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리기 일보 직전 문학동네청소년 ex 소설 1
달리 외 지음, 송수연 엮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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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기 일보 직전

당신은 정상 인간 입니까?


누군가에게 당신은 정상 인간 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럼요.’ ‘, 나름요?’ 라는 떨떠름함과 함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보거나, ‘아니 당연한 걸 왜 물어! 내가 비정상으로 보여?!’ 라며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정상, 표준은 무엇일까요? 누가 어떤 이유로 그리고 왜 이러한 기준을 만든 걸까요? 우리는 이 기준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이 책은 단편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어 재미있고 쉽게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던져진 물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최영희 작가의 『지퍼 내려갔어』 에서는 취업 사기(?)를 당한 소녀가 순혈 인간이라는 관념 및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고, 이를 헤쳐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순혈 인간에게 돌아가야할 마땅한 것을 비인간들이 다 빼았아갔다라는 생각, 여기서 비인간들이 다 빼앗았다는 망상, 나머지 인간들은 순혈이라는 망상을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이러한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사실 저는 이 부분에서 나치의 비뚤어지고 매우 급진적이었던 민족주의가 떠올랐습니다.

다음으로 박애진 작가의 『알 카이 로한』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와 자신도 특별한 것인지 기대감을 품기 시작한 소녀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작가님은 피가 희석된다는 것을 콜라에 얼음을 타면 싱거워지는 것에 비유합니다. 신박한 비유였습니다만, 이는 알카이로한이든, 인간이든 둘 중 하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싱거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알카이로한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지녔던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세상에 무언가 적응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고, 사회 생활에서 겉도는 것 같고, 그런 내가 바로 특별한 존재라는 상상은 사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거쳐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는 긍정과는 거리가 먼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을 때가 많습니다. ‘나만이 특별한 존재라는 상상은 다른 존재들을 무시하는 이유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건강한 관계를 구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특별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특별한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듀나 작가의 『자코메티』는 두 소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소녀는 다른 소녀의 내면까지 궁금해합니다. 이는 호감일까요 아니면 호기심일까요? 혹시 이런 게 바로 사랑은 아닐까요? 외계인이 점령한 도시는 괴생명체가 새로이 등장하면서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사람들은 괴생명체를 인간처럼 지적인 생명체로, 인간의 신체구조를 기반으로 그들도 같은 위치에 같은 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화를 입습니다. 이렇듯 현대인들에게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는 뼛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 소녀는 멀리 모험을 떠나려는 듯합니다. 한 소녀가 어렵게 모아둔 자신의 몫을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소녀에게 권하는 장면에서, 저는 역시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라고 조심스레 상상해봅니다.

달리 작가의 『기억의 기적』은 기억과 진실, 각각의 입장,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남들의 시선에 보여지는 나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는 왜곡된 것일까요? 아니면 제3자의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각으로 기억을 남겨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진실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나의 기억은 거짓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주관적으로 현실을 기록하며, 진실의 관점에서 그것은 왜곡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 이유에 있을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경험, 기억이 쌓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 기억은 진실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거나 무() 또한 아닙니다. 기억은 모두 소중합니다.

내 정체성, 가치관, 삶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고체인 얼음이 녹아 액체인 물이 되는 것처럼 고통을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존재로 뒤바뀌게 되는 걸지도 모릅니다. 뒤집어 보면 그러기 위해 고통이 수반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일 때에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과 같은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쉬어 가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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