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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이어령 유고시집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2년 3월
평점 :

한 달 전, 시대의 지성이자 큰 스승이라고 불리던 이어령 선생님이 별세하셨다. 그 이후 선생의 유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러 책들이 출간되었는데 그 중 시집이 들어가 있어서 상당히 의외였다. 에세이나 소설 같은 것만 집필하였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알지 못했던 시인의 이력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어령 선생님의 시들이 무척 궁금해졌다. 전문 시인으로서의 감성적인 글귀보다는 아마도 작가와 문학가로서의 문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어령 선생님 정도의 지성이 쓴 시라면 과연 어떤 느낌일지 상당히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시를 보고 감상을 적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시를 분석하거나 그 속에 담긴 함의를 끌어낼 만큼의 문학적 소양이 없다보니 에세이나 수필 같은 다른 문학작품과는 다르게 시집은 그냥 인상비평이나 하며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둔하고 무딘 시알못의 눈으로도 이 시집에서 이어령 선생이 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같은 것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대로 이 시집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감정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아마도 이어령 선생님의 아픈 가족사를 아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다가 신자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된 계기라던지, 먼저 떠나보낸 딸과 손자의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특히 딸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와 아픔을 이해하려면 사전 지식이 필요할 것 같다. 생전의 인터뷰에서 이어령 선생은 딸에게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딸인 이민아 목사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 탓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였는데 아마도 이어령 선생은 그 일이 일생의 아픔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이민아 목사가 암으로 먼저 사망하자 그 오해를 풀길이 없어 더욱 미안한 마음과 그리움이 가득 남아있었을텐데 그런 마음이 이 시집에 절절하게 묻어난다. 이 시집은 전체가 선생님이 평생을 살며 느낀 감정과 생각을 응축해놓은 것처럼 생각된다.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책은 총 4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1부 까마귀의 노래는 신을 믿으며 얻게된 영적 깨달음을, 2부 한 방울의 눈물에서 시작되는 생은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3부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4부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는 먼저 떠나보낸 딸을 향한 아버지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 있는 4부일텐데 딸에 대한 그리움은 꼭 4부에 국한되지 않고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물론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시라는 것은 상징으로서 읽어내는 것이므로 그 상징을 그리운 딸이라는 뜻으로 생각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만한 시들이 많기 때문에 시집 전편에 딸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1~3부에서는 시대의 지성으로 사람들에게 남기는 인간에 대한 희망, 성령에 대한 강한 믿음, 생명의 가치 같은 내용이 담겨 있지만, 4부에 들어서면 아픔과 슬픔에 빠진 한 아버지로서의 비통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퀴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역시 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구글링을 해보니 이민아 목사가 생전 살았던 곳이 캘리포니아의 헌팅턴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가족을 잃고 그리워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제목에 담긴 그리움과 회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시집의 서문은 별세 나흘 전에 쓴 것이라고 하는데 역시 먼저 떠난 딸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그 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먼저 떠나간 딸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과 그것은 신의 뜻이며 생명의 순환이라는 깨달음 속에 평소 선생이 말했던 좌우명인 메멘토 모리에 대한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대의 지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 한명의 아버지로서의 이어령 선생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