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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1 ㅣ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평점 :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처음 개미로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나 역시 베르베르의 개미를 처음 읽고 바로 빠져들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개미의 시선으로 씌여진 이야기는 신선했고, 독창적이고, 기발했다. 기존의 정형화된 형식과는 스타일이 달랐고, 인간의 시점과 개미의 시점을 오가는 스토리 진행방식은 이후 크게 인기를 끌었던 영화 펄프픽션처럼 참신했다. 뒤이어 나온 영계 여행을 다룬 타나토노트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베르베르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기도 한데, 영계를 여행한다고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은 정말 놀라웠다. 개미가 현미경으로 개미의 생태를 관찰하는듯한 섬세한 묘사를 했었다면 타나토노트는 삶과 죽음, 환생이라는 심오한 주제가 우주를 무대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베르베르의 영원한 화두인 죽음 너머의 삶과 신비, 영혼과 환생이라는 주제가 나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작품인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 신으로 이어지는 3부작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 3부작에서 베르베르는 사후 세계와 환생, 신에 대한 이야기를 동양적인 관점과 서양의 시각을 믹스해서 탈종교적인 세계관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환생과 영계라는 것은 분명 동양적인 사상에 기인하는 것들로 베르베르가 동양의 세계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베르베르는 일반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다룬다. 과감하게 곤충을 주인공으로 삼은 개미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저승 이야기를 다룬 타나토노트,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인 아버지들의 아버지, 세계 각국의 신화 속의 여러 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 수호천사의 이야기 천사들의 제국 등 일반적이지 않은 주제의 글을 많이 쓴다. 기독교 세계관의 단일신이 아닌 신화 속의 신들을 주제로 삼거나 불교적 세계관인 환생을 주제로 삼는 등 동서양의 신화를 차용한 신비주의적인 주제를 주로 많이 다루는데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이렇게 베르베르 소설은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에, 동양적인 철학과 고대의 종교와 신화 등도 차용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었다. 이 점이 베르베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어느 특정 종교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든 종교의 뿌리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전제가 된 것 같다. 어쩌면 한가지의 사상에 전도되지 않기 때문에 기발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주제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베르베르는 기발한 상상력과 기존의 사고를 뒤집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색다르게 이끌어가고, 흥미롭고 색다른 주제로 호기심을 자극하여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며, 뛰어난 이야기꾼이라 흡입력있게 글을 쓴다. 그래서 순수하게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베르베르의 소설은 나무랄 때가 없다. 베르베르의 소설은 과학적인 내용과 짜임새있는 구성으로 스토리가 탄탄하고, 마치 영화를 보는듯한 묘사와 상황설명에 글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베르베르의 소설은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완독하게 된다.
이번 작품 [문명]은 몇 년 전에 나온 고양이와 연계되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전작을 읽지 못해서 좀 걱정했지만 전작과 이어서 보면 더 좋겠지만 전작의 내용을 모른 채 바로 이 책만 봐도 전혀 상관없다. 나같은 독자를 위해 소설의 도입부를 이야기의 주묘공인 바스테트의 소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명]에서는 다시 개미 때처럼 냥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형식으로 회귀했다.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종일관 암고양이 바스테트의 시점으로만 진행되므로 과거처럼 다중화자의 구조는 아니라서 이전 작품보다는 조금 단조롭게 느껴진다. 대신 해설처럼 챕터 사이사이에 베르베르의 인장과도 같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삽입되어 있어서 반갑게 느껴진다.
베르베르의 팬이라면 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매우 반갑게 느껴질텐데 이 백과사전은 개미 때 처음 등장했던 가상의 백과사전으로 약간 베르베르의 시그니처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작중에 나오는 설정의 기반이 되는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내용을 추가적으로 설명하는 장치로 아마도 작가가 소설을 쓰기전 사전 조사한 내용을 그런 형식을 빌어 각주처럼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문명]에서는 개미에서 그 백과사전을 만든 에드몽 웰즈의 후손인 로망 웰즈가 등장해서 인류와 문명이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인류의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편집한다는 설정이다. 선조가 만든 백과사전을 더욱 보완하여 확장시킨 백과사전을 USB에 담아 고양이 바스테트의 목에 걸어주는데 이로서 문명이 인류에게서 고양이로 넘어간다는 상징을 가진다.
마치 지금의 코로나 시국처럼 신종 페스트가 창궐하며 세상이 어지러운데 인류는 테러, 내전까지 벌이다가 그야말로 문명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고, 이때 갑자기 늘어난 쥐 떼가 지구의 새로운 주인이 되려고 하는 시대가 배경이다. 지금까지 오랜시간 지구의 주인처럼 행세해오던 인류가 사라지게 되자 누가 지구의 새로운 주인이 될지 동물들이 패권을 다투는데 고양이 바스테트는 쥐 떼의 공격에 대항하며 인간의 문명을 대신할 냥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물론 당장은 급격히 늘어난 쥐 떼의 공격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이 1차적인 목표지만 최종목표는 인류 문명을 대신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고, 바스테트는 스스로를 곧 세상을 지배하게 될, 지금의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진화시킬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스테트는 냥이의 문명을 만들기 위해 돼지, 소, 개, 비둘기 등의 다양한 동물들과 연합하기도 하고 반목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가 바로 공존이다. 고양이 바스테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베르테트가 만들고자 하는 냥이 문명은 인간의 문명과는 분명 다르다. 동물들의 관점에서는 인간은 식용을 위한 도축, 투우, 동물 실험 등 동물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래서 동물들은 모든 인간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벌로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며 인간 이전에서 세상은 존재했듯, 인간 이후에도 세상은 존재할 것임을 말한다. 지구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우리 인간에게 인간의 위치와 존재를 각인시키는 부분이다. 돼지 앞에 끌려와서 재판을 받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그동안 지구의 주인 행세를 했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류의 멸망은 꼭 페스트의 창궐이나 전쟁 때문이 아니라 공존하고 협력하지 못하는 인간의 야만성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존이란 인간과 동물의 공존일 수도 있고 인간 끼리의 공존일 수도 있다. 인간은 인간끼리 공존하고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며 문명을 파괴시켰고, 미식과 여흥, 실험 등의 이유로 동물들도 거침없이 살육하는 야만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쥐들의 왕은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살아남은 생존쥐로 그 때의 경험 때문에 인간에 대한 무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잔인함이란 인간적인 것이라는 말을 한다. 쥐들이 페스트로 인간을 죽이고 패권을 얻은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잔인한 실험에서 시작된 나비효과이다. 반면 동물들은 종을 따지지 않고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며 세상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고양이는 인간이 문화까지 끌어안는다. 고양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문명은 인간 문명을 전부 없애고 無에서 새롭게 쌓아올리는 문명이 아니라 기존의 인간의 문명을 이어받은 인간과 동물의 협동 문명이다. 그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이 기억의 수호자란 이름으로 불리는 로망 웰즈 교수가 만든 인류의 모든 지식을 모아놓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USB이다.
소설 속에서 이 세상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계속 등장한다. 단순히 동물을 도축하지 않기 위해 비건을 해야 하고,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아니라 공감과 연대로 동물들과 공생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말하자면 보호해야 한다는 그 자체도 인간중심적인 시각이 담겨있는 생각이라서 베르베르는 애초에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자는 논리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 시점의 내용은 빠지고 고양이의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전 소설들과는 약간 형식은 바뀌었지만 베르베르의 소설은 여전히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재미있게 옮겨낸 번역도 글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 작품은 문명 3부작 중 두번째 작품이라고 하니 가능하면 이전 작품도 읽고 전작의 연계성을 찾아가며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약속의 땅인 뉴욕에 도착한 냥이들에게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냥이들의 새로운 문명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최종권도 기대된다.
문명은 1, 2권으로 출시되었는데 문명 1권은 지상낙원과 제3의 눈의 전반부, 문명 2권은 제3의 눈 후반부과 유머, 예술, 사랑 편으로 구성되어졌다. 1권에서는 앞서 말한대로 우선 소설의 주묘공인 고양이 바스테트의 소개와 인류가 망하고 바스테트가 고양이의 문명을 건설하게 되는 배경이 보여진다. 페스트의 창궐과 테러와 전쟁으로 인해 도시는 폐허가 되고, 인간 문명은 파괴되어 세상의 종말, 아니 인류의 종말이 찾아오게 된다. 말그대로 인류의 디스토피아와 고양이의 지상낙원이 함께 도래한 것이다. 인간이 사라진 땅에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한 동물들의 패권싸움이 시작되는데 이 전쟁에서 가장 우위에 선 건 쥐 떼들이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쥐 떼들의 힘은 강력했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쥐떼들은 다른 종을 몰살시키며 쥐의 왕국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 쥐 떼를 이끄는 것은 티무르 대장이다. 티무르 대장은 오르세 대학 실험실에서 머리에 제3의 눈을 설치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제3의 눈은 머리에 USB단자를 꽂을 수 있는 구멍으로 제3의 눈이라 불리는 구멍에 USB를 꽂으면 컴퓨터에 접속해서 인간들이 축적해 온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쥐 떼의 대장 티무르 이외에도 샴고양이 피타고라스, 돼지 왕 아르튀르도 이 제3의 눈을 가지게 된다. 티무르는 인터넷과 연결되는 제3의 눈을 통해 인간의 군사적 전술, 정치적 목표 등을 학습하게 되었고 그런 인간의 지식이 쥐 떼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강력한 군대로 만든 것이다. 티무르가 이끄는 쥐들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평범한 쥐가 아니라 훨씬 진화한, 그리고 더 위험한 녀석들이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티무르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티무르는 중세 정복자 중 유난히 잔인했던 인물로 칭기스 칸의 몽골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던 정복자였다.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고, 지금의 이란, 이라크, 조지아 등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을 정복했는데 티무르가 정복한 곳의 패배자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쥐의 우두머리가 이 잔인한 정복자 티무르의 이름을 가진 것에서 이미 쥐 대장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수십만의 쥐들을 지휘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하얀 쥐 티무르. 티무르는 왜 이렇게 인간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는 것일까? 그 해답은 2권에서 보여진다.
쥐를 잡는 고양이들이 쥐 떼에 몰려 도망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며 고양이들은 자신들만으로는 쥐들에게 대항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지원군을 포섭하기 위해 원정대를 꾸린다. 그 모험길에서 같은 고양이 무리에게 배신을 당하게 되는데 티무르의 군대에 쫓겨 도망치던 바스테트 원정대는 급수탑에서 살아남은 고양이들을 만나게 되고, 바스테트는 그 고양이들을 설득해서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고 하지만 급수탑의 고양이들은 바스테트에 협력하는 대신 성난 티무르에게 바스테트 일행을 넘겨주고 급수탑 공동체를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포로로 잡힌 바스테트 일행은 물로 뛰어들어 도망친다.
우여곡절 끝에 원정대는 제3의 눈 실험이 행해졌던 오르세 대학에 도착하고, 여기서 바스테트는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인간의 지식에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제3의 눈을 설치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바스테트가 조금 더 갈등하거나 겁을 내면서도 자신이 꿈꾸던 것을 이루기 위해 큰 결심을 한다는 식으로 심적인 묘사가 좀 더 보여졌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너무 갑작스럽게 수술을 결심하고 바로 수술대에 오르는 듯해서 핍진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쨌건 바스테트가 제3의 눈 수술을 하는 것으로 1권은 마무리가 된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