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바람의 열두 방향>(감상문📃)과 함께 친구에게 빌린 책. <바람의 열두 방향> 먼저 읽고 이걸 읽었는데 개인적인 이유로 싱숭생숭했다.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절반 이상 읽은 상태로 이걸 읽으니 어슐러 르 귄이라는 사람의 변화가 보이는 듯해서 그것도 재밌었다.

에세이 류는 구성이나 작가에 따라 읽는 속도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편인데 르 귄의 에세이는 자잘하게 쪼개져있는 탓인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바람의 열두 방향>보다 이걸 더 오래 읽은 것 같다. 책은 훨씬 가볍고 작은데! 하지만 르 귄의 힘 있는 목소리와 명료한 주장은 매순간 나를 사로잡는다. 마음 속의 스승이자 멘토로 삼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실 감상문을 쓰는 걸 쭉 미뤘다. 뭐라고 써야 좋을지 잘 모르겠더라. 하고 싶은 말이 많다면 너무 많고 없다면 너무 없다. 어슐러 르 귄이라는 작가는 근사한 SF 소설가이자 판타지 소설가이고 나는 그가 가진 장르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존경한다.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는데 이제는 르 귄의 이름을 적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판타지를 비롯해 온갖 장르 소설을 사랑한다. 하지만 다들 알지 않나. SF는 이제서야 겨우 한국 장르 독자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판타지는 내가 자라는 내내 유치한 삼류 장난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배우고 들어왔다. 내가 배운 교과서에 장르 소설은 단 한 작품도 실려있지 않았다.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가 교과서에 실렸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가 배운 교과서는 아니었고 그나마도 그것 한 작품 정도였다. 이영도 작가의 소설은 워낙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특혜를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같은 결론만 나온다. 이영도 작가만을 특별취급하기에는 내가 아는 좋은 장르 소설이 너무 많고, 그걸 학교에서 다루지 않는 걸 이해할 수 없다.

요즘은 순문학 시장에서도 장르가 꽤나 인정을 받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웹소설이라고 불리는 대중 시장을 무시하는 경향은 여전하다. 어째서 장르가 주목을 받는데 웹소설은 문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굳이 이유를 찾으면 너무 장편이라서 그렇지 않나 싶기는 하다. 어슐러 르 귄이 사는 미국이 단편을 장편을 쓰기 위한 연습작 정도로 생각한 것처럼, 한국은 장편보다 단편을 인정해주는 경향이 있으니까. 아니, 그치만 가치있게 쳐주는 순문학 작품에도 대하장편 소설이 제법 있는데? 어디에서 개재했느냐를 이유로 문학성을 평가받는다는 건 너무 편협하지 않나?

내가 읽은 어슐러 르 귄이라는 작가는, 어쩌면 평생을 이와 같은 편견에 맞서 싸운 사람이다. 편집자의 말대로 가장 창작을 활발하게 하던 시기의 말을 모은 <밤의 언어>에서도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르 귄의 말을 모은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서도 그는 줄곧 말한다. 사이파이(Si-Fi)와 판타지는 늘 진실을 알리고 있다. 리얼리즘 문학과 비교해서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리얼리즘 문학이 담지 못하는 진정한 삶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고.

르 귄의 이 진정성 넘치는 외침에 나는 그만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생겨나있던 편견과 울분을 깨닫고 말았다. 몰랐다. 내가 얼마나 판타지를 사랑하고 또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판타지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는 울분을 얼마나 많이 외쳤었는지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은 어느샌가 거기에 적응해버린 것이다. 어차피 진정한 문학이 아니라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렸었다. 내 마음에 닿는 길을 어느샌가 차단해버린 것이다.

나는 출판은 하지 않았어도 작가다. 그런 내게 영혼의 샘을 잃어버린 건 정말 치명적인 일이었다. 나는 인식하지 못한 채 매마르고 있었다. 그걸 나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챘다. 덕분에 근 몇 년 사이에 꽤 큰 혼란을 겪었고, 거기서 어느정도 벗어난 상태에서 르 귄의 목소리를 접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르 귄의 목소리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함께 내 영혼에 잠들어 있던 모든 기쁨을 되찾아 주었다. 그의 작품도 에세이도 소중하기만 하다. 비록 <밤의 언어>는 젊은 시절의 글이니만큼 미숙하고 잘못된 부분도 많지만,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와 달리 덜 정제된 날 것의 외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르 귄은 노년과 달리 훨씬 명료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인다.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이 말하고 썼기 때문에 노년이 되어서는 생략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젊으나 늙으나 상관없이 어슐러 르 귄은 정말 멋진 작가고, 나는 이제 어스시 전집을 읽으러 간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천천히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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