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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1 ㅣ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평점 :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첫작품인 '개미' 때부터 좋아하던 작가이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개미'의 시선으로 쓰여진 이야기는 기존의 정형화된 형식과는 스타일이 많이 달라서 신선하고, 독창적었으며, 기발하고 참신했다. 당시 이 소설이 한국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개인적으로도 좋아해서 여러번 완독을 했었다. 뒤이어 나온 타나토노트는 영계여행이라는 역시나 범상치 않은 내용의 작품이었는데 베르베르 소설의 영원한 화두인 삶과 죽음 그리고 환생이라는 주제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작품인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 신으로 이어지는 3부작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 3부작에서 베르베르는 사후 세계와 환생, 신에 대한 이야기를 동양적인 관점과 서양의 시각을 믹스해서 탈종교적인 세계관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베르베르 소설은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에, 동양적인 철학과 고대의 종교와 신화 등도 차용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었다. 이 점이 베르베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 작품들에서는 이런 자신만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해서 언제나 신화적인 세계를 그려냈다. 베르베르의 소설을 따라가 보면 거의 모두가 신화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개미'에서는 인간이 개미들의 신화처럼 등장하고, '타나토노트'는 천국과 윤회라는 신화의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이며 '천사들의 제국'과 '신'은 그야말로 신과 천사들의 이야기다. 또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인류의 기원을 찾아가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이야기이다. 이렇게 베르베르의 관심은 언제나 먼 과거나 먼 미래의 신화적 세상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랬던 것이 문명과 행성으로 이어지는 고양이 시리즈에 와서는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세계로 관점이 바뀌었다. 이번 행성은 베르베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과 테러, 감염병 때문에 인구가 8분의 1로 줄어들고 황폐해진 가까운 미래의 지구와 인류의 이야기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온전하게 지금 현재의 인류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행성 속의 인류는 신화를 쫓거나 신화처럼 다루어지지 않고, 근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전지구적 위험을 상상하고 있어서 확실히 베르베르의 작품 세계관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인간들이 벌인 실수로 인해 지구가 황폐해지자 번식력이 가장 좋은 설치류, 쥐가 지구를 뒤덮게 되고, 인간은 쥐를 피해 뉴욕의 고층 빌딩에 숨어 살고 있다. 인간은 고층 빌딩에서만 살며 줄을 타고 빌딩 사이를 이동할 뿐 땅에 발을 딛지 못한다. 지구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던 인간의 몰락. 몰락의 상징으로 고층 빌딩이 사용된 것이 재미있다. 흔히 높은 건물은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상징하지만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서는 인류의 탐욕의 몰락을 의미하는 바벨탑으로 그려지고, '행성'에서는 그에 더해서 마치 인간의 감옥과 같은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높은 빌딩은 먹이 피라미드의 역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수는 많지만 가장 낮은 피식자였던 쥐가 상위 단계의 포식자이자 천적인 고양이를 공격하고, 수가 적어진 인간까지 지상에서 몰아내었다. 보통 먹이사슬은 힘이 약하지만 개체수는 많은 피식자와 개체수는 적지만 힘이 강한 포식자의 피라미드 형태를 보이지만 행성에서는 역피라미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인간들은 드론이라던지 핵무기라던지 심지어 로봇 고양이까지 지금의 현대적 기술문명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쥐들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런 기술적 우위에도 인간이 쥐들에게 밀리는 것은 단순히 개체수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로 단합하지 못하기 때문일수도 있다.
전작 '문명'에서는 프랑스가 배경이었는데 거기서는 인간에게 적대적인 티무르 대왕이라는 리더가 쥐떼를 이끌며 고양이 바스테트와 인간을 공격했었다. 문명의 마지막에서 고양이 바스테트는 쥐들이 없는 신세계를 찾아 마지막 희망이라는 배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지만 뉴욕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알 카포네가 이끄는 쥐들이 공격해온다. 바스테트의 마지막 희망은 꺾였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프랑스와 뉴욕에는 각각 티무르와 알 카포네라는 강한 리더가 있고 단 하나의 리더의 명령에 따라 쥐들은 일사불란하게 고양이와 인간을 공격하고 지상을 자신들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도무지 단합이 되지 않는다. 인간들이 숨어들어간 뉴욕의 고층 건물은 프리덤 타워라고 부르는데 그 곳에는 102개의 인간 집단을 대표하는 총회가 존재한다. 102명이나 되는 서로 생각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충돌하다보니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핵폭탄을 쓸거냐 말거냐 하는 것으로 서로 싸우기 바쁘다. 인간들끼리 대책회의만 하고 결론이 안나다보니 정작 인간이 가진 기술력을 활용하여 쥐떼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리더가 무리를 이끌고 지휘하는 쥐들이 집단과는 정반대의 모습. 말하자면 그동안 우리가 가장 인간적이고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스템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스템에 철저히 격파당하는 모양새이다. 고양이 바스테트는 이런 인간들을 데리고 쥐떼에 맞서 지구를 구하고,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