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형제를 읽으며 초반이 참 좋아서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 급의 작품을 만났구나 싶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레드 호세이니의 압도적인 승리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최대한 스포일러를 하지 않고 말해보자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특수성이 떨어진다. 형제의 후반부의 이야기는 거의 이런 원형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다만 소설 초반 이란의 서사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좋았다. 어떤 서사가 케릭터의 급격한 변화를 동반한다면 높은 확률로 좋은 이야기이다.

두번째 문제는 텍스트의 부제다. 호세이니의 소설은 '사랑의 속성에는 빚(채무관계)이라는 불순물이 섞여있다'는, 이 전에는 그 누구도 서사 속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텍스트를 선보였기에 특별한 위치에 올랐다. 일찌기 알렝드보통이 말했던 그 빚, 재무정책으로는 좋은 것이 아닐지 몰라도 인간관계는 잘 관리된 빚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된다는 그 빚말이다. 연을 쫓는 아이에서 이 빚이라는 지점을 드러내면 남는 것이 형제애와 파란만장한 운명인데 그게 바로 위화의 소설 형제다.

세번째 문제는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한 가지 이슈를 소비할 때 정확히 꼭 필요한 것만을 사용하는 것은 영미권 작가들의 미덕이다. 이 방면에 원탑은 조디 피콜튼데 호세이니도 이에 필적하는 정확한 패스를 구사하는 작가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싸비 에르난데스와 세스크 파브레가스쯤 된다. 대체로 구구절절 장황하게 늘어놓는 인간들은 핵심 서사도 약한 경우가 많은데 도스토옙스키처럼 코어를 이루는 서사와 택스트가 너무 강해서 장광설도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작가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그래서 연을 쫓는 아이에 비교하는 것이 좀 미안해졌다. 형제와 비교하기 적당한 소설은 한국 소설 고래다. 원형적 서사로 인해 특수성이 떨어지는 문제, 텍스트의 부제 등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소설이, 아니 연을 쫓는 아이까지 세 소설이 똑같은 수준의 훌륭함을 가지고 있는 지점이 있는데, 특정한 공간의 근현대사를 다루면서 로컬리티에 대한 뛰어난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정도의 구체성을 가진 한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반쯤 동의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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