룽에 대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막내 아들의 입장에서 볼때, ‘자신이 겪는 것보다 부당한 대우에 순종하는’ 어머니 오란의 죽음 다음인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오란의 죽음 이후 막내 아들의 이탈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다. 오란의 죽음은 이미 싹트고 있던 막내 아들의 이탈과 결단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서사적 경첩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1. 오란의 존재는 훗날 토지개혁을 다룬 중국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이 형상화한 ‘고대구심한 노동인민’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그러므로 중국 현대문학의 혁명적 서사와 비교할 때 펄 S. 벅의 접근은 다른 방향에 서 있다. 오란과 같이 가장 미천한 사람이 때론 가장 강인하고 지혜로운 존재로 그려지고, 주목받지 않던 막내 아들이 미래를 열어가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지》의 후속편 《아들들》의 서사 구조는 약한 자가 뒤집는 성서의 문법과 닮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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