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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ㅣ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평점 :
오늘도 SF 단편집을 빌려주는 친구의 픽. 아무리 생각해도 반쯤은 표지 보고 고른 게 아닌가 싶지만.
르 귄은 너무 좋고 단편도 하나같이 좋은데 어떻게 14년에 나온 책이 아직도 오타가 이렇게 많을 수 있는지 놀랍다. 진짜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오타랑 띄어쓰기 오류(맞춤법상 헷갈릴 수 없는 종류의)가 많다. 초반에는 읽히질 않을 정도로 번역 상태도 별로였다. 덕분에 한참 집중 못하고 고생했다.
어슐러 르 귄이라는 이름과 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작품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상태였다가 지극히 최근에,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통해서 처음으로 르 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원스럽고 강렬한 목소리를 가진, 중심이 잘 잡힌 화자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소설과 에세이는 전혀 다른 것이라서 궁금하긴 하지만 강하게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었는데(그래도 어스시의 마법사는 샀다),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나니 어서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바람의 열두 방향>은 총 1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아주 오래된 책이다. 정보를 찾아보면 무려 1975년 발표했던 첫 단편집이라고 나온다. 그 긴 세월에도 빛이 바래지 않고 각각의 단편이 매우 진한 색과 향기를 뽐낸다. 어스시의 마법사의 시초격인 작품도 실려있기 때문에 어스시의 마법사가 장편이라 바로 손대기 부담스러운 사람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나도 그렇게 시작했으니까.
<샘레이의 목걸이>
도깨비 나라에서 실컷 먹고 놀고 즐기고 돌아왔더니 백 년쯤 흘러있었다는 옛 이야기가 생각나는 작품.
고귀한 핏줄을 가졌지만 점차 변화하는 세상 때문에 도태되어 하등하게 여기던 이들보다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것에 지치고 창피해하던 주인공이 부유한 삶을 되찾기 위해 조상이 가지고 있던 보물인 목걸이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돌아와보니 세월이 흘러 갓난이이던 딸은 장성해 제 동생처럼 자라있고, 남편은 죽었으며, 시누이는 늙어 눈물 지었다는 결말. 이 소재가 성간 여행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고 권선징악의 형식으로 쓰인 게 재밌었다.
<파리의 4월>
제목 그대로 파리의 4월이다. 단지 어느 시대 어느 해인지가 다를 뿐.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다양한 파리인들이 모여 함께 살게 된다는 이야기. 그들이 공유하는 건 오로지 외로움 뿐이다. 다소 이기적인 방식으로 불러모은 이들이긴 하지만, 뭐, 행복하면 되지 않나 싶다. 귀엽고 포근한 내용이었다. 강아지도 외로웠던 거겠지.
<명인들>
작가 서문에 의하면 르 귄 최초의 순수 SF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게 SF라는 사실에 의아했는데 따져보면 기초 수학도 과학이니 이상할 건 없다. 그저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라 놀랐을 뿐. 고대의 과학자들은 이런 느낌이었을까. 철저하게 통제된 지식과 편협한 사회에서 두려움에 떨며 진실을 추구하고, 끝내는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고보니 이 단편집에 이런 이야기가 둘이나 있네.
<어둠 상자>
작가 서문의 딸 에피소드가 로맨틱했다. 평소 좋아하는 의뭉스런 동화 같은 분위기가 좋았다.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형과 동생은 서로 죽거나 죽이지만 그 어떤 것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빛의 세계. 마녀의 아이가 주워온, 혹은 선사한 어둠이 세계를 미래로 이끈다.
개인적으로 무척 당혹스러운 단편이기도 했다. 내가 평소 쓰고 상상하는 스타일이랑 비슷한데 그동안 정말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피해왔던 거라서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에 당혹했다.
<해제의 주문>
작가 서문에 나무에 대한 강박이 있다고 하는데 이 작품과 나무가 무슨 상관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지금도 모르겠음. 다양한 나무와 풀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긴 해서 공부를 해볼까 고민하기는 했다.
나중에 어스시의 마법사의 일부가 된, 그 씨앗 같은 작품이라고 한다. 생물만이 아니라 안개와 반지로 변신하고, 대지에 스며드는 마법사가 나온다. 내가 아는 마법사는 이런 마법사인데 언젠가부터 마법사하면 게임처럼 특정한 스킬을 쓰는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그게 좀 슬펐다.
어스시의 마법사 읽고 싶다. 읽을 거 왜이렇게 많은지.
<이름의 법칙>
인삿말만으로 날씨가 바뀔 수 있는 섬이라기에 언어의 힘으로 뭔가 바뀌는 내용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이름(본모습)을 숨기고 살던 존재와 그를 잡으러 온 흑마법사가 나오는 이야기.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맹수로서의 용도 참 좋아한다.
이것도 어스시의 마법사의 세계와 이어진다는 거 같던데 역시 어스시의 마법사 읽고 싶다.
<겨울의 왕>
연출이 상당히 독특하고 재밌었던 단편. 시간의 파편, 순간순간의 사건을 사진으로 비유해서 그 한 장, 한 장을 묘사한다. 급하게 읽기도 했고 시간이 꼬여있는 데다 이름에 트릭이 섞여있는 바람에 한동안 내용 파악에 애를 먹었지만 재밌었다. 시작 부분에서 서술하듯 ‘기이한 왕위 계승 사건’을 서술한 이야기.
<멋진 여행>
형식이나 맺음은 참 좋았는데 이게 약물로 인한 환각 여행이 아니라면 대체 뭔지 모르겠다. 무슨 차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약을 안 해봐서 그런가? 약의 도움을 받았을 뿐 환각 속을 여행한 건 아니라고 한다. 그 얘긴 그냥 망상이라는 건가? 뭐, 어느 쪽이라도 좋기는 하다. 원래 이렇게 모호하게 쓰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아홉 생명>
유일하게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작품. 어느 문화권에나 자신과 동일한 존재가 있으면 보다 안정적이고 완벽한 평화 속에 머물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있는 걸까? 일본 만화에서 흔하게 보던 쌍둥이 로망과 거의 비슷한 클론 열 명이 나온다. 서로 다른 교육을 받았어도 완벽하게 같아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줄 모르는 쌍둥이들이 클론으로 나온단 소리다.
제일 좋았던 건 무대가 되는 리브라라는 별? 묘사. 클론이라는 소재를 구리게 다룬다 싶었는데 1968년에 나온 작품이라고 하니 대충 스타트렉 오리지널 시리즈 정도의 감성이라고 이해했다. 그렇게 보면 귀엽고 재밌어.
<물건들>
잡지 개재 당시 편집자가 제목을 <끝>이라고 붙였었다는데 르 귄 생각에는 <물건들>이 더 어울리는 거 같다고 한다. 편집자의 마음도 르 귄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제목이 끝이라고 하면 이미지 적으로 더 완결성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물건들이라고 하면 이 이야기가 무엇을 조명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모호하고 분명치 못한 결말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는데, 르 귄이라는 대가가 했는데 나는 하면 안 될 이유가 뭔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
<머리로의 여행>
‘진짜 이렇게 써도 돼?’ 하고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내도 돼? 이래도 괜찮은 거야? 하는 질문을 계속 하고 있었더니 빌려준 친구가 뿌듯해하더라.
물건들과 비슷하게 제목이 재밌었던 작품. 머리로의 여행인데 여행을 떠나면 자신을 잃는 이유가 뭘까? 내가 아니라 외부인으로서 ‘여행’을 온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무의식 속에서는 나(의식)조차 외부인이라서?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단편. 역시나 번역이 제대로 된 건지 의심스러운 구절이 있었다.
감정 이입 능력자인 오즈딘과 낯선 별로 떠난 탐험단의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가볍게 서술되는 인종 이야기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크게 중요한 설정은 아니다. 이것도 어떤 장편으로 나왔으면 의미가 있겠지만.
낯선 별에서 낯선 생명체가 나오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개체는 아니다. 어슐러 르 귄이 반복해서 언급한 나무에의 집착을 강하게 느낀 건 오히려 이 단편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돌려줄 수 있는 건 부정적인 감정 뿐이라는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어쩌면 감정이라는 건, 그런 건지도 모른다.
<땅속의 별들>
작가 서문에 써있었던 대로 과학이라는 것이 금기시된 세상에서 과학자가 살아남는 이야기다. 하늘에서 별을 찾던 천문학자가 땅속에서도 별을 찾는다.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도 동의한다. 어느 쪽이라도 괜찮았다. 다른 작품도 그랬지만 굉장히 몽환적인 작품.
<시야>
편집자에게 보내는 역정과 야유와 분노라고 서문에 써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화성 탐사를 떠난 우주선의 탐험 대원들이 우주의 진리를 알리는 사도가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 대체 이것과 편집자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여간 재밌긴 했는데 서문이 이해가 안 감ㅋㅋ
<길의 방향>
우리가 나무를 지나쳐가는 게 아니라 나무가 우리를 향해 커졌다 줄어드는 거라는 관점에서 서술된 작품이다. 상대성 원리라고 해서 이게 그런 내용이던가? 했는데 아직도 맞는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상대성 원리는 등속도로 움직이는 사물 안에서는 물리법칙이 정지된 상태랑 똑같다던가 하는 그 내용 아니었던가.
그리고 결론이 이해가 안 갔다. 화자를 눈에 담고 죽은 사람이 화자를 죽음으로 인식했기에 화자가 영원히 죽음의 역할을 수행해야한다는데, 아니, 설령 그래야한다고 해도 숨 멎었으면 끝난 거 아닌가. 왜 영원히야? 그렇게 치면 이 소설 속 나무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도 영원히 움직여야한단 거 아냐?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모 웹소설에 ‘무고한 아이 한 명의 비명으로 유지되는 세계’가 나온다. 딱 그런 세상의 이야기. 르 귄이 설명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이상향도 알겠고, 이 이야기가 그런 이상향을 부정하기 위해 나왔다는 것도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이야기의 논조에 공감할 수 없다. 왜 개혁하지 않고 그냥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게 왜 외부에 전달되는지도 모르겠다. 대체 화자는 뭐하는 놈이란 말인가.
이렇게 쓰는 것치고 작가에게 화가 나진 않아서 그건 좀 신기했다.
<혁명 전날>
바로 앞 단편에서 이어지는 세계의 이야기. 작가 말로는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의 이야기란다? 다른 소설 <빼앗긴 사람들>의 오래된 과거 이야기기도 하다는 모양이다. 무정부주의(현실에서의 폭력성은 거세된 환상의 무정부주의)인 오도주의의 시초가 되는 오도의 이야기다.
화자 라이아는 혁명을 시작했지만 혁명으로 실현된 세상에 스며들지 못하는 사람이다. 영웅으로 떠받들리지만 그런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또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여전히 뒤틀려 있기에 버려진, 아니, 버려져야 마땅한 그런 사람. 그렇기에 밑바닥의 인생에 공감하고, 동시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다. 라이아는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인 걸까?
전체적으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던 단편집. 정말로 어스시의 마법사를 비롯한 르 귄의 작품은 전부 읽어봐야할 것 같다. 빌려준 친구에게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