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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1914년 체코에서 태어난 작가의 소설이다. 최초에는 1977년 체코에서 지하 출판됐다. 경악스러운 글이다. 분명 정치적인 검열과 제노사이드에 폭로가 담긴 이야기고, 주인공 한탸의 자살로 끝을 맺는 불편한 글이다. 오락적인 면모는 어느 한 구석 찾아보기 어려운 이 글을 어떤 점부터 쫓아가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일단 왜 이렇게 오물과 똥에 대해 많이 얘기할까? 보후밀 흐라발 말고 내가 알고 있는 유이한 체코 작가인 밀란 쿤데라와 프란츠 카프카 중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는 키치에 대한 논의가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부 대장정”에서는 똥에 대한 부정을 놓고 벌어진 신학 논쟁을 소개한다. 기독교 인류학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2세기 그노시스파의 대스승 발랑텡은 예수는 “먹고 마시지만 절대 똥을 싸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성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로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사비나는 키치를 싫어한다. 사비나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키치는 공산주의였다. 공산당은 자본주의와의 변증법적 대립에서 결국 도래할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사유재산과 이에 대한 동기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며 연쇄 혁명 아래 국가들의 주권을 박탈한다. 이는 개인이 지닌 사물에 대한 소유욕을 본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그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를 빼앗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동의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 2차 대전 동안 나치의 제3제국과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이중 점령하였던 동유럽 지역의 역사이다. 너무나 넓은 지역을 도망쳐야만 했기에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한탸의 이야기는 다시 체코로 돌아온다.
프라하는 이 넓은 땅에서도 중심이 되는 도시였다. 30년 전쟁의 격전지였던 도시이고 독일어가 유사 국제어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자신만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히틀러에게는 독일인을 위한 생존 공간일 뿐이었고, 이를 얻기 위해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2022년부터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격전지들은 2차 대전에서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그때 전쟁이 일어났던 곳에서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지역을 서유럽을 향한 교두보로서 확보하고자 하고, 독일은 자신의 해외 식민지를 대신할 유럽의 식민지로서 관리하려고 한다. EU 체제 이후로 독일은 동서 유럽의 교통로 역할로 경제적인 이점을 누리고 있다.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경계를 넘어 있는 이 넓은 땅에는 체코, 우크라이나, 헝가리 외에도 여러 나라가 있고 제노사이드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인한 유대인 피해자도 독일과 그 이웃인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서유럽 지역에서보다 동유럽 지역에서 많았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보다 그 너머 펼쳐진 광활한 숲과 들판에서 죽은 유대인과 집시가 많다. 공을 들여서 가스실을 짓고 그곳으로 포로를 이송해서 살인하는 학살 공장이라는 정책은 충격적이지만, 실제로 이뤄진 학살의 일부일 뿐이었다. 더 많은 인구가 들판과 숲에서 구덩이에 묻혀 죽었다. 2차 대전 동안 이 지역에는 이중 점령이 벌어졌다.
이중 점령은 한 지역을 두 정권이 번갈아가며 점령했던 것을 말한다. 마치 6.25 전쟁 때 서울을 인민군이 한 번 장악하고 이후 국군이 수복하고 다시 인민군이 장악했던 일이 벌어진 것처럼 주요 거점을 놓고 독일 국방군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쟁탈했다. 두 군대는 현지에서 가능한 모든 식량과 연료를 징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서는 굶어 죽었다. 나치 독일은 이를 '굶주림 계획(Der Hungerplan)'이라고 불렀다. 410만 명에 이르는 인구가 단 몇 해 만에 사라졌다. 이는 붉은 군대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티모시 스나이더의 <블랙 어스>는 이러한 소련의 전쟁범죄 성격을 밝히는 역사서고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냉전 기간 동안에도 소련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서방 세계의 지식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로 들었던 근거는 동유럽에서의 독일군의 좌절은 소련의 기여라는 점이었다.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 국방군의 정예들이 동유럽에서 소련의 제파 공격에 의해 녹아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지금 유럽의 자유에는 소련의 기여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과 함께 단 5개뿐인 UN의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유럽의 국가들의 민족주의자들은 이후 소련 시기의 정치적 박해나 수탈과 별개로 2차 대전 과정에서의 이중 점령으로 인해 자신들이 겪은 학살의 책임을 소련에게 제기한다.
한탸에게 거대한 산업적 압착기라는 것이 등장하고, 사회주의 노동자인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일터에 고용되었다. 한탸는 대체되고 지워질 오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한다. 압착기에 들어가서 스스로 죽어버리는 이 장면은 몹시 충격적인데, 마치 가축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순순히 걸어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도 닮았다. 아직 최신 압착기 공장이 들어서기 이전에 자신에게 익숙한 조건에서 죽는 것이 그나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전쟁 기계가 휩쓸었던 땅을 이제는 산업 기계가 지배한다. 조판기에서 태어난 책들은 압착기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 더미를 이루고 야적장에 쌓여가고 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한탸의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망신살을 타고난 만챠의 꿈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위안을 얻는다. 죽어서 일론카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