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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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람의 열두 방향>(감상문📃)과 함께 친구에게 빌린 책. <바람의 열두 방향> 먼저 읽고 이걸 읽었는데 개인적인 이유로 싱숭생숭했다.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절반 이상 읽은 상태로 이걸 읽으니 어슐러 르 귄이라는 사람의 변화가 보이는 듯해서 그것도 재밌었다.

에세이 류는 구성이나 작가에 따라 읽는 속도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편인데 르 귄의 에세이는 자잘하게 쪼개져있는 탓인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바람의 열두 방향>보다 이걸 더 오래 읽은 것 같다. 책은 훨씬 가볍고 작은데! 하지만 르 귄의 힘 있는 목소리와 명료한 주장은 매순간 나를 사로잡는다. 마음 속의 스승이자 멘토로 삼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실 감상문을 쓰는 걸 쭉 미뤘다. 뭐라고 써야 좋을지 잘 모르겠더라. 하고 싶은 말이 많다면 너무 많고 없다면 너무 없다. 어슐러 르 귄이라는 작가는 근사한 SF 소설가이자 판타지 소설가이고 나는 그가 가진 장르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존경한다.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는데 이제는 르 귄의 이름을 적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판타지를 비롯해 온갖 장르 소설을 사랑한다. 하지만 다들 알지 않나. SF는 이제서야 겨우 한국 장르 독자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판타지는 내가 자라는 내내 유치한 삼류 장난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배우고 들어왔다. 내가 배운 교과서에 장르 소설은 단 한 작품도 실려있지 않았다.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가 교과서에 실렸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가 배운 교과서는 아니었고 그나마도 그것 한 작품 정도였다. 이영도 작가의 소설은 워낙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특혜를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같은 결론만 나온다. 이영도 작가만을 특별취급하기에는 내가 아는 좋은 장르 소설이 너무 많고, 그걸 학교에서 다루지 않는 걸 이해할 수 없다.

요즘은 순문학 시장에서도 장르가 꽤나 인정을 받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웹소설이라고 불리는 대중 시장을 무시하는 경향은 여전하다. 어째서 장르가 주목을 받는데 웹소설은 문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굳이 이유를 찾으면 너무 장편이라서 그렇지 않나 싶기는 하다. 어슐러 르 귄이 사는 미국이 단편을 장편을 쓰기 위한 연습작 정도로 생각한 것처럼, 한국은 장편보다 단편을 인정해주는 경향이 있으니까. 아니, 그치만 가치있게 쳐주는 순문학 작품에도 대하장편 소설이 제법 있는데? 어디에서 개재했느냐를 이유로 문학성을 평가받는다는 건 너무 편협하지 않나?

내가 읽은 어슐러 르 귄이라는 작가는, 어쩌면 평생을 이와 같은 편견에 맞서 싸운 사람이다. 편집자의 말대로 가장 창작을 활발하게 하던 시기의 말을 모은 <밤의 언어>에서도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르 귄의 말을 모은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서도 그는 줄곧 말한다. 사이파이(Si-Fi)와 판타지는 늘 진실을 알리고 있다. 리얼리즘 문학과 비교해서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리얼리즘 문학이 담지 못하는 진정한 삶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고.

르 귄의 이 진정성 넘치는 외침에 나는 그만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생겨나있던 편견과 울분을 깨닫고 말았다. 몰랐다. 내가 얼마나 판타지를 사랑하고 또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판타지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는 울분을 얼마나 많이 외쳤었는지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은 어느샌가 거기에 적응해버린 것이다. 어차피 진정한 문학이 아니라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렸었다. 내 마음에 닿는 길을 어느샌가 차단해버린 것이다.

나는 출판은 하지 않았어도 작가다. 그런 내게 영혼의 샘을 잃어버린 건 정말 치명적인 일이었다. 나는 인식하지 못한 채 매마르고 있었다. 그걸 나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챘다. 덕분에 근 몇 년 사이에 꽤 큰 혼란을 겪었고, 거기서 어느정도 벗어난 상태에서 르 귄의 목소리를 접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르 귄의 목소리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함께 내 영혼에 잠들어 있던 모든 기쁨을 되찾아 주었다. 그의 작품도 에세이도 소중하기만 하다. 비록 <밤의 언어>는 젊은 시절의 글이니만큼 미숙하고 잘못된 부분도 많지만,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와 달리 덜 정제된 날 것의 외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르 귄은 노년과 달리 훨씬 명료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인다.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이 말하고 썼기 때문에 노년이 되어서는 생략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젊으나 늙으나 상관없이 어슐러 르 귄은 정말 멋진 작가고, 나는 이제 어스시 전집을 읽으러 간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천천히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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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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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SF 단편집을 빌려주는 친구의 픽. 아무리 생각해도 반쯤은 표지 보고 고른 게 아닌가 싶지만.

르 귄은 너무 좋고 단편도 하나같이 좋은데 어떻게 14년에 나온 책이 아직도 오타가 이렇게 많을 수 있는지 놀랍다. 진짜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오타랑 띄어쓰기 오류(맞춤법상 헷갈릴 수 없는 종류의)가 많다. 초반에는 읽히질 않을 정도로 번역 상태도 별로였다. 덕분에 한참 집중 못하고 고생했다.

어슐러 르 귄이라는 이름과 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작품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상태였다가 지극히 최근에,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통해서 처음으로 르 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원스럽고 강렬한 목소리를 가진, 중심이 잘 잡힌 화자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소설과 에세이는 전혀 다른 것이라서 궁금하긴 하지만 강하게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었는데(그래도 어스시의 마법사는 샀다),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나니 어서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바람의 열두 방향>은 총 1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아주 오래된 책이다. 정보를 찾아보면 무려 1975년 발표했던 첫 단편집이라고 나온다. 그 긴 세월에도 빛이 바래지 않고 각각의 단편이 매우 진한 색과 향기를 뽐낸다. 어스시의 마법사의 시초격인 작품도 실려있기 때문에 어스시의 마법사가 장편이라 바로 손대기 부담스러운 사람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나도 그렇게 시작했으니까.

<샘레이의 목걸이>
도깨비 나라에서 실컷 먹고 놀고 즐기고 돌아왔더니 백 년쯤 흘러있었다는 옛 이야기가 생각나는 작품.
고귀한 핏줄을 가졌지만 점차 변화하는 세상 때문에 도태되어 하등하게 여기던 이들보다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것에 지치고 창피해하던 주인공이 부유한 삶을 되찾기 위해 조상이 가지고 있던 보물인 목걸이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돌아와보니 세월이 흘러 갓난이이던 딸은 장성해 제 동생처럼 자라있고, 남편은 죽었으며, 시누이는 늙어 눈물 지었다는 결말. 이 소재가 성간 여행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고 권선징악의 형식으로 쓰인 게 재밌었다.

<파리의 4월>
제목 그대로 파리의 4월이다. 단지 어느 시대 어느 해인지가 다를 뿐.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다양한 파리인들이 모여 함께 살게 된다는 이야기. 그들이 공유하는 건 오로지 외로움 뿐이다. 다소 이기적인 방식으로 불러모은 이들이긴 하지만, 뭐, 행복하면 되지 않나 싶다. 귀엽고 포근한 내용이었다. 강아지도 외로웠던 거겠지.

<명인들>
작가 서문에 의하면 르 귄 최초의 순수 SF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게 SF라는 사실에 의아했는데 따져보면 기초 수학도 과학이니 이상할 건 없다. 그저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라 놀랐을 뿐. 고대의 과학자들은 이런 느낌이었을까. 철저하게 통제된 지식과 편협한 사회에서 두려움에 떨며 진실을 추구하고, 끝내는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고보니 이 단편집에 이런 이야기가 둘이나 있네.

<어둠 상자>
작가 서문의 딸 에피소드가 로맨틱했다. 평소 좋아하는 의뭉스런 동화 같은 분위기가 좋았다.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형과 동생은 서로 죽거나 죽이지만 그 어떤 것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빛의 세계. 마녀의 아이가 주워온, 혹은 선사한 어둠이 세계를 미래로 이끈다.
개인적으로 무척 당혹스러운 단편이기도 했다. 내가 평소 쓰고 상상하는 스타일이랑 비슷한데 그동안 정말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피해왔던 거라서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에 당혹했다.

<해제의 주문>
작가 서문에 나무에 대한 강박이 있다고 하는데 이 작품과 나무가 무슨 상관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지금도 모르겠음. 다양한 나무와 풀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긴 해서 공부를 해볼까 고민하기는 했다.
나중에 어스시의 마법사의 일부가 된, 그 씨앗 같은 작품이라고 한다. 생물만이 아니라 안개와 반지로 변신하고, 대지에 스며드는 마법사가 나온다. 내가 아는 마법사는 이런 마법사인데 언젠가부터 마법사하면 게임처럼 특정한 스킬을 쓰는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그게 좀 슬펐다.
어스시의 마법사 읽고 싶다. 읽을 거 왜이렇게 많은지.

<이름의 법칙>
인삿말만으로 날씨가 바뀔 수 있는 섬이라기에 언어의 힘으로 뭔가 바뀌는 내용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이름(본모습)을 숨기고 살던 존재와 그를 잡으러 온 흑마법사가 나오는 이야기.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맹수로서의 용도 참 좋아한다.
이것도 어스시의 마법사의 세계와 이어진다는 거 같던데 역시 어스시의 마법사 읽고 싶다.

<겨울의 왕>
연출이 상당히 독특하고 재밌었던 단편. 시간의 파편, 순간순간의 사건을 사진으로 비유해서 그 한 장, 한 장을 묘사한다. 급하게 읽기도 했고 시간이 꼬여있는 데다 이름에 트릭이 섞여있는 바람에 한동안 내용 파악에 애를 먹었지만 재밌었다. 시작 부분에서 서술하듯 ‘기이한 왕위 계승 사건’을 서술한 이야기.

<멋진 여행>
형식이나 맺음은 참 좋았는데 이게 약물로 인한 환각 여행이 아니라면 대체 뭔지 모르겠다. 무슨 차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약을 안 해봐서 그런가? 약의 도움을 받았을 뿐 환각 속을 여행한 건 아니라고 한다. 그 얘긴 그냥 망상이라는 건가? 뭐, 어느 쪽이라도 좋기는 하다. 원래 이렇게 모호하게 쓰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아홉 생명>
유일하게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작품. 어느 문화권에나 자신과 동일한 존재가 있으면 보다 안정적이고 완벽한 평화 속에 머물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있는 걸까? 일본 만화에서 흔하게 보던 쌍둥이 로망과 거의 비슷한 클론 열 명이 나온다. 서로 다른 교육을 받았어도 완벽하게 같아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줄 모르는 쌍둥이들이 클론으로 나온단 소리다.
제일 좋았던 건 무대가 되는 리브라라는 별? 묘사. 클론이라는 소재를 구리게 다룬다 싶었는데 1968년에 나온 작품이라고 하니 대충 스타트렉 오리지널 시리즈 정도의 감성이라고 이해했다. 그렇게 보면 귀엽고 재밌어.

<물건들>
잡지 개재 당시 편집자가 제목을 <끝>이라고 붙였었다는데 르 귄 생각에는 <물건들>이 더 어울리는 거 같다고 한다. 편집자의 마음도 르 귄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제목이 끝이라고 하면 이미지 적으로 더 완결성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물건들이라고 하면 이 이야기가 무엇을 조명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모호하고 분명치 못한 결말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는데, 르 귄이라는 대가가 했는데 나는 하면 안 될 이유가 뭔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

<머리로의 여행>
‘진짜 이렇게 써도 돼?’ 하고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내도 돼? 이래도 괜찮은 거야? 하는 질문을 계속 하고 있었더니 빌려준 친구가 뿌듯해하더라.
물건들과 비슷하게 제목이 재밌었던 작품. 머리로의 여행인데 여행을 떠나면 자신을 잃는 이유가 뭘까? 내가 아니라 외부인으로서 ‘여행’을 온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무의식 속에서는 나(의식)조차 외부인이라서?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단편. 역시나 번역이 제대로 된 건지 의심스러운 구절이 있었다.
감정 이입 능력자인 오즈딘과 낯선 별로 떠난 탐험단의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가볍게 서술되는 인종 이야기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크게 중요한 설정은 아니다. 이것도 어떤 장편으로 나왔으면 의미가 있겠지만.
낯선 별에서 낯선 생명체가 나오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개체는 아니다. 어슐러 르 귄이 반복해서 언급한 나무에의 집착을 강하게 느낀 건 오히려 이 단편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돌려줄 수 있는 건 부정적인 감정 뿐이라는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어쩌면 감정이라는 건, 그런 건지도 모른다.

<땅속의 별들>
작가 서문에 써있었던 대로 과학이라는 것이 금기시된 세상에서 과학자가 살아남는 이야기다. 하늘에서 별을 찾던 천문학자가 땅속에서도 별을 찾는다.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도 동의한다. 어느 쪽이라도 괜찮았다. 다른 작품도 그랬지만 굉장히 몽환적인 작품.

<시야>
편집자에게 보내는 역정과 야유와 분노라고 서문에 써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화성 탐사를 떠난 우주선의 탐험 대원들이 우주의 진리를 알리는 사도가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 대체 이것과 편집자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여간 재밌긴 했는데 서문이 이해가 안 감ㅋㅋ

<길의 방향>
우리가 나무를 지나쳐가는 게 아니라 나무가 우리를 향해 커졌다 줄어드는 거라는 관점에서 서술된 작품이다. 상대성 원리라고 해서 이게 그런 내용이던가? 했는데 아직도 맞는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상대성 원리는 등속도로 움직이는 사물 안에서는 물리법칙이 정지된 상태랑 똑같다던가 하는 그 내용 아니었던가.
그리고 결론이 이해가 안 갔다. 화자를 눈에 담고 죽은 사람이 화자를 죽음으로 인식했기에 화자가 영원히 죽음의 역할을 수행해야한다는데, 아니, 설령 그래야한다고 해도 숨 멎었으면 끝난 거 아닌가. 왜 영원히야? 그렇게 치면 이 소설 속 나무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도 영원히 움직여야한단 거 아냐?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모 웹소설에 ‘무고한 아이 한 명의 비명으로 유지되는 세계’가 나온다. 딱 그런 세상의 이야기. 르 귄이 설명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이상향도 알겠고, 이 이야기가 그런 이상향을 부정하기 위해 나왔다는 것도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이야기의 논조에 공감할 수 없다. 왜 개혁하지 않고 그냥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게 왜 외부에 전달되는지도 모르겠다. 대체 화자는 뭐하는 놈이란 말인가.
이렇게 쓰는 것치고 작가에게 화가 나진 않아서 그건 좀 신기했다.

<혁명 전날>
바로 앞 단편에서 이어지는 세계의 이야기. 작가 말로는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의 이야기란다? 다른 소설 <빼앗긴 사람들>의 오래된 과거 이야기기도 하다는 모양이다. 무정부주의(현실에서의 폭력성은 거세된 환상의 무정부주의)인 오도주의의 시초가 되는 오도의 이야기다.
화자 라이아는 혁명을 시작했지만 혁명으로 실현된 세상에 스며들지 못하는 사람이다. 영웅으로 떠받들리지만 그런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또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여전히 뒤틀려 있기에 버려진, 아니, 버려져야 마땅한 그런 사람. 그렇기에 밑바닥의 인생에 공감하고, 동시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다. 라이아는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인 걸까?

전체적으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던 단편집. 정말로 어스시의 마법사를 비롯한 르 귄의 작품은 전부 읽어봐야할 것 같다. 빌려준 친구에게 감사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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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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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좋아하는 에세이라고 추천해줘서 읽었는데 진짜 재밌었다. 에세이 이렇게 재밌게 읽은 게 많지 않은데 흥미진진하고 재밌었음. 책 자체가 나름 기승전결을 엇비슷하게 갖추고 있어서 그런 것도 있고, 작가의 표현이 구성진 덕도 있고.

읽는 내내 저자의 축구 사랑이 느껴지는 게 좋았다. 남이 무언가를 열렬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도 보통 대상이 좋아지곤 하니까. (예외는 있다. 친구 애인. 내 친구 괴롭히지 므르르.) 축구가 좋아서 축구를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보니 축구가 더 좋아지는 굴레가 참 좋다. 축구로 인생을 읽는 축구인들의 시야도 좋았고, 축구라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저자의 도전기도 좋았다. 그 열정에 감화됐는지 달리기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책을 덮을 때쯤엔 축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몇 분도 채 가지 못했지만, 진심으로 그랬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에피소드는 저자 입단 1년 후 새로 들어온 단원 이야기. 학창시절에 가까이 있던 것들이 이제보면 너무 멀어서 당황스러워질 때가 있다. 학생 때 당연하게 느꼈던 것들이 그리워졌을 때, 그것을 쟁취할 장소나 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한 적이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디선가 누군가는 계속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학창시절과 달리 비용이 든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제법 설렜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들이 축구를 한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쭉 기다려왔던 것이란 걸 깨닫고 설레었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깊게 다가왔다. 나는 좀 더 가성비를 추구하긴 했지만서도.

이 책은 저자 김혼비가 단순히 축구를 사랑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자이자 축구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훈련기이기도 하며, 동시에 나라는 개인의 손이 닿는 범위에서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이끌며 살아가는 이야기기도 하다. 뭉클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뜨거워지는 부분도 있다. 언제고 사는 게 지겨워지는 순간에 다시 한 번 펼쳐보고 싶다.


덤.
소소하게 궁금한 건데 제목은 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인 걸까?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여자와 거리를 두도록 교육받는 운동인 축구를 함께 두다 보니 여성으로서의 삶과 축구인으로서의 삶이 겹쳐지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책인데 굳이 우아하다는 표현을 쓴 이유가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축구가 고아한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도 언급되어있는데다 내용상 특별히 우아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부분도 없는데. 호쾌하다는 형용사는 책 내용 어디다 붙여도 대체로 어울리니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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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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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표지 너무 예쁘다. 다 읽고 난 후의 심란함마저 근사하게 표현해주는 멋진 표지와 제목을 보라.

사실 이 책 감상문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자기만의 방을 읽고도 이랬는데 워낙 다양한 감상이 들어서 오히려 말을 고를 수가 없다. 표지와 제목 이야기를 했으니 거기서 시작해볼까.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Your house will pay.
표지의 성냥 이미지는 LA폭동을 상징하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제목을 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그거다. 연대책임. 네가 아니라 네 집이 고통받으리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아닌가. 그 집이, HOUSE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게 말 그대로 집, 건물인지 그 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둘 모두를 의미할 것 같다. 이 소설의 시발점에 존재하는 한정자와 에이바의 가족 모두가 집을 잃었고, 고통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네가 무엇을 하든 네 집 모두가 고통받게 될 거라는 끔찍한 예언으로 보이기도 한다. 경거망동하면 곧바로 실행될 게 분명한 그런 예언. 누군가에게 크게 밉보여서 그에게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느껴지는 제목이다.

요즈음 한국에는 페미니즘이 열풍이라고 해도 좋을만치 각광받고 있는 주제다. 내 짧은 인생에서 인권이라는 말이 요 몇 년처럼 흔하게 들리는 때는 없었다. 그게 내가 이제서야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즘 인권이 중요한 과제가 되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무지하고 게으른 내 귀에도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주로 여성 인권을 중심으로) 들려오고 있다. 거기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입장을 분명히 하는 노력을 안 해온 건 아니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들이 한 번 싹 지워졌다가 새롭게 새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건 두 주인공 중 흑인 축의 인물인 숀 매슈스의 조카가 실종되었을 때 경찰에 신고하길 꺼린 부분이다. 흑인이고 한창 나이인 청소년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경찰에 알리면 안 된다고 한다. 경찰의 눈에 그 애들은 예비 갱단 멤버일 뿐이니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같이 떠오른 건 제일 첫 챕터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어린 숀의 입장에서 제 사촌 레이(윗 문단에서 실종된 조카의 아버지)를 설명하며 레이가 갱단의 일원이라면 누구라도 갱일 수 있었다고 한 문장.
흑인은 누구나 갱일 수 있고, 갱은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흑인은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심지어 숀은 실종된 조카를 찾아 나서기 위해 아기를 안아야 했다. 그래야 그가 체포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숀과 그 사촌 레이는 징역을 살았던 적이 있다. 범죄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민주시민으로서 법을 준수해야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틀림없이 모든 흑인이 범죄자는 아닐 것이다.
허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더 좋은 길이 있고 더 좋은 선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당하게 가족을 잃고 항의할 기회조차 잃은 소년들이 어떻게 살았어야 했던 걸까. 경찰은 그들을 준범죄자 취급할 뿐이고, 최소한의 보호도 해주지 않는데. 붙들어줄 끈을 잃고 방황하는 부표가 엉뚱한 곳으로 떠내려갔다고 원망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한국에서 여성이 경찰에 구조 요청을 해도 무시당할 때가 태반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요 몇 년 사이 몇 번을 들었나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국 여자들은 경찰에 신고를 한다. 무용할 지언정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데 저들은 신고를 할 수가 없다. 지푸라기인 줄 알고 잡았던 것이 물귀신이 될까봐 그런다. 아니, 높은 확률로 물귀신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습하고 자란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피부 밑으로 파고드는 듯하다.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은 두순자 역할을 한 한정자씨의 딸 그레이스 박이다. 사건이 있은 후에 성까지 바꿔서 날 때부터 박씨는 그레이스 뿐이란다. (성을 바꿀 수 있는 게 신기하다.) 엄마에게 있었던 일은 전혀 모르는, 사건 당시 뱃속에 있었던 아기 그레이스다.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놀랐다. 미국 내의 한인 사회가 이런 것이라면, 현재의 한국과 다른 게 없다. 어른들은 고지식하고 구시대적이고, 딸들은 그런 어른들의 통제 속에서 순종적으로, 때로는 반항적으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어른들은 제 자식이 아무것도 모르길 바라고, 동시에 모든 것을 알기 바란다. 지금 내 삶과의 차이점이라고는 지나치게 적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한인 사회 뿐이다. 그곳은 마치 우리네 시골의 이야기라고 알려진 것처럼 옆집 밥숟가락 갯수까지 아는, 그런 작은 사회다.
너무도 흡사한 환경에 나는 그레이스의 이야기의 홀린 듯 빨려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레이스의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짜증을 내고 어이없어했다. 물론 한정자의 사정은 독자라는 입장상 훨씬 빠르게, 그리고 전혀 놀랍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그레이스와 호흡을 같이 했다고 생각한다.
순진하고 착한 처녀 그레이스는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게다가 엄마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그만 다른 사람을 원망했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에이바의 가족들마저도 그레이스를 비난하지는 못 했는데.
한정자가 에이바를 쏴죽인 대가로 총에 맞아 정신을 잃은 사이, 그 충격을 견뎌야했던 건 그레이스 혼자였다. 가족들은 모두 과거의 사건을 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가족이 아닌 다른 한인 커뮤니티 사람들마저도. 그레이스는 철저하게 혼자였고, 그런 그레이스가 에이바의 가족에게서 구원을 구하려고 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그레이스와 마찬가지로 총격으로 세상이 휘청거리는 경험을 한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읽으면서는 그레이스의 행동을 조금도 납득할 수 없었고 화가 났다. 에이바의 기록에서 흠을 잡으려고 하고 어떻게든 엄마가 정당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려는 모습이 너무도 이기적이었으니까. 이런 태도는 그레이스만이 아니라 작중 등장하는 한인 커뮤니티 전체가 동일하다. 어떤 행동을 했느냐와는 무관하게 그저 내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싸준 것 말이다. 한국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런 내 마음마저도 다스리고 가라앉혀야한다고 말한다. 한정자 사건이 있었던 시점에 한인들은 삶을 지탱하는 것이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갱단이 두려움의 원천이기도 했을 뿐더러 그들은 이민자였다. 굴러온 돌이었다. 박혀있던 돌을 뽑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힌 돌이 그들을 배척한 건 분명하다. 이 지점에서 켄 리우의 단편 소설, All the flavors도 참 많이 떠올랐다. (한국 제목은 <모든 맛을 한 그릇에>고 역시나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 실려있다.) 그것을 겹쳐보니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에서는 언뜻언뜻 반감이 비치는 정도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만만한 저항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레이스의 부모가 자신이 일궈낸 작은 가게에 그토록 자부심이 넘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게다가 소설에 의하면 한정자 사건(두순자 사건)이 그토록 크게 다뤄진 것은 로드니 킴 사건 때문이라고 말한다. 백인 경찰들이 흑인을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주목을 모으자 그 대안으로 끌어온 것이 한정자 사건이라고.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확인해보니 날짜가 정말로 얼마 차이가 안 나기는 했다. 예전에 학교에서였던가. LA 폭동에 대해 배울 때도 그동안 지속된 차별 때문에 쌓인 불만이 한인 커뮤니티를 향해 터진 거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언제든 기회를 잡아 쫓아내고 싶은 대상이었을 거라는 느낌은 든다.

소설은 한정자 사건의 가해자인 한정자의 딸 그레이스 박과 피해자인 에이바의 동생 숀 매슈스의 시점을 오가며 전개되는데, 숀은 결코 한정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 딸인 그레이스의 순진함에도 분노하지만 끝끝내 그들에게 공격성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반대로 한정자의 딸인 그레이스와 미리엄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쏜 대릴이라는 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서로 미움과 증오를 가슴에 묻은 상태로 그들이 등을 맞대는 모습이 이 소설의 엔딩이고, 나는 작가가 그저 미래를 고민하는 것으로 끝을 내준 것이 고맙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게 그렇게 안심이 될 수 없었다. 실제로 어떤 말과 행동도 그들이 품은 아픔과 원망을 해결할 수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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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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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책만큼 읽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은 책도 없는 것 같다. 보통은 이런저런 말을 듣기 전에 읽거나 듣고 난 후에 다 잊어버리고서 읽게 되니까. 한데 이 책만큼은 잊을만하면 뭔가 들려오고, 또 잊을만하면 뭔가 들려오더라. 어슐러 르 귄의 에세이를 읽는 중에 또 언급이 되길래 결국 도서관에 들르는 김에 빌려왔다. 도서관에서는 에세이를 빌려읽기로 마음 먹었는데 마침 에세이길래. 이것저것 주워들었을 땐 소설인 줄 알았지 뭐야.
워낙 판본이 많고 도서관에도 몇 가지 판본이 있어서 고민했는데 번역을 찾아보기는 귀찮길래 적당히 가볍고 작은 책을 골랐다. 손에 쏙 들어오는 가볍고 작은 책이라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매일 정해진 페이지를 읽도록 습관을 들여놨는데 같은 분량을 읽는 동안 걸린 시간이 꽤 길었다.
추천사는 좀 곤욕스러웠다. 굳이 읽을 필요가 있었나 싶긴 한데, 버지니아 울프의 가족력을 알게 된 건 좋았다. 정신질환으로 내내 고생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라고 들어서 상상 이상으로 유복한 환경에 놀랐다. 그럼에도 열악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영국의 여성이라는 지위에 놀랐고, 다 읽고 감상문을 쓰는 지금에 와서는 에세이 후반에 언급되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분노가 무엇인지 아주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어서 그날그날 아슬아슬하게 빈곤한 식사를 하고, 주거지는 불안한 삶에서 유산을 받아 일정한 수입과 안정된 주거지를 가진 삶으로 옮겨갔을 때 버지니아 울프가 안도했다는 건 에세이를 읽다보면 알게 된다. 소박한 삶이지만 생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안정감. 그래서였을까. 강연은 육체의 욕망과 재산 이야기로 시작된다.
육체적인 한계를 크게 인식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굉장히 낯선 접근법임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울프는 멋진 솜씨로 독자인 나를 자신의 이야기로 끌어당긴다.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보다 와닿는 문학적인 방식으로.
저절로 시가 떠오를 정도로 만족스러운 식사와 볼품없는 식사의 비교에서 시작해, 여성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역사를 짚고, 그 속에서 여성이 가지고 태어난 시적인 재능이 어떻게 시들어왔는지를 말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대에 이르러 조금씩 확장되어온 여성의 삶과 그와 함께 발전해온 여성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그 어떤 문학작품도 홀로 온전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 그리고 그 역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 육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얼마간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말이 자주 인용되길래 그 두 가지가 에세이 속에서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학을 위해 필요한 것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누군가가 개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한다. 그런 것이 없다고 해서 억울해하고 억울함에 사로잡혀 이지를 잃는 것은 자신의 시를 망치는 길이라고. 남성이 말하는 문학의 틀에 여성의 육체를 끼워맞추는 게 아니라 책이 육체에 적응해야하노라고.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과거 여성의 삶에 비하면 어느정도의 여유를 확보하게 된 현재(버지니아 울프의 현재)의 여성에게는 시적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이 근거가 바로 자기가 가지게 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러니 무언가 다른 것이 되려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언어로 담아내자고. 남성과 대등한 존재가 되거나 그들을 뛰어넘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여성이 쌓아온 역사와 문화에 있는 그대로 집중해보자고.
본문에는 훨씬 더 많은 메세지가 담겨있지만, 그것을 모두 감상문에 옮겨쓸 재주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메세지에서 요즘 한국의 여성들이 보이는 행동을 읽어낼 수 있어서 그게 좀 싱숭생숭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이 답이겠지.
다 읽고 나서 근래 가장 보람찬 독서라고 적어놓았지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어떻게 글줄로 옮겨야 좋을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서 덤벙거리며 써보았다. 감상문을 쓰며 적어놓았던 메모를 읽으니 다시 읽는 중에 느꼈던 벅참이 떠오른다. 방에 꽂아두고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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