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에세이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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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달자 님은 80년대 후반에 전성기의 인기를 누렸던 분으로 기억된다. 그당시 에세이집이 한창 인기를 끌면서 신달자님 외에도 몇 분의 책이 많이 회자되던 때였다. 친구들 중에도 '백치애인'을 끼고 다니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타인의 인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에세이의 매력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엔 조용한 호수같은 신달자님이건만, 책의 광고를 보니 꽤나 힘든 일을 겪으며 사신 듯 했다. 이 책은 신달자님의 지나온 과거를 특유의 여유있는 감성적 필체로 묵묵히 회고하고 있다. 여러 권의 시집을 내셨던 만큼 단락마다 당시의 심경을 시로 표현해 실었는데, 수필보다 집약적인 한의 응축덩어리가 한숨과 함께 내뱉어진 것처럼 와닿는다.

뇌출혈을 일으킨 남편은 23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나지만 식물인간 상태에 불과했다. 정성어린 간호로 몸의 반쪽은 되살아났더라도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철부지 어린애의 모습을 보이며 정리되지 못한 말을 하는 그는 이미 예전의 속깊은 남편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 하자 남편은 우울증에 걸려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고 세 아이를 길러 내기까지 잠잘 시간도 부족했던 그때, 시어머니마저 쓰러져 꼬박 9년을 일어서지 못하고 사셨으니 어머니 보살핌의 몫 역시 신달자님의 것이어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답답하고 절망만이 가득했던 시절, 하늘에 원망이 절로 쌓여나갈 만큼 한탄만 나오던 시절, 고통은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채 다가와 펴고 펴도 끝이 없을 것으로만 보였다. 교수였던 남편이 제역할을 못하게 되자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직접 감당해야 했던 신달자 님은 남성 양복기지를 지인들에게 판매하는 보따리 장수 노릇을 하는데, 어느 까칠한 친지로부터 당한 모멸감에 이 일을 그만둔다. 

신달자 님이 새롭게 도전한 것은 대학원 진학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꿈꿔 온 문학인의 길을 가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하던 때가 마흔이니, 엄마와 아내와 며느리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추구해 나간 것이 걸음마와 다름없는 일이다. 뒤이어 엄청난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되며 더이상 경제적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부자의 반열에 오른다.

만약 신달자 님에게 이런 고난이 닥치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가정만 돌보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 그것도 나쁘진 않았을 거다. 어쩌면 고통 후의 베스트셀러 작가보다 고통없는 작은 평범함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막혀있던 논길이 시원하게 뚫리듯이 이후 신달자님의 인생에는 개인적으로 명예로운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 인생의 커다란 고개를 앞에 두고 힘들어 울던 신달자님은 어느덧 그 고개를 훌쩍 넘어 있었던 거다.

뭔가를 시작할 나이이기보단 주저앉기 쉬웠던 마흔이란 나이에 다시 출발하여 작가이자 교수로서 제 2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이 나이 또래로 뭔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전해줄 것이다. 신달자 님이 표현한 '온몸으로 흘리던 통통한 눈물'은 걸음마의 양분이 되었던 셈이다. 인생은 아무리 힘들어도 어지간하면 살아지고, 노력 여하에 따라 훌륭한 열매을 맺을 수도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힘들 땐 이 책을 뒤적이며 용기를 얻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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