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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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책만큼 읽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은 책도 없는 것 같다. 보통은 이런저런 말을 듣기 전에 읽거나 듣고 난 후에 다 잊어버리고서 읽게 되니까. 한데 이 책만큼은 잊을만하면 뭔가 들려오고, 또 잊을만하면 뭔가 들려오더라. 어슐러 르 귄의 에세이를 읽는 중에 또 언급이 되길래 결국 도서관에 들르는 김에 빌려왔다. 도서관에서는 에세이를 빌려읽기로 마음 먹었는데 마침 에세이길래. 이것저것 주워들었을 땐 소설인 줄 알았지 뭐야.
워낙 판본이 많고 도서관에도 몇 가지 판본이 있어서 고민했는데 번역을 찾아보기는 귀찮길래 적당히 가볍고 작은 책을 골랐다. 손에 쏙 들어오는 가볍고 작은 책이라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매일 정해진 페이지를 읽도록 습관을 들여놨는데 같은 분량을 읽는 동안 걸린 시간이 꽤 길었다.
추천사는 좀 곤욕스러웠다. 굳이 읽을 필요가 있었나 싶긴 한데, 버지니아 울프의 가족력을 알게 된 건 좋았다. 정신질환으로 내내 고생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라고 들어서 상상 이상으로 유복한 환경에 놀랐다. 그럼에도 열악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영국의 여성이라는 지위에 놀랐고, 다 읽고 감상문을 쓰는 지금에 와서는 에세이 후반에 언급되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분노가 무엇인지 아주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어서 그날그날 아슬아슬하게 빈곤한 식사를 하고, 주거지는 불안한 삶에서 유산을 받아 일정한 수입과 안정된 주거지를 가진 삶으로 옮겨갔을 때 버지니아 울프가 안도했다는 건 에세이를 읽다보면 알게 된다. 소박한 삶이지만 생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안정감. 그래서였을까. 강연은 육체의 욕망과 재산 이야기로 시작된다.
육체적인 한계를 크게 인식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굉장히 낯선 접근법임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울프는 멋진 솜씨로 독자인 나를 자신의 이야기로 끌어당긴다.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보다 와닿는 문학적인 방식으로.
저절로 시가 떠오를 정도로 만족스러운 식사와 볼품없는 식사의 비교에서 시작해, 여성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역사를 짚고, 그 속에서 여성이 가지고 태어난 시적인 재능이 어떻게 시들어왔는지를 말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대에 이르러 조금씩 확장되어온 여성의 삶과 그와 함께 발전해온 여성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그 어떤 문학작품도 홀로 온전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 그리고 그 역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 육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얼마간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말이 자주 인용되길래 그 두 가지가 에세이 속에서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학을 위해 필요한 것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누군가가 개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한다. 그런 것이 없다고 해서 억울해하고 억울함에 사로잡혀 이지를 잃는 것은 자신의 시를 망치는 길이라고. 남성이 말하는 문학의 틀에 여성의 육체를 끼워맞추는 게 아니라 책이 육체에 적응해야하노라고.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과거 여성의 삶에 비하면 어느정도의 여유를 확보하게 된 현재(버지니아 울프의 현재)의 여성에게는 시적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이 근거가 바로 자기가 가지게 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러니 무언가 다른 것이 되려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언어로 담아내자고. 남성과 대등한 존재가 되거나 그들을 뛰어넘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여성이 쌓아온 역사와 문화에 있는 그대로 집중해보자고.
본문에는 훨씬 더 많은 메세지가 담겨있지만, 그것을 모두 감상문에 옮겨쓸 재주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메세지에서 요즘 한국의 여성들이 보이는 행동을 읽어낼 수 있어서 그게 좀 싱숭생숭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이 답이겠지.
다 읽고 나서 근래 가장 보람찬 독서라고 적어놓았지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어떻게 글줄로 옮겨야 좋을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서 덤벙거리며 써보았다. 감상문을 쓰며 적어놓았던 메모를 읽으니 다시 읽는 중에 느꼈던 벅참이 떠오른다. 방에 꽂아두고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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