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척학전집 : 훔친 철학 편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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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잘 보면 ‘세계철학전집’이 아니라 ‘세계 척학 전집’이다. 심지어 부제는 ‘훔친 철학’이다. 이 책이 어떤 스타일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제목만 봐도 대략적인 느낌은 바로 온다. 보통 비전공자들이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대개 삶과 인생에 대한 답을 찾고,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꽤 거창한 이유에서다. 사는 건 팍팍하고, 인간관계는 피곤하고, 일상에 무의미함과 공허함을 느끼는 청춘들은 이 버거운 삶을 지탱해 줄 무언가를 철학에서 찾으려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철학자의 말이나 철학 사상을 인용하며 아는 척, 잘난 척을 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요는 순수한 학문적 탐구라기보다는, 어디엔가 써먹기 위해 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다는 것이다. 고민에 대한 답을 찾거나,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조언을 얻거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학문은 만만치 않다. 그 자체로 어렵기도 하고,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다루는 주제와 사상의 양은 지나치게 방대하다. 어설프게 접근해서는 내 삶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게 느껴지기 쉽다. 그래서 기껏 관심을 가지고 책을 펼치고도 금방 싫증을 느껴 책을 덮기가 일쑤였다.


어차피 초보 수준에서 알아야 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그리 깊이 있는 것일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의 역사나 사조, 학파나 계보 따위의 이론은 과감하게 빼버리고, 사람들이 한 번쯤 궁금해했을 법한 질문과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철학을 학문으로 정리하기보다는, 일상 속에서 한 번쯤 꺼내 생각해볼 수 있는 생각거리로 다루려는 것이다. 책은 총 세 파트로 나뉘는데, 각 파트에서는 진리와 인식, 윤리와 정의, 자유와 실존을 다룬다. 당장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목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주제를 먼저 읽어도 되지만, 책의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한다. 뒤의 파트는 이전 파트에서 다룬 철학적 문제의 토대 위에서 생각을 조금씩 확장해 나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앞의 내용을 이해한 뒤에 다음 파트를 읽으면 사고가 단계적으로 넓어진다. 각각의 파트는 그 파트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전제로 구성된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군인가?”가 그것이다. 각 장에서 다루는 철학자들의 사상과 개념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이 질문들에 대한 각기 다른 답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다. 진리를 의심하는 법에서 출발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고민하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질문을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생각이 수렴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저자의 추천처럼 순서대로 단계별로 읽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읽어버렸다. 그 탓에 이전의 철학적 사고와의 인과관계나 연계성을 충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단절된 철학적 사고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았다. 이 책이 특히 재미있는 이유는, 실생활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거나 고민해봤을 만한 상황을 함께 던져놓고 그에 대해 철학으로 풀어가기 때문이다. 추상적이고 지리한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내 일상을 철학으로 해석하고 주석을 달아주는 방식에 가깝다. 보통 철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거나 다소 교조적으로 다가오기 쉬운데, 이 책은 일상 속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어떤 형태로든 생각의 실마리나 나름의 답을 얻게 만드는 생활밀착형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이 삶에 실제로 쓰일 수 있다는 효용감을 느끼게 해준다.


철학 개념을 보다 보면, 하나의 문제를 두고 서로 다른 사상이나 관점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이미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을 어떤 철학자의 사상으로 뒷받침해 보기도 하고, 반대로 내 생각과 상충하는 다른 철학자의 이론을 통해 스스로의 입장을 다시 다듬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집단적 행동이 필요하지 않은가, 역사적 진보를 위해서라면 때로는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카뮈는 “어떤 목적도 무고한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부조리다”라고 반박한다. 개인적으로는 기본적으로 카뮈의 주장에 더 공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르트르의 말에도 일견 타당한 지점이 있다고 느낀다. 이렇게 어느 쪽에도 쉽게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은 역사 역시 아직 어느 쪽이 옳았는지를 단정하지 못했고, 어쩌면 두 주장 모두 부분적으로 옳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모든 문제에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이런 애매한 회색지대 역시 하나의 답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점이 오히려 인상 깊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말한다. 전장에서 혼자 미친 듯이 적진을 향해 뛰어가는 병사가 있다. 그는 용감해 보이지만 결국 가다 죽는다. 반대로 두려움에 뒤에 남아 숨어 있던 병사는 아군의 패배와 함께 죽음을 맞는다. 이 둘 중 누가 용감한가라는 물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둘 다 용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통은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사람을 용감하다고 여기겠지만,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에 가깝고, 뒤에 숨어 있던 병사는 분명 비겁하다. 진짜 용기란 무모와 비겁 사이 어디메에 있다. 상황을 판단하고, 필요할 때는 위험을 감수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그렇지 않을 때는 물러설 줄 아는 균형점.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 지점을 덕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마도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래서 안철수식 극중주의는 중용과는 거리가 멀다. 극단을 피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중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열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제자리에 머문다면 그것은 진보라고 부르기 어렵다. 모두가 각자 다른 속도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게 진보에 더 가깝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내디딜 수 있는 한 걸음을 찾아야 한다. 평소 막연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아리스토텔레스식 사고로 포장해 보니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게 바로 책이 지향하는 척학이 아닐까 싶다.


마치 맥주 이름을 연상시키는 하이데거는 ‘세인’과 ‘공공연함’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자신의 선택이 정말로 내가 원해서라기보다, 사회적으로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라는 기준에 따라 이루어질 때, 그 순간의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라 익명의 ‘사람들’이 된다는 주장이다. 공공연함은 이런 선택과 태도가 평균화되고,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굳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이 개념이 묘하게 그럴듯하고 꽤 설득력이 있어서 눈길이 갔다. 특히 유행에 민감하고 냄비처럼 쉽게 끓어오르는 성향이 있다고들 말하는 한국 사회를 떠올리면, 세인이라는 개념은 더 크게 와닿는다. 스스로는 일반화나 획일화, 동일화, 평준화, 균일화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튀지 않게, 괜히 눈에 띄지 않게, 중간만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 있기 쉽다. 세인이 되는 편이 위험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특별한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는, 특별한 행동으로 감수해야 할 위험을 피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나지 않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로 관계를 맺는 편이 미움받지 않고, 말 그대로 평균은 가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된다. 이런 모습들을 그냥 일상의 태도라고 말하는 것보다, 하이데거의 세인이나 공공연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보면 훨씬 또렷해진다. 확실히 있어 보이기도 하고, 말 그대로 척학하기에도 딱 좋은 개념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이 정도는 옆에 앉은 친구도 해줄 수 있는 조언일지 모른다. 그런데 책은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인은 요즘 커뮤니티 용어로 치면 NPC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세인으로 있을 때는 배경에 녹아든 NPC처럼 의미 없는 행동을 해도, 모두가 똑같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 그것이 딱히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 있는 밤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잠 못 드는 밤은 있고, 그런 밤에는 모든 것이 문득 의미를 잃는다. 존재의 의미, 행동의 의미, 관계의 의미가 하나씩 흐릿해지고, 그 자리를 공허함이 채우면 불안이 찾아온다. 하이데거는 이 불안을 어떤 대상 때문이 아니라 ‘무’에서 비롯된 감정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하이데거가 이 불안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물에 가깝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불안 속에서는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라는 세인의 위로, 다시 말해 자기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반복되던 일상성은 멈추고, 대신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이 나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밤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 끝에 불안해질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애써 고개를 돌리고 현실을 보지 않으려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그 불안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피하려 했던 불안 자체가, 가장 정직한 신호였던 셈이다. 안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활용해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철학이 이런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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