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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 과거에서 기다리고 있는 미래
민이언 지음 / 다반 / 2021년 6월
평점 :

추억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생각나고, 멀어질수록 더욱 또렷해진다. 누구나 지나간 시간의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고, 그 이야기 속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이다. 10년, 20년 전이라고 말로 하면 겨우 두 글자지만 지내보니 꽤 긴 세월이었고 다시 오지 못하기에 그 시간들이 더욱 소중하고 자꾸만 생각이 나는 것 같다. 몇 해전 응답하라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내가 스무살이었던 시절을 추억하며 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함에 젖어드는 것. 그것이 추억이 아닐까 한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로부터]는 본격 추억팔이 감성에세이다. 마치 20세기에 헤어진 초등학교 친구들을 21세기가 되어 다시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20년 전의 이런저런 추억들을 떠들어대는 듯한 느낌의 감각들. 그 즐거움과 애틋함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그때 그 시절을 정의하는 고유명사들이 쭉 나열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느낌이 들고, 그 때 그 시간으로 추억여행을 하게 된다.
물론 아마도 저자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나이대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저자의 20년 전 기억이 나의 20년 전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응답하라 97, 응답하라 94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 3년의 시간차이에도 스무살의 청춘들이 느끼고 공유하는 문화나 정서는 엄청나게 많이 다르고 그들이 거쳐온 시대정신도 완전히 다르다. 심지어 같은 시절을 지내오며, 같은 시간을 보냈더라도 같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똑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지난 시절의 추억이 저자와 똑같지는 않을 것이고 소위 말하는 공감하는 기억이 적을 수도 있다. 같은 시절의 다른 기억. 하지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때가 찬란한 봄날이었다는 마음만은 모두 같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떠나보낸 나의 봄날에 대한 마음과 지금은 사라진 내가 가졌던 고유명사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내 것인 적이 없었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지 못한 텅 빈 시간들
A Better Tomorrow
영웅본색의 영어 타이틀이다. 책의 네번째 쳅터의 타이틀이 늦게 도래한 화양연화인데 나에겐 이 영웅본색이 늦게 도래한 영화였다. 영웅본색 세대이긴 했지만 당시엔 홍콩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웅본색을 보고서도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다. 그냥 당시 흔한 홍콩의 액션 영화의 하나로만 기억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만난 영웅본색은 뭔가가 달랐다. 홍콩 영화 사상 최고의 작품이란 평론가와 세간의 평가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다시 만난 영웅본색은 그야말로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내가 영웅본색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후였고 그 영화에 열광하며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공중전화 부스에 기대어있는 동시대적 경험을 하지는 못했었다. 저자는 홍콩에 갔을 때 장국영이 생을 마감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 가장 먼저 갔다고 한다. 그 후 영웅본색 2에 나온 공중전화 박스를 찾으려 했지만 이미 철거되고 없어진 탓에 아무 공중전화 박스에 가서 분위기를 느끼고자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주윤발이 신문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던 오전 6시 40분의 대만의 시먼딩 교차로 육교에 서보고 싶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곳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한 것 같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을 멈춰 서게 한 듯한 그런 공간들
오이도의 추억
저자는 장례식장에 갔다가 아침에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서 탔고 눈을 뜨니 종점인 오이도였다고 한다. 덕분에 회사에 한참 늦었다고 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전한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이도에 간 것이라는데 개인적으로는 오이도에 여러번 갔었다. 업무 때문에 그리고 연애 때문에 오이도에 참 많이도 갔었다. 하필이면 오이도에 사는 사람과 두 번 연속으로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서 서울에서 오의도로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그 곳에서 사랑의 기쁨과 실연의 아픔을 맛보기도 하고, 더할나위 없이 행복해 하다가 절망과 좌절을 겪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앉아 오는 내내 눈물을 흘렸고 주위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처다보던 기억까지. 내게 있어 오이도는 한없는 사랑과 끝없는 아픔의 추억이 있는 장소이다.
소년의 여름에 찾아냈다
여기 영원히 부숴지지않는 다이아몬드
칵테일 사랑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나온 그 해 여름은 정말 더웠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시원하고 발랄한 레게풍의 음악이 대유행을 했었는데 김건모의 핑계의 대히트로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룰라의 100일째 만남 그리고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등이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죄다 통큰 데님팬츠나 7부 바지에 조끼와 워커를 코디하고 다녔었다. 지금 보면 참으로 아스트랄하지만 그 땐 그게 멋이었다. 개인적으로 칵테일 사랑은 뜨거웠던 여름과 아스트랄하고 멋진 패션들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저자는 학창시절 외출증을 받아들고 저녁 시간 때 교문 밖으로 나가 잠깜 동안의 자유를 만끽했는데 그 때 칵테일 사랑을 들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잠깐 동안의 자유와 이 노래의 몽환적인 느낌이 어울어져서 깊은 여운을 남긴 모양이다. 사실 내가 칵테일 사랑을 들으면 뜨거운 여름날을 떠올리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94년 여름의 뜨거운 여름 태양에 흐물흐물 녹아든 배경 속에 이 곡이 함께 녹아들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자유롭고 늘어지는 몽환적인 시간이 칵테일 사랑이란 노래와 정확히 싱크로 되어 그 추억의 배경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는 기억 속에서 햇빛 쏟아지던 날들의 풍경은 왜 그토록 찬란하던지
길 위에서 만난 순간
예전에는 길보드 차트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처럼 mp3가 아닌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시절. 소위 삐짜 불법 복제 테이프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 많았다. 엄연한 불법이지만 누구나 그걸 당연하게 사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었다. 수요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보니 웃기게도 리어카에서
틀어주는 노래로 당시 최신 인기곡들을 가름할 수 있었고, 역으로 리어카에서 노래를 틀어줘서 많이 알려지고 인기를 끌게되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노래에 대한 밑바닥 민심이 그대로 묻어있는 바로미터였다. 물론 저작권이라는 것은 지켜져야 하고 불법으로 지적 재산권을 유통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카세트 테이프라는 것이 사라진 지금은 그리운 문화로 기억된다.
책의 소제목들은 영화 제목이나 노래 제목, 노래 가사, 만화책 제목 등을 차용한 것들이 많아서 소제목 자체만으로도 찡해지는 울림이 느껴진다. 그런데 내용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느낄 수 있을 만한 내용들보단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이 더 많다. 그래서 광범위하게 모든 글에 공감하거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보편적인 추억팔이를 했어도 완벽하게 공감하지 못할 수 있는데 여긴 오히려 개인적인 일, 개인적인 경험, 개인적인 감정을 나열해놓아서 상당부분 나와의 공통분모를 찾기는 어렵다. 책에 나오는 저자의 개인적인 기억만을 따라가기보단 그와 관련해서 나의 개인적인 추억을 떠올려보면 더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