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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무 낯선 나 - 정신건강의학이 포착하지 못한 복잡한 인간성에 대하여
레이첼 아비브 지음, 김유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7월
평점 :
『내게 너무 낯선 나』
나를 찾아서
1.
통제와 자아
레이첼과 소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드라마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책과 드라마에 나오는 거식증이라고
명명된 모든 소녀들은 자신의 통제력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외부의 개입으로 달라지는 많은
요소들 중, 먹는 것과 체중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듯했다. 하바는 심지어 거식증을 자신의 핵심적인 정체성으로 여기는 듯했다. “꼬리표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꼬리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타이틀을 준다. 그리고 정체성도!(40).” 이들은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
것일까?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알 수 없는 수많은 영향이
삶을 흔들리게 만든다. 이러한 삶 속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 스스로를 통제하려는 것은 나를 찾으려는 시도로 봐야할까?
2.
깨져버린 사람들
‘정신의 오지’와
‘정상’이 상호침투적이라는 저자의 설명에 공감하며, 더 나아가 정상과 현대사회에서 정신질환으로 해석되는 이른바 비정상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채 살아갈 뿐이다. 드러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듯, 어떤 사람들은 정신질환으로 판정 받은 후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온다(적어도
의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진다). 하지만 반대편에는 결코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정신질환의 원인이 한 가지가 아닌
엄청나게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차이 또한 매우 복합적이다. ‘정신의 오지’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곧 정신질환으로
일컬어진다. 이렇게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어쩌면 그릇이 깨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 깨진 그릇을 다시 이어 붙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래의
재질, 깨진 정도, 접착제의 종류, 붙인 사람, 붙이는 방식 등에 따라 어떤 그릇은 다시 내용물이 새지
않거나, 거의 새지 않거나, 모양은 그럴싸하지만 이전처럼
그릇의 기능은 거의 못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회복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것은 명확하게 밝혀 내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영역이다.
3.
정신분석학 vs 신경생리학
저자는 레이의 이야기에서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신경생리학에게 패배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로라의 이야기를 통해 신경생리학의 약물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하며, 어쩌면 휘태커의 주장처럼 약물은 모든 질환을 만성질환으로 바꿔버리는 걸지도 모른다는 정반대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정신질환이 내 신체의 화학적 반응의 결함에서 오는 것인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의 부적응 및 트라우마에서 오는 것인지, 이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인지는
아직까지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모두 가설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약을 처방받고, 상담을 진행한다. 저자는 나오미의 이야기에서는 정신질환을 법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던지고 있다. 원인도 해결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정신질환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정신질환을 거의 개인적인 아픔으로서만,
신체 안에 갇혀있는 아픔 혹은 개인과 그 주변 사람 간의 관계만 가지고 분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커지는 것은 아닐까? 어째서 의사들은 사회문화적인 배경(영향)은 고려하지 않을까? “정신과 전문의들은 자기 환자들을 잘 모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진료하지 않기 때문이에요(288).”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가 아닌 단지 ‘병’을 치료하는 것일까?
4.
나를 찾아서
하바의 사례에서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본 모습이 병의 발현 이전이 아니라, 병이 표출되던 시기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걸까? 나를 찾으려면 꼭 이렇게 거칠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런데
한편으로 나의 자아는 한 가지인가? 이럴 때도 나고, 저럴
때도 나 아닌가? 자아는 고정적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편으로 나는 꼭 ‘찾아야’하는 존재인지 의문이 든다. 나는 어떤 나이든 항상 나이고, 늘 나로서 머무르고 있지 않을까? “나는 나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지만, 나 자신에게조차 완벽한 타인이다(328).” 하바는 자신을 과연 이해했던 것일까? 나는 절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도 완벽히 알아챌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신이라면 모를까… 현대 사회 이전에는 정신질환(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류학자들의 지적이 굉장히 중요한 지점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상이라는 허상을 두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비정상으로 고쳐지거나 없어져야 할 것 쯤으로 여긴다. 모든 사회는 언제나 다 정상을 추구해왔던
것인지, 이는 인간의 본능일지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다름을
져버리게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