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운 세상 속 부서진 나를 위한 책 - 우울한 나를 돌보는 법 INFJ 데비 텅 카툰 에세이
데비 텅 지음, 최세희 옮김 / 윌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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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소통, 힐링과 치유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책들이 수없이 많다. 사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세상이 어렵고 복잡하게 돌아갈수록 마음둘 곳이 없는 외롭고 우울한 사람들은 많아지고, 그런 슬픈 영혼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준다는 명분으로 온갖 책들이 나오고 있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책을 읽어도 그다지 공감하지도 못하고 힐링이 되지도 않았다. 보통 그런 책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근거없는 막연한 희망을 이야기하거나 온갖 미사여구로 젠체하는 명대사를 남발하거나 때로는 나도 당신네들처럼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노오력을 해서 그런 시간들을 이겨내고 지금은 당신 같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성공스토리를 팔아먹으며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그다지 공감되지도 않고, 그 속에서 어떠한 희망이나 위로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좀더 심하게 말하면 우울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서 돈벌이에만 열을 올리는 것처럼 보여서 구역질이 나는 책도 있었다. 이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버거운 세상 속 부서진 나를 위한 책]은 그런 미사여구나 멋져보이는 명대사도 없고, 실패를 딛고 우울함을 떨쳐낸 사람의 인간극장도 없다. 여기서는 우울함을 안고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상당히 섬세하고도 자세히 그려내고 있는데 그런 한장한장의 글과 그림이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어디 가서 말못할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듯해서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말못할 답답함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털어버리는 듯한 기분도 들게 된다. 불안과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이야기로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이런 감정속에 빠져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해주어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생각에 외롭지 않게 해준다. 고독감에서 해방만 되면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책의 놀라운 점은 나의 감정과 기분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내용에 작가가 마치 나의 내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평소 감정적으로 매일 느끼는 기분이나 머리 속을 떠도는 복잡한 감정들이지만 센서티브한 감정이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책에는 그런 감정과 느낌을 텍스트로 정리하여 언어화했다는 것부터 상당히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내 기분이 어떤지 내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의외로 상당히 어려운데 그저 우울하다거나 외롭다는 식의 단편적인 단어와 표현이 아닌 그 상황과 느낌을 솔직하고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만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에 상당히 많은 공감이 된다. 그래서 작가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면서 "맞아, 내 기분이 딱 이래",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었어"라고 격하게 감정이입하게 된다.


어떤 문장은 평소 내가 항상 읊조리는 말이기도 하고, 언제나 머리 속으로 생각하던 내용이 나오니 소름이 돋는다. 이렇게 말하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라고 말을 하겠지만 여기 나오는 몇몇의 내용들, 즉 내가 평소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그런 내밀한 생각들, 우울함의 감정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의외로 이런 류의 책을 봤어도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고민, 나의 감정과 내가 느끼는 불안과 우울함이 정확히 싱크로되어 대사를 치고 있으니 공감이나 감정이입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울해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여자는 자신이 병원에 갈만큼의 우울증인지 확신이 없다고 하자 남자는 그런 상태가 오래 되었으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거라고 말한다. 여자는 자신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그런 거니 앞으로는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란 말을 듣게 될까봐 걱정이 되서 병원에 가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이런 식의 디테일한 상황과 감정 표현은 어떤 책에서도 본적이 없다.


누군가가 우울증에 대해 "공부"하고, 그런 사람들을 "연구"하고, 주위를 "관찰"하여 얻은 데이터가 아니라 작가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담아놓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디테일하고 내밀한 속마음을 이렇게까지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책에 지금껏 없었던 깊은 공감을 하는 것은 결국 저자의 성향과 나의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우울함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나 받아들이는 상황이 다 다를텐데 어쩌다보니 저자의 그것은 나의 감정과 정확히 싱크로되면서 심금을 울리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INFJ인 독자들은 격하게 공감을 하지만 다른 성격의 독자들은 이렇게까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뜻. 혼자서 고민하던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는데 혼자 고민하고 그 고민으로 우울함이 깊어진다. 나만 이상한 것이 아닐까 나만 잘못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많았는데 이 책을 보니 나같은 또라이, 나같은 환자가 세상 어딘가에 또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거기서 안도하게 된다. 그게 공감이고 위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책 역시 무작정 힘들다 죽겠다 아프다고 징징거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앞으로는 좋아질거란 말도 한다. 또 판에 박힌 위로의 말도 나온다. 다른 책에서 봤다면 구역질이 났을 법한 젠체하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이건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경험이고, 나의 이야기라서 그런 구역질나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까지도 위로가 된다. 그동안 내가 우울해하고 힘들어할 때마다 해줬어야 했던 나 자신에게 해주는 격려와 위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밝고 긍정적인 멘트로 가득찬 에세이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지만 우울하다고 힘들다고 죽겠다고 징징거리는 이 이야기에서 중간중간 툭 던지는 그래도 힘내자는 그 작은 메세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그래픽노블, 즉 카툰형식인데 한페이지나 한장에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형식과 컷수도 다양하다.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감정들을 드러내는 멘트, 대사도 훌륭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림도 상당히 훌륭하다. 그림체는 깔끔하고 귀엽고, 인물의 표정을 상당히 잘 묘사해서 감정이 섬세한 부분까지 잘 표현되어 졌다. 그리고 인물이 겪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상황이나 행동으로 적절하게 풀어서 시각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 점도 좋다. 그래서 책이 상당히 술술 잘 읽힌다. 그래픽 노블이라 글자가 많지 않고 이미지가 주가 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쉽게 수용되는 이유도 있지만 캐릭터의 현 심리 상태를 표정은 물론 동작과 행동으로도 적절하게 묘사해서 더욱 그 심리상태가 잘 이해되는 이유도 있다. 이런 류의 책을 읽으며 "공감이 된다"는 감정을 거의 처음으로 느꼈다고 할만큼 책의 내용이 상당히 공감이 되고 그를 통해 위로의 마음도 생기게 되었다. 물론 모두가 나처럼 깊게 공감과 위로를 얻지는 못하겠지만 누군가는 마치 자신이 과거에 쓴 일기장을 읽는 것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결국 공감의 효용이란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거기서 이해와 따뜻한 어루만짐을 얻는 것이라면 이 책에는 그런 이해와 따뜻한 어루만짐이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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