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바위 보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23
패트리샤 매클라클랜 지음, 김영진 옮김,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아름다운 문장들과 가슴 저미는 표현 때문에 번역일을 손에서 놓기가 싫어질 정도라는 역자의 말처럼, 감성적이고 유려한 문장들이 마음을 저 멀리 바닷가로 실어 나른다. 때로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바닷가의 모습이, 어느 때는 모두 떠난 자리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섬마을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12세 소녀 라킨의 가정은 평범하고 평온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그러나, 탭댄스를 즐겨 추시는 아빠의 몸짓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엄마의 마음 속엔 내밀한 아픔이 자리잡고 있었다. 라킨의 남동생이 세상에 태어나 딱 하루만 살고 하늘로 가버린 이후, 이름조차 없는 작은 무덤의 형체보다 더 큰 슬픔이 말없이 가족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이야기를 불문율처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안으로 삭히며 살아간다.

어느 날, 아기 소피가 편지 한 장과 함께 바구니 속에서 발견된 이후 할머니와 엄마는 즉은 아기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소피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오로지 아빠만이 언젠가 다시 친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미래를 암시하며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무구한 아기 소피의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아빠 역시 사랑이란 감정 앞에 무력하게 허물어진다. 가위 바위 보는 바로 아빠가 소피에게 가르쳐 준 손동작이다.

학교의 미니프리드 선생님은 사람을 바꾸는 '말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말은 생각 속에 머무르던 형체를 밖으로 표현해 낸다. 별 의미없는 말들, 간단한 의미 전달에 그치는 말들도 많지만, 라킨의 식구들에게 있어서 '말'이란 가슴 속의 응어리를 토해내는 작업이었다. 언젠간 오리라고 생각했던 순간, 즉 소피가 친엄마에게 안겨 배를 타고 떠난 그날, 식구들은 모처럼 둘러앉아 이름도 없이 떠났던 '아기'의 얘기를 꺼낸다. 아기에게 윌리엄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늦었지만 장례식도 치른다. 이제 하늘로 간 윌리엄은 꺼내선 안되는 얘기가 아니라, 말의 힘을 빌어 언제나 식구들의 곁에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소피에게 있어 라킨의 식구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책의 소단원이 끝날 때마다 따로 떨어져 있던 짧은 글들이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그 문장들이 소피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에 그 누구보다도 뚜렷이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남자였다. 검게 그을린 강한 손. 그가 그녀를 안아 올리면 그녀는 쿵쿵 뛰는 그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고,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휘감겨 입가에 미소를 짓곤 했다. (p 50)--
--그녀는 목소리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귓가에서 속살대던 말들도. 그녀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잔잔한 산들바람 같던, 말.(p108)--
10년이 지나 가족과 소피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맞아 다시 재회한다. 구름 뒤에 가려져 있던 그리움의 얼굴들이 소피의 눈에 보인다. 그녀가 아빠를 보고 취했던 동작, 가위 바위 보.

친 자식을 버리고 방치하는 일들이 가끔씩 뉴스거리로 보도될 때마다 힘없이 작은 생명이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최소한의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이런 사례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주소를 말해준다고 생각했었다. 그에 비해 책 속의 세상은 진실로 사람사는 세상인 것 같다. 피붙이가 아닌 아기 소피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라킨의 식구들은 아름다웠다. 라킨의 식구들이 윌리엄의 죽음으로 받은 상처를 소피를 돌보며 치유했듯이, 때때로 벌어지는 상식 이하의 일들로 놀란 가슴은 이 책으로 촉촉히 적실 수 있다. 마음을 정화시키고 싶다면, 12세 소녀 라킨의 집을 방문해 보시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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