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생
곽정식 지음 / 자연경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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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벌레보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치 벌레처럼 작고, 하찮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미 벌레에는 하찮다는 무시, 괄시, 천시,멸시, 등한시하는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벌레를 대하는 현대의 인간들의 스탠스는 주로 박멸하고 죽이는 행태를 많이 보인다. 그로 인해 도시에서는 벌레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예전엔 도시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벌레를 만날 수 있었지만 이젠 그 흔한 나비, 잠자리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곤충들은 다른 생명체와 서로 공존하고 있지만 인간은 벌레는 하찮다는 인간의 시선으로 해충과 익충으로 구분하여 생사여탈권을 쥐고 생명체에게 고통을 가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린 그 작은 생명체에게서 삶에 대한 큰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충선생]은 한자 이름에 벌레 충虫자가 들어가는 벌레 21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파브르 곤충기 같은 단순한 곤충에 대한 자연과학적 정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철학과 문학 등이 가미된 인문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충선생은 한국의 고전 문학에서 자주 보이는 가전체소설의 느낌도 준다. 서양식 자연과학적인 관찰이 아니라 곤충과 인간을 함께 두고 인간과 함께하는 그 어울림 속에서 곤충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충선생들은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충선생,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는 충선생, 지상에 사는 충선생, 해충으로 알려진 충선생 그리고 충선생이 아닌데 이름에 벌레 충 虫자가 들어가는 개구리, 두꺼비, 지렁이, 뱀과 같은 파충류까지 다섯 그룹으로 묶어서 소개하고 있다. 곤충의 형태, 행동과 생태 등 가장 기본이 되는 자소서부터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충선생의 흔적이나 문학과 고사에 등장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알아보기도 하고, 곤충이 가진 특징과 연결되는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곤충과 관련된 온갖 장르의 인문학적 내용이 가득 담겨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는 곤충에 어원이 있는 것들도 있는데 책에는 그런 단어를 하나 소개하고 있다. 고혹하다는 말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고는 접시 속 벌레라는 뜻이라 한다. 접시 속의 벌레와 매력적이라는 의미는 전혀 매치가 안되는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한자 蠱(고)는 접시 위에 벌레가 놓여있는 형태인데 글자 모습대로 지네, 독거미, 전갈 같은 독충을 접시에 담고 뚜껑을 덮어두면 서로 배틀로얄을 벌이다 한마리만 살아남는다. 이 최후의 승자를 고충이라 불렀고, 고충에게는 주술의 힘이 있어서 고충을 통해 주술을 걸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질일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고혹이란 주술로 마음을 움직일 정도의 매력이란 뜻.


속담이나 고사성어에 등장하는 충선생도 있는데 그중 유명한 것으로 형설지공과 낭형조서에 나오는 반딧불이가 있다. 부잣집 자제분들은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지만 가난한 아이는 주머니에 반딧불이를 넣고 그 빛으로 공부했다는 고사이다. 일본에는 '우는 매미보다 울지 않는 반딧불이가 몸을 태운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입으로 왈가왈부하는 사람보다 조용히 실천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왜 하필 매미와 반딧불이를 비교했냐면 이 둘의 생애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매미는 땅 속에서 7년을 보내다 어른이 되면 땅 밖으로 나와 바로 며칠만에 죽고 만다. 짧은 전성기 동안 짝짓기를 하기 위해 그렇게 울어재끼는 것이다. 반딧불이도 성충이 되면 입이 퇴화되어 이슬만 먹고 2주를 살다 단명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짝짓기를 해야 하는데 반딧불이는 매미처럼 우는 대신 불을 깜빡이며 짝짓기 상대를 찾는다. 녀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목숨을 다해 살아가는데 매미가 낫네 반딧불이가 낫네하며 재단하면 안된다.


반딧불이가 입이 퇴화되었다면 눈과 발이 퇴화한 충선생이 있는데 바로 지렁이 되시겠다. 지렁이를 토룡이라고 불렀는데 한자로는 토룡이 아니라 구인(蚯蚓)이라고 한다. 우선 지렁이는 곤충이 아니다. 이름에 벌레 충 虫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충선생에 끼워줬을뿐 곤충이 아니다. 그럼 왜 지렁이를 뜻하는 구인이란 글자에 벌레 충 虫자가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지렁이 蚯자가 지렁이가 쌓아놓은 배설물 덩어리를 의미한다니 똥무더기(丘) 옆에 벌레(虫)가 꼬인다는 느낌을 표현한 것 같다. 어쨌건 지렁이는 햇빛이 안 드는 축축한 땅속에 사는 동물이다. 비가 오면 땅 밖으로 나오는데 지렁이는 피부로 호흡하는데 비가 오면 땅속에 있는 집이 물이 차서 숨쉬기가 힘들어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란다. 지렁이는 오직 1차원적으로 직진밖에 하지 못해서 장애물을 넘거나 U턴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지렁이지만 땅속에서는 땅을 헤집고 다니며 산소가 공급되어 식물이 잘 자라게 된다고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지렁이를 빗대어 지도자로서의 안목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벌레 한 마리를 두고 다양한 영역의 인문학적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며 벌레와 인간에 대해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


앞에서 지렁이 똥 얘기가 나온 김에 똥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똥하면 떠오르는 충선생은 말똥구리, 쇠똥구리다. 심지어 낙타똥구리도 있다는데 이 선생들은 주식을 뭘로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딱정벌레목 풍뎅잇과로 족보가 같다. 1980년대 초까지도 시골에 가면 쇠똥구리를 심심치 않게 봤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대가 끊어진 것이다. 쇠똥구리는 소똥을 떼어서 공으로 만들어 묻어놓고 그 안에 알을 낳는다고도 한다. 소똥은 쇠똥구리에게 일용할 양식이자 아늑한 보금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소들이 여물이 아닌 사료를 먹기 시작하면서 똥이 물러지다보니 공을 만들기 어려워졌고, 사료에 질소 성분이 많으면 소똥 속에 가스가 생겨 유충이 살기 어렵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쇠똥구리는 쇠똥을 만들지 못하는 실업상태가 되고 결국 가정이 무너진 것이다. 인간은 뭐든 유기농으로 먹으려 하는데 정작 친환경 유기농 여물이 필요했던 건 쇠똥구리였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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