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선의 해부 - 영상화 기획 소설
이린 / 잇스토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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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불사의 외계인인데 경계선 사이코패스라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며, 선이란 무엇인지 고찰해볼 수있는 내용이라고 기대되어 서평단에 신청하였었다.
절대 선과 악이 등장하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이게 진짜 선 혹은 악일까?' 한번씩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장면들이 많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미쳤다거나, 너무나 무료해서 맛이 간걸까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선과 악을 진심으로 헤매이고 있기 때문에 수현이 경계를 오가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는 곧 광기로 정상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현에게 있어 선함이란, 광기이다(126)." 현실의 인간들은 경계를 오가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여 그에게 사이코패스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선과 악은 나눌 수있는 존재인가? (인간들은 항상 선한 의도였는지 악한 의도였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선과 악에 대해, 사이코패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도,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매우 길고, 난해한데 늘어지는 느낌이 많았다. 영상화가 된다면 엄청나게 많이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들 중 어떤 것을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삼을 것인지, 그러면서도 개별 에피소드에는 각각의 다른 문제의식을 던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같다.
솔직히 이북으로는 읽기 쉽지 않은 방대한 소설이었으나, 영상화는 오히려 기대된다. 오락가락하는? 사이코패스를 연기하는 배우의 연기력과 캐릭터 분석이 기대된다.
한편으로는 모오든! 능력과 배경, 서사를 다 가져가버린 '수현'때문일까 다른 캐릭터들의 매력을 잘 느낄 수없었고, 다른 캐릭터들이 수현을 어떻게 생각 및 이해하는지 잘 공감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 또한 영상화 하는 과정에서 다른 캐릭터들의 비중과 함께 수현에게만 너무 주인공의 역할을 몰아가지 않길 바란다.

#선의해부 #잇스토리 #이린 #이작가 #소설추천 #영상화기획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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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면체를 그리지 못하는 아이들 - 방치된 아이들을 위한 인지 지능 트레이닝 안내서
미야구치 고지 지음, 일본콘텐츠전문번역팀 옮김 / 이담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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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면체를 그리지 못하는 아이들

학교 교육과 정육면체를 그리지 못하는 아이들

 

1.     학교 교육

학교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일정한 목적ㆍ교과 과정ㆍ설비ㆍ제도 및 법규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학생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을 말한다. 쉽게 말해 교육을 위한 공간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학교는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걸까? 근대 이래 학교 제도가 세계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학교를 필수적으로 다닌다. 의무교육 기간이 늘어나면서 점점 더 그러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알지 못하는 걸까? 내가 왜 이 과목을 배워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학교는 배움을 위한, 배움에 의한 공간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이유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질문을 하여도 질타뿐이었다. ‘다 나중에 써’,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공부나 해등 나는 잘 써먹고 싶어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고, 어쩌면 아무도 어디에 써먹는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사들은 학교가 어떤 곳인지 매우 잘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의문이 든다. 학교의 핵심은 교사만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 모두 중심이 되는 곳인데, 왜 학생은 학교의 의의를 알지 못한 채 학교에 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학교에서 한다는 교육이란 뭘까? 교육이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준다는 의미이다. 지식과 기술을 학교에서 가르치기는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애매하며, 그것 만으로 먹고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생각해보아라,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창업을 할 수 있을까? 어떠한 분야이든 말이다. 심지어 AI 시대가 도래하며 단순히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한 시대는 지나버렸다.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담고 있는 AI를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앞으로의 핵심이다. 하지만 학교 교육과정은 근대에 머물러있다. 1980년대 이래로 컴퓨터가 등장하며, 2000년대에는 컴퓨터 과목이 추가되는 등, 추가와 개정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근대에 정립된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학교 교육과 정육면체를 그리지 못하는 아이들

정육면체를 그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근대에 정립된 교육과정에 의해, 다시 말해 모든 학생이 일관된 교육을 받는 체계에서 배제된 아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많은 부분에서 공평과 공정을 헷갈리고,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학교 교육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는 공평하게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기회를 줬다고 해서 공평했다고 합리화시키면 안 된다. 교육의 방식과 같은 사항은 개인의 성향과 배경, 재능 등을 고려하여 내용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한편 저자가 지적했던 것처럼 학교는 바라는 소양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각자의 학교 경험은 매우 상이하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글과 숫자, 심지어 알파벳을 떼지 못한 것은 부모님과 면담해야 할 정도의 사안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음악 시간에 악보 보는 방법을 모르는 것 등 굉장히 사소해 보이는 많은 부분을 학교에서는 당연히 알고 있을 것으로 여기고 넘어간다. 학교는 대체 무엇을 가르치는 곳일까? 한국의 공교육은 학교 교육에 필요한 소양들을 가정의 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가하고 있다. 각자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교육을 위한 환경이 누구에게나 잘 갖춰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사교육이 계층 간 격차를 심화시킨다며 비판하는 공교육의 입장이 모순으로 느껴진다.

저자는 일본의 사례를 이야기 하고 있으나, 책을 읽으며 입시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적 없던 한국 사회는 어떤 지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저자는 인지 지능이 부족한 아이들의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들에게만 학교 제도가 버거운 것은 아닐 것 같다. 나는 6학년 때 전개도가 처음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소위 느린 아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자가 해체되어 전개도로 펼쳐지고, 이를 다시 접는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것에 애를 먹었다. 미술을 여전히 못하고 싫어하는 나는 전개도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입체 도형을 그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를 따라잡기 위해 어머니가 손수 종이를 오려서 내가 따라할 때까지 보여주고, 함께 접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나의 정육면체를 완성시키기 위해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이 학교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리의 학교는 왜 모두가 정육면체를 완성시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곳이 되어버렸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교육자, 학부모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학생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꼭 한번 읽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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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무 낯선 나 - 정신건강의학이 포착하지 못한 복잡한 인간성에 대하여
레이첼 아비브 지음, 김유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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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무 낯선 나

나를 찾아서

1.     통제와 자아

레이첼과 소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드라마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책과 드라마에 나오는 거식증이라고 명명된 모든 소녀들은 자신의 통제력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외부의 개입으로 달라지는 많은 요소들 중, 먹는 것과 체중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듯했다. 하바는 심지어 거식증을 자신의 핵심적인 정체성으로 여기는 듯했다. “꼬리표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꼬리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타이틀을 준다. 그리고 정체성도!(40).” 이들은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 것일까?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알 수 없는 수많은 영향이 삶을 흔들리게 만든다. 이러한 삶 속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 스스로를 통제하려는 것은 나를 찾으려는 시도로 봐야할까?

2.     깨져버린 사람들

정신의 오지정상이 상호침투적이라는 저자의 설명에 공감하며, 더 나아가 정상과 현대사회에서 정신질환으로 해석되는 이른바 비정상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채 살아갈 뿐이다. 드러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듯, 어떤 사람들은 정신질환으로 판정 받은 후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온다(적어도 의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진다). 하지만 반대편에는 결코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정신질환의 원인이 한 가지가 아닌 엄청나게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차이 또한 매우 복합적이다. ‘정신의 오지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곧 정신질환으로 일컬어진다. 이렇게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어쩌면 그릇이 깨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 깨진 그릇을 다시 이어 붙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래의 재질, 깨진 정도, 접착제의 종류, 붙인 사람, 붙이는 방식 등에 따라 어떤 그릇은 다시 내용물이 새지 않거나, 거의 새지 않거나, 모양은 그럴싸하지만 이전처럼 그릇의 기능은 거의 못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회복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것은 명확하게 밝혀 내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영역이다.

3.     정신분석학 vs 신경생리학

저자는 레이의 이야기에서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신경생리학에게 패배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로라의 이야기를 통해 신경생리학의 약물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하며, 어쩌면 휘태커의 주장처럼 약물은 모든 질환을 만성질환으로 바꿔버리는 걸지도 모른다는 정반대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정신질환이 내 신체의 화학적 반응의 결함에서 오는 것인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의 부적응 및 트라우마에서 오는 것인지, 이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인지는 아직까지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모두 가설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약을 처방받고, 상담을 진행한다. 저자는 나오미의 이야기에서는 정신질환을 법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던지고 있다. 원인도 해결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정신질환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정신질환을 거의 개인적인 아픔으로서만, 신체 안에 갇혀있는 아픔 혹은 개인과 그 주변 사람 간의 관계만 가지고 분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커지는 것은 아닐까? 어째서 의사들은 사회문화적인 배경(영향)은 고려하지 않을까? “정신과 전문의들은 자기 환자들을 잘 모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진료하지 않기 때문이에요(288).”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가 아닌 단지 을 치료하는 것일까?   

4.     나를 찾아서

하바의 사례에서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본 모습이 병의 발현 이전이 아니라, 병이 표출되던 시기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걸까? 나를 찾으려면 꼭 이렇게 거칠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런데 한편으로 나의 자아는 한 가지인가? 이럴 때도 나고, 저럴 때도 나 아닌가? 자아는 고정적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편으로 나는 꼭 찾아야하는 존재인지 의문이 든다. 나는 어떤 나이든 항상 나이고, 늘 나로서 머무르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나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지만, 나 자신에게조차 완벽한 타인이다(328).” 하바는 자신을 과연 이해했던 것일까? 나는 절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도 완벽히 알아챌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신이라면 모를까현대 사회 이전에는 정신질환(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류학자들의 지적이 굉장히 중요한 지점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상이라는 허상을 두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비정상으로 고쳐지거나 없어져야 할 것 쯤으로 여긴다. 모든 사회는 언제나 다 정상을 추구해왔던 것인지, 이는 인간의 본능일지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다름을 져버리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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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시대예보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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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두려움

 

1.  그래서 핵개인이 뭔가요..?

"이 책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개인을 '핵개인'이라 정의합니다(20)." 하지만 저자는 핵개인이 어떤 의미인지 정의내려주지 않았다. 대중서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있나 싶었다. 심지어 저자는 '언어가 바뀌면 개념, 관점이 달라진다(55).'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저자가 핵개인을 핵가족에, 가족주의에 반대하는 의미로서 택한 용어인지, 핵가족에서 더 쪼개졌다는 의미인지, '새로운 개인이 핵개인이다'라고 했을 때, 과거의 개인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예를 들어 전체의 일부에 불과했던 개인과 다르다는 의미?) 등 왜 '핵개인'이라는 용어를 택하게 되었는지가 문제의식의 시작점이자 핵심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를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이 없어서 의문만 잔뜩 남게 되었다

 

2. 상상된 공동체 vs 망상된 개인

베네딕트 앤더슨이 설명한 대로 공동체는, 하나라는 민족은 상상된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과연 조선의 사람들이 자신을 조선 사람이라고 여겼을까? 그것은 얼마나 우선시 되는 정체성이었을까? 더 과거로 돌아간다면, 고려와 발해 사람들은 서로를 하나의 민족이라고 여겼을까? 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는 어땠을까? (심지어 말은 통했을까? 이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전체주의 사상에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게 여기는 관념의 반작용으로 나오게 된 개인주의는 '이기적이다'와 동일어 정도로 몰이해 되어온 경향도 있다근대에 강력한 민족주의, 전체주의 등 공동체를 중요시하고, 상대적으로 개인의 욕구는 억누르는 관념이 강하게 작동되었다. 이에 전복이 일어나며 서서히 개인에게 집중하는 시기가 오고 있다. 그런데 개인주의가 커져간다는 것이 관계를 단절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人間), 사이 간자를 쓰는 인간은 관계가 지금까지의 생존의 핵심이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더라도 인간들은 관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온전한 개인'은 망상된 것이다. (직전의 팬데믹 사태에서 한국은 개인주의와 가장 거리가 멀지 않았나? 개인의 욕망이 우선시되었더라면 상황이 어땠을까?) 저자가 말한 새로운(?) 개인을 통해, '개인' 그리고 '개인주의'가 어떤 의미였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편 '로봇은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102).' 로봇, AI의 출현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관계가 사라진 인간은 새로운 종의 탄생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3. 한국의 가족주의와 개인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가족주의, 정상가족, 비혼, 가족 내의 돌봄문제 등) 가족과 개인에 대한 논의들이 연상되었다. 여전히 한국의 제도는 과거의 가족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위독한 상황에서의 보호자, 유산 상속, 동거인의 인정 문제 등)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바쁜 생활 속에서  함께 살고 있는 가족끼리도 밥을 모두 모여 같이 먹는 일이 쉽지 않다. 일가친척이 명절에 모이는 일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었다거나, 연대가 느슨해진 것만은 아니다. 사례마다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며, 비혼이 늘어나며 출생가족과의 연대가 훨씬 강해지고 있다는 연구들도 있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개인이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더 작은 단위로 보아야 할 것인지, 가족이라는 단위보다 개인이라는 단위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인지 등은 개인을 논하는 데에 빠지지 않는 논의거리이다. 따라서 핵개인(?)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말하는 가족 그리고 가족주의란 무엇인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두려움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기술의 발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인간이 지구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은 늘 시간이 흘러가는 것과 같이 살아왔다. 기실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디서 부터 새 시대가 시작되었는지 변화를 잡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계속 살아왔고, 그러다 무언갈 만들기도 했고, 대단해 보이는 발명 혹은 발견을 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서로 편을 가르기도, 연대하기도 했다. 인류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제멋대로) 살아갈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라투르의 '우린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 없다'라는 해석이 떠올랐다. (라투르가 이런 의도에서 썼던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준은 말그대로 인위적이다새 시대가 도래했다고 구분짓는 것 또한 과연 의미가 있을까? 변화를 적극적으로 논의하되, 변화에 방점을 두지 않고, 남아있는 것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두려움도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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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기 일보 직전 문학동네청소년 ex 소설 1
달리 외 지음, 송수연 엮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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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기 일보 직전

당신은 정상 인간 입니까?


누군가에게 당신은 정상 인간 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럼요.’ ‘, 나름요?’ 라는 떨떠름함과 함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보거나, ‘아니 당연한 걸 왜 물어! 내가 비정상으로 보여?!’ 라며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정상, 표준은 무엇일까요? 누가 어떤 이유로 그리고 왜 이러한 기준을 만든 걸까요? 우리는 이 기준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이 책은 단편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어 재미있고 쉽게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던져진 물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최영희 작가의 『지퍼 내려갔어』 에서는 취업 사기(?)를 당한 소녀가 순혈 인간이라는 관념 및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고, 이를 헤쳐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순혈 인간에게 돌아가야할 마땅한 것을 비인간들이 다 빼았아갔다라는 생각, 여기서 비인간들이 다 빼앗았다는 망상, 나머지 인간들은 순혈이라는 망상을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이러한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사실 저는 이 부분에서 나치의 비뚤어지고 매우 급진적이었던 민족주의가 떠올랐습니다.

다음으로 박애진 작가의 『알 카이 로한』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와 자신도 특별한 것인지 기대감을 품기 시작한 소녀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작가님은 피가 희석된다는 것을 콜라에 얼음을 타면 싱거워지는 것에 비유합니다. 신박한 비유였습니다만, 이는 알카이로한이든, 인간이든 둘 중 하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싱거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알카이로한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지녔던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세상에 무언가 적응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고, 사회 생활에서 겉도는 것 같고, 그런 내가 바로 특별한 존재라는 상상은 사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거쳐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는 긍정과는 거리가 먼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을 때가 많습니다. ‘나만이 특별한 존재라는 상상은 다른 존재들을 무시하는 이유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건강한 관계를 구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특별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특별한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듀나 작가의 『자코메티』는 두 소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소녀는 다른 소녀의 내면까지 궁금해합니다. 이는 호감일까요 아니면 호기심일까요? 혹시 이런 게 바로 사랑은 아닐까요? 외계인이 점령한 도시는 괴생명체가 새로이 등장하면서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사람들은 괴생명체를 인간처럼 지적인 생명체로, 인간의 신체구조를 기반으로 그들도 같은 위치에 같은 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화를 입습니다. 이렇듯 현대인들에게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는 뼛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 소녀는 멀리 모험을 떠나려는 듯합니다. 한 소녀가 어렵게 모아둔 자신의 몫을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소녀에게 권하는 장면에서, 저는 역시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라고 조심스레 상상해봅니다.

달리 작가의 『기억의 기적』은 기억과 진실, 각각의 입장,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남들의 시선에 보여지는 나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는 왜곡된 것일까요? 아니면 제3자의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각으로 기억을 남겨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진실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나의 기억은 거짓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주관적으로 현실을 기록하며, 진실의 관점에서 그것은 왜곡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 이유에 있을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경험, 기억이 쌓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 기억은 진실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거나 무() 또한 아닙니다. 기억은 모두 소중합니다.

내 정체성, 가치관, 삶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고체인 얼음이 녹아 액체인 물이 되는 것처럼 고통을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존재로 뒤바뀌게 되는 걸지도 모릅니다. 뒤집어 보면 그러기 위해 고통이 수반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일 때에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과 같은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쉬어 가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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